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 강해 22

푸른 섬 2012. 6. 3. 13:29

어머니와 미가    동영상설교는  http://www.woorigarak.org로 오세요.

사사기17장1-6

사사기2장11-13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대 사람도 다 죽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라고 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다른 세대가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출애굽기1장8절을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요셉을 사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알지 못한다는 것이 그 사건들을 알지 못한다는 뜻일까요?

그럴 리는 없지요. 요셉이 애굽에 내려와 행한 일들이야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일이 자신에게 무슨 이익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요셉의 자손들을 어떻게 부려 먹을까, 자신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익이 될까가 중요합니다. 이들이 요셉을 보는 시각은 자신들에게 이용가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로 넘어 오면 놀랍게도 이 사건이 반복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애굽 사람들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의 등장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핍박하는 내용이 시작됩니다.

사사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문제는 가나안 족속을 모두 쫒아 내지 못한 상황에서 여호수아와 그 세대들의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자 여호수아 다음 세대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알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들도 역시 출애굽 사건과 광야 사건을 다 알고 있습니다.

사사 기드온이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삿6장13) 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출애굽과 광야 사건 뿐만 아니라 여리고 사건, 어떻게 가나안 땅을 점령했는지를 다 알 고 있어요.

율법도 알고 있지요. 입다가 자신의 딸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보세요.

삼손은 어떤가요? 그 부모가 나실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요.

문제는 여호와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은 그야 말로 과거일 뿐 지금 자신들에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사들이 활동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말씀을 자신들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해서 적용하고 있습니다.

3장부터 16장까지 사사들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부분적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 깊숙이 들어가서 그들이 어떻게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이해했고 적용했는지가 나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으면 복 받은 자입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미가 라는 사람에 대한 사건입니다.

미가는 에브라임 지파라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를 언급했었지요? 요셉의 둘째 아들 아닙니까?

역대하 5장1절에 보면 장자의 명분이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다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동생인 에브라임 머리위에 오른 손을 올렸지요.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명분이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들 지파가 전쟁에 임하는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뒷짐 지고 있었지요. 그러다 장자의 명분만 내세우다 결국 입다에게 사만 이천 명이 죽었습니다.

이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미가라는 사람입니다.

에브라임의 대표자이고 이스라엘의 대표자입니다.

미가라는 이름의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오 라는 뜻입니다.

이름 참 좋지요. 성경에 보면 이름은 대충 짓지 않습니다.

특히 여기에 미가라는 이름을 기록한 이유가 있겠지요?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오 라고 하는 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사건을 아주 급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1절과 2절 사이에 미가가 그의 어머니 돈 은 천백을 훔쳤다라고 기록해야 하는데 빼 버렸지요.

이유는 저주부터 언급하기 위해서입니다.

미가가 자신이 돈을 가졌다라고 말합니다. 절대 훔쳤다라고 말하지 않지요.

자신은 도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훔친 것이 아니라 저주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미가는 저주를 엄청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말했는지는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저주는 율법에 순종하지 않을 때 저주가 내려집니다. 그러나 미가나 그의 어머니는 율법에 관심이 없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12절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 말씀은 네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생명이 길지 않다는 것이지요. 저주받는다는 말입니다.

잠언 28장24절을 봅시다.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 하고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은 십계명 중 제5계명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신명기27장16절에는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미 부모의 돈에 손을 됐다는 자체가 저주받을 짓이지요.

그러나 미가는 이것을 저주로 생각지 않습니다.

미가는 어머니의 저주를 진짜 저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저주는 저주로 보지 않습니다. 자신과 상관없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어머니의 저주는 현실적입니다. 그래서 미가는 자신이 어머니의 돈을 가졌다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돈이 얼마에요?

많이 본 액수지요? 들릴라가 삼손을 팔 때 받은 돈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의도적이지요.

십년치 월급입니다. 미가집안이 얼마나 부자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들 미가가 은 천백을 쉽게 손댈 정도 같으면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가 엄마가 돈을 사용하는 씀씀이를 보세요.

팍팍 씁니다.

은 천백이라는 숫자를 기록한 이유는 미가와 그의 어머니의 관심은 오직 무엇에 있었다? 네. 돈에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 미가가 가져갔다고 하니 엄마가 곧장 저주를 축복을 바꿉니다.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축복과 저주는 모두 엄마 자신으로부터 나옵니다.

단지 여호와는 자신의 저주와 축복을 실행해 주는 신에 불과합니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축복인데 자신의 아들이니 도둑질해도 축복받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이지요.

율법에는 관심 없습니다. 자기 아들만 잘되면 됩니다. 자기 아들을 위해서라면 저주받을 짓도 축복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저주받는 것이 당연한데 자기 아들이니 율법을 저리 가라는 것입니다.

내 아들만은 무조건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자 그 다음 행동을 봅시다. 3절입니다.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여호와께 거룩히, 즉 구별하여 은을 드린답니다. 그 드린 은으로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은 부어 만들겠답니다. 이 모두 누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위해서.

여호와께 드린 은으로 어떻게 신상을 새기고 만들 수 있느냐고 하시겠지요?

미가의 엄마는 그 은 중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미가 집에 신당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신당은 보통 신당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당입니다.

에봇과 드라빔도 있어요. 뿐만 아니라 제사장도 있습니다. 물론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어요.

여기에서 잠시 왜 은 이백이냐는 것입니다.

레위가5장15-16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죄를 범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네가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도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숫양을 양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하되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신당도 있고 에봇과 드라빔도 있고 제사장도 있는 것을 볼 때 미가가 훔쳐 간 돈은 성물에 해당되는 돈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 이백, 대략 오분의 일이지요. 물론 그 돈이 그 돈이니 은 일천백에서 더하여 은 이백이 아니라 , 은 일천백 안에서 은 이백을 취하여 여호와께 드린 것입니다.

지금 율법이 어떻게 에브라임지파에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아시겠지요.

십계명을 봅시다.

출애굽기20장3절을 봅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미가집안이 지금 다른 신들을 두고 있습니까 두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신들을 두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라고 하셨는데. 지금 누구를 위해 우상을 만들었습니까?

아들을 위하여, 즉 자기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제사법은 어떻습니까?

자기 집에 신당을 만들었어요. 제사장도 자기 아들로 세웠지요.

에봇과 드라빔도 직접 만들었어요.

에봇은 대제장이 입는 옷입니다. 출애굽기28장6절 이하에 나와요.

드라빔'(teraphim)은 가정의 수호신 상으로서 고대로부터 근동 지방의 각 가정에서 숭배되던 우상이었다(창 31:19; 삼상 19:13, 16 ;왕하 23:24; 호 3:4, 5). 에스겔은 바벨론 왕이 점을 칠 때 이 드라빔을 사용했다고 말하고 있으며(겔 21:21), 스가랴는 이 드라빔에서 거짓 예언이 발생한다고 지적합니다(슥 10:2).

에봇, 드라빔, 제사장. 신당뿐만 아니라 직접 만든 신상을 다 갖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가정을 위해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제사장을 세웠습니다.

자기 자신, 즉 가족중심입니다.

율법은 이들에게 어떤 기능을 하고 있습니까?

죄인이다. 저주 받아야 된다는 것을 제대로 지적하는 기능을 하고 있지요.

그러나 미가는 나름대로 여호와만을 열심히 섬기고 있지요.

이것을 6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때에는 이스라엘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율법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자기 생각에 옳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님이 주님이 아닙니다.

모든 축복과 저주가 주님이 지신 십자가에서 나오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비웃습니다.

내 가정이 잘 되는 것이 축복이고 내 자신이 잘되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십자가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직 무엇만 가르칩니까?

성공하는 것, 이 땅에서 잘사는 것을 가르치는데 온 힘을 다 기울입니다.

내 자식이 성공하는 것이 축복이요, 내 자신이 실패하는 것이 저주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자식에게 십자가는 걸림돌이 되니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신 영어공부해라, 수학공부해라, 중국어 공부해라, 성경 읽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무엇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고 하면 왜 부모들은 자식들이 성경말씀을 깊이 알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까라고 말입니다.

학교 빠지면 죽는 줄 알고, 학원 빠지면 죽는 줄 알지요. 그러나 ·말씀 듣는 것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에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시간 날 때, 나름대로 한가할 때 하는 것이라고 무언적으로 계속 가르치지요.

미가 집안을 한번 보세요. 이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아들, 자기 집안입니다.

내만 잘살면 되고, 내 아들만 잘 살면 된다는 것이 축복이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주님이 아닙니다. 왕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온갖 귀한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2년 치 월급도 아깝지 않습니다.

자기 집안을 위해서라면 제사장도 세우고 신당도 세우고 에봇도 만들고, 드라빔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십자가 지신 주님을 위해서는 어떻습니까?

사실 우리들이 미가와 그 어머니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았던 자들이 아닙니까?

말씀을 보니 딱 내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자기아들, 자기 가정밖에 모르는 자들입니다. 자기 아들, 자기 가정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아끼지 않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돈이 밑받침 해 주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준 자들의 모습이 이런 삶을 살던 자였습니다.

고린도 후서5장15절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위하여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15장2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만 전하니 사람들이 미워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라고 전하니 사람들이 핍박을 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아닌 자들의 관심은 자기 자식, 자기 가정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주님인 자들은 십자가의 피를 자식에게 담대히 전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십자가의 피가 자기 자식들을 위한 피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 가정을 위한 피가 되어 버렸습니다. 돈을 위한 십자가가 되어 버렸지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십자가지요.

이들이 원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자기에게 이롭지 않은 것은 저주요. 자기에게 이로운 것은 모두가 다 축복입니다.

그래서 축복과 저주를 십자가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으로 말합니다.

나를 건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요. 나를 잘 대해 주는 자는 축복을 받을 지어다.

누구든 내 자식 건드리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분은 이들의 똘마니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위해 사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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