사사기

사사기 강해18

푸른 섬 2012. 4. 15. 19:05

사사기 강해 18

입산, 엘론, 힐렐



음성

사사기12장8-15

세 사람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베들레헴 입산, 스불론 사람 엘론,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

이 사람들이 한 일을 한번 볼까요?

먼저 베들레헴 사람 입산입니다.

9절을 보면 “그가 아들 삼십과 딸 삼십을 두었더니 딸들은 타국으로 시집 보내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타국에서 여자 삼십을 데려 왔더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칠년이라 ”

10절에는 그가 죽어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여러 사사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要約하겠습니까?

예를 들면 기드온의 경우 말입니다.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은 자녀 칠십일명을 두었다. 그는 사십년 동안 사사가 되었었다. 그가 죽으니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 되었더라.

이렇게 기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사들의 활동이 몇 년 정도 되는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옷니엘의 경우는 사십년, 에훗은 팔십년, 삼갈은 년수가 없어요. 드보라는 사십년, 기드온은 사십년, 돌라는 이십삼 년, 야일은 이십이 년, 입다는 육년, 입산은 칠년, 엘론은 십년, 압돈은 팔년, 그리고 마지막 삼손은 이십년입니다.

이렇게 보면 활동기간이 짧다고 해서 간단하게 기록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입다의 경유는 육년밖에 안되지만 길게 기록한 경우에 들어갑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사사기를 기록하게 하실 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기록할 사사는 간단하게, 길게 기록할 사사는 길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만나는 사사들은 왜 이렇게 짧게 기록되었을까?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까요?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읽을까요 아니면 말씀 중심으로 성경을 읽을까요?

두말하면 잔소리 아닙니까?

말씀 중심 아닙니까?

그렇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언제나 나 중심입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읽으면서도 짧게 나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잖아요.

짧게 기록된 그 말씀 속에 무엇을 담고자 하셨는지 생각하지 않잖아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신의 관심 밖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욥기를 보면서 사람들의 모든 관심은 어디에 쏠립니까?

욥에게 집중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욥이 고난 중에 친구들이 없었다면 욥의 그런 모습이 드러날까요?

이것뿐만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역할과 마귀의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배후세력으로 보고, 눈에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사람들은 누구를 주목합니까?

욥을 주목하지요.

그런데 욥기를 읽어 보면 친구들이 이야기가 상당히 길게 나옵니다. 그들의 주장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죄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생각들을 왜 그렇게 길게 기록해 두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의 생각을 깊이 상고하라는 말입니다.

좀 이상하지요. 하나님의 말씀만 깊이 생각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잘못된 말들을 생각해야 합니까?

그러면 왜 성경에 그런 말을 기록해 두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포함되지 않습니까?

포함되지요. 어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만 빨간색으로 표시해 놓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지요. 성경말씀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잘못된 자들의 말들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느냐 말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볼 때 입장이 본받을 대상을 찾습니다. 욥기를 읽으면 욥을 본받으려고 하지요.

사사기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들을 보면서 본받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사들의 경우 본받을 것이 없어요.

입산을 다시 봅시다.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들 딸들을 밖으로 시집보냈고, 아들들을 위해서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 왔더라. 그리고 죽고 장사 되었다.

사사 입산의 무엇을 본받을까요?

자녀 많이 둔것. 그러려면 아내가 많아야 하겠지요.

아니면 시집은 밖으로, 장가는 안으로. 이걸 본받아야 하나요.

여기에서 잠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성경이 개역개정입니다. 그전성경은 개역성경이라고 해요. 번역에 따라서 성경을 그렇게 불러요.

영어성경도 그렇지요. kjv 나 아니념 niv 나 여러 번역본이 있지요.

어떤 사람, 어떤 신학성향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번역이 약간이 다릅니다. 많이 다른 부분도 있고요. 마귀가 백날 설처도 성령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니 번역본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번역본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담았다고 주장하는 무리가 있어요. 주님을 글자 안에 가두어 두려고 해요.

그렇다고 번역본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주님은 사용하시지요.

완벽하냐 안하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입다를 살펴 보았듯이 개판인 입다를 완벽한 믿음의 사람으로 보여주셨잖아요.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왜 제가 번역본 이야기를 했는고 하면, 개역성경에서는 타국으로 시집보내고 타국에서 여자를 데리고 왔다라고 해요. 그러나 개역개정에서는 그냥 밖에서라고 번역해요.

느낌이 달라요 같아요.

만일 개역성경으로 보게 되면 입산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으로 느껴지지요. 가나안 사람의 딸과 아들과 결혼시키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신명기7장3-4절입니다. “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가나안 족속과 결혼시키면 멸망당한다는 말씀이지요. 결혼 시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풍습이 나오지요. 아버지가 책임을 집니다. 입산도 그렇지요. 딸들을 시집보내었고, 딸들을 데려 왔다라고 하지요.

그러면 왜 개역개정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히브리어 단어를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후츠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뜻이 밖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대부분 번역이 다른 지파로, 다른 지파에게서 이런 번역을 했어요. 어떤 경우에는 일가 아닌 사람에게 시집보내고 딸들을 데리고 왔다라고 해요.

그러니 단어 뜻 하나가 여러 가지 해석을 할 수 있게 해요. 왜 그래요. 보는 주체에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말씀으로 들어가 보면 이런 표현, 전체 구절 표현 있지요. 이런 표현을 언제 사용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어요. 그것이 바로 방금 본 신명기 7장3절이 오늘 본문 9절의 바탕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깔려 있어요. 이렇게 보면 사사 입산은 신명기 7장3절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석들을 보더라도 입산을 변호하려고 해요. 이방인과 혼인 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특이성이 그 의미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왜 입산을 좋은 쪽으로 보려고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본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십자가의 피를 전합니다. 그러니 입산이 율법에 불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삼손에 가면 알 수 있어요.

삼손이 이방여인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고 하지요. 이것이 여호와께로 나온 것입니다(삿14:4).

비록 짧게 기록되어 있는 사사 입산이지만 그의 자녀들을 결혼시키는 것을 통해 죄가 드러나고 주님의 긍휼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엘론이 나옵니다.

사사 엘론의 경우 사사가 되어 십년동안 이스라엘을 다르시고 죽고 장사 되었다가 끝입니다.

그리고 나온 사사가 바로 사사 압돈입니다. 압돈의 경우는 이젠 사사들과 비슷하게 아들 사십, 손자 삼심, 어린나귀 칠십 필을 탔었다. 팔 년 동안 사사를 했다. 그리고 죽고 장사되었다라고 합니다.

사사 압돈에게는 어떻게 며느리를 구했다가 나오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가 침묵해도 되겠지요. 그러면 엘론의 경우는 어떤가요? 내용이 없어요.

창세기 5장을 한번 봅시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나오지요.

이들의 특징은 낳고 살고 죽는 것입니다. 물론 특이한 것은 에녹이라는 사람과 므드셀라와 노아이지요.

그런데 별것이 없어요. 별개 없다는 말은 우리들이 ,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것이 없다 말입니다.

창세기4장16절 이하를 보면 가인의 후손들이 나와요.

그런데 이들은 볼 볼일이 있어요.

이들은 낳고 살고 죽었다라고 기록하지 않았어요.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부터 기록합니다. 에덴 동쪽 놋 땅입니다.

왜 이곳에 거주할까요? 에덴 동쪽에 뭐가 있어요.

에덴동산으로 향하는 문이 있잖아요. 물론 불칼로 천사들이 지키고 있지요.

이들은 호시탐탐 이곳을 노리는데 이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곳을 공격합니까? 아닙니다.

성을 쌓습니다. 아내 둘을 챙깁니다. 가축치는 자의 조상, 그리고 수금과 퉁소 잡는 자의 조상이 이들에게서 나옵니다. 또한 최초의 영웅 라멕이 등장하지요.

자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아담 자손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목축업 안했을까요? 음악 하지 않았을까요? 다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을 쌓지 않았을까요? 다 쌓았어요. 그런데 관심이 달라요. 즉 그들이 보여 주는 것이 달아요.

가인 계열은 심판받아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역할을 해요. 그러나 아담계열은 어떤 자가 심판가운데 구원을 얻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해요.

그래서 창세기 5장에서 아담의 자손을 기록할 때 낳고 살고 죽은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놓고, 우리들이 기대하는 본받을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어요.

제가 창세기 4,5장을 본 이유는 사사기를 기록하는 경우도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뭔가 다르게 살았을 것이라는 꿈을 꾸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 상상이 성경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입산, 엘론, 압돈을 좋게 보려고 하고 좋게 해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사들 속에 이들을 집어 넣어 버리면 이들 또한 입다와 별로 다르지 않고, 기드온과도 다르지 않고, 드보라와도 다르지 않고, 삼손과도 다르지 않는 사사들임이 분명해 집니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짧게 기록된 사사들을 보면서 우린 딴 꿈을 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딴 꿈을 꾸려고 해요.

사사를 생각하면 아 죄 뿐이구나가 남아야 되는데, 사사를 생각하면 영웅이 떠오른다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왕이 없기 때문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성경을 보고 해석하고 적용을 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 자신이 곧 왕이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믿는 것이라 생각해요.

여러분,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몰라서 자신이 왕이 되어 살았습니까? 아니지요.

누가복음19장12-27절에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왜 나오게 되었는고 하면 11절에 나와요.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예수님을 따라는 자들의 꿈이지요. 빨리 끝내시라. 이제 구원받아 끝나는 구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꿈꾸고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십자가의 피가 죄를 사하고, 그 피가 근거가 되어 심판을 행하시는 분임을 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의 관심은 이제 이 고달픈 세상이 끝나는 구나. 예수님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세상 끝내세요. 이것이 이들의 마음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과 다르지 않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고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종이었지요. 그런데 왕이 백성으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종에서 백성 대우 받으니 자기가 왕노릇합니다. 그러니 장사를 어떻게 했을까요?

어차피 왕은 눈앞에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언제 올지 몰라요.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이지요.

왕됨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왕됨을 원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하는지 봅시다.

이제 왕이 왔어요. 왕이 없었을 때 그들이 왕을 왕으로 섬기고 살았는지 살지 않았는지가 드러납니다.

그 첫째는 한므나로 열므나를 남겼다고 합니다. 칭찬받았어요.

둘째는 한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겼답니다. 그래서 다섯 고을 받았어요

또 한 사람이 와서 한므나를 내어 놓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이 하는 말을 주목해 보세요.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 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이 사람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아요. 주인을 너무 잘 알지요.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분.

하나님의 창조가 그렇잖아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새창조도 그렇지요. 이 한 사람은 주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우리가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라는 주장이지요.

그래서 한 므나를 땅속에 묻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가 주인의 왕됨을 원치 않는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주인이 므나를 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겨라입니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어서 입니까?

만일에 장사하다가 다 날린 사람이 있다면 어떡합니까?

물론 비유에는 없지요. 비유에 말씀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한므나로 다섯므나, 한 므나로 열므나에 대한 말씀을 하셨고, 이에 반하여 행동한 한 사람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왕됨을 원치 않는 자가 누구냐? 누가 왕됨을 원하느냐를 분류하는 것이지요.

왕됨을 원치 않는 자는 자신이 왕이 되어 살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이라는 것도 자 자기 중심입니다.

지난주 에브라임하면서 말씀드렸지요.

그러나 왕됨을 원하는 자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만 왕이 계심을 전하며 사는 자입니다.

열심히 일하자가 포인트가 아닙니다. 많든 적든 남기자가 포인트가 아닙니다.

삶 자체가 어떤 사람은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삶이요. 어떤 사람은 자신이 왕됨을 전하는 삶을 산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왕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 모두가 다 왕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한쪽은 자신이 왕노릇하고 다른 한쪽은 왕이 따로 계심을 전하고 살아요.

결국 이들은 영원한 죽음을 당합니다. 둘째 사망이지요.

성도가 살아가는 것이 왕이 누구냐? 세상의 주님의 누구시냐를 전하는 삶입니다.

오늘 세 사람의 사사를 보면서 주님이 따로 계심을 세 사사가 전하고 있어요.

그게 눈에 보여야 성도입니다.

주님의 왕됨을 싫어하는 자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도 어떻게 하면 자신이 왕이 될 것인가에 관심이 가 있어요.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얼마나 챙기는지 몰라요. 그러니 이런 모습이 십자가의 피를 무로 돌리는 ,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주되심을 싫어하는 행위란 말입니다.

지금 주님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요. 그러나 누가 종 되었다가 그의 백성이 된 자인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서도 또 많이 남기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오겠지요. 이런 자들은 결국 자신들의 행위를 자랑해요. 자신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이것을 했다라고 입으로 떠들어요. 예수님의 왕되심, 주님 되심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이들은 성경을 보아도 어떻게 하며 내가 더욱더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연구하는 자들입니다.

자 이것을 사도행전으로 가서 봅시다.

14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줍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사를 못하게 하죠. 사도행전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고치지요. 사람들이 놀랍게 여기니 뭐라고 합니까?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러면서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이고니온에서 돌에 맞아 반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요한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자신이 어떻게 하면 왕이 되느냐에 있어요. 그런데 성령 받은 베드로, 요한, 바울, 바나바의 경우는 자신들을 부인하지요. 누구를 전합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은 무엇을 전합니까? 성도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무엇을 전합니까?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자신, 받은 것을 전하고 있지요.

그러니 이들이 바로 한 므나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의 왕되심, 주님 되심을 원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주님의 능력에 의해 그 사람 각자의 주님이 누구인지가 드러나는 쪽으로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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