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룻기강해 5

푸른 섬 2012. 8. 20. 12:02

룻기강해 5 2장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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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무를 자를 전하는 인생




음성설교

룻기2장14-3장5

식사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뿐만 아니라 보아스는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룻이 곡식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룻을 위해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고 명합니다.

그래서 룻이 저녁까지 주웠는데 그 주운 것을 보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었습니다. 한 에바는 22리터입니다. 12대정도 되는 분량입니다. 상당히 많은 양입니다.

22킬로그램이면 양이 상당하지요.

이것을 가지고 시어머니에게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배불리 먹고 남은 것도 갖고 갔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룻에게 묻습니다.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러자 룻이 대답합니다.

보아스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그러자 룻이 말합니다.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그러자 나오미가 자부 룻에게 말합니다.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23절입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

이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특징은 룻이 보아스와 나오미 사이에 끼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아스는 이미 자신이 기업무를 자가 되겠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오미도 보아스가 룻에게 한 행위를 근거하여 볼 때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업 무를 자란 뜻은 룻기4장5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기업 무를 자는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기업을 죽은 자의 이름으로 이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이름으로 기업이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남 좋은 일 하는 자를 ‘기업 무를 자’라고 합니다.

벌써부터 보아스는 자신을 희생하고 있습니다.

보아스의 행동 하나 하나를 보시면 그는 이미 자신이 기업 무를 자 중 한 사람임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보아스는 왜 미리 자신이 앞장서서 룻에게 다가가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3,4장을 보면 보아스의 행동이 충분히 그러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건은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룻이 생존을 위해 이삭을 주우러 간 후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연히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룻이 말했습니다.

나오미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업 무를 자가 누구인지를.

그래서 나오미는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 중 하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오미는 곧장 보아스를 찾아 나서지 않았을까요?

기업 무를 자가 되는 것은 말씀이 성취되는 사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취하십니다.

인간들이 나서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 무를 자의 등장, 즉 보아스의 등장이 우연히 된 것은 이방여인 모압사람 룻이 약속의 땅으로 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엘리멜렉 가문이 베들레헴을 떠날 때 모압 여인과 나오미만 돌아올 것이라고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압여인이 나오미의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을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우상들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그가 지금 여호와하나님, 즉 징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징벌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과부된 자로 이삭 줍는 자로 나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방여인 모압에게 적용되어 이루어질지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여기에 이 여인이 보아스를 만나게 될 것은 어느 누구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나오미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지요.

그랬다면 당연히 나오미가 룻에게 말했겠지요. 며느리야 ,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이 여기 어디 있는데 잘 찾아 거기 가 보아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보아스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인 줄은 알지만 그가 과연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지요.

또한 보아스는 어떻습니까?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룻의 신앙도, 그의 삶의 태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순서가 있습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보아스는 먼저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룻이 이삭을 주울 때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와서 베는 자들에게 축복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룻을 만나게 되었지요.

그리고 보아스가 룻에게 보리를 한 에바나 주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보아스가 기대하지 않았는데 룻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여기에 나오미도 기업 무를 자에 대한 소망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자신의 기대입니다. 기업 무를 자가 기업을 무르줄 때에 그 은혜가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무엇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룻에게 한 행동과 말을 들었을 때 나오미는 보아스에게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며느리 룻에게 주의를 단단히 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3장1-5절을 보면 나오미가 의도적으로 보아스를 기업 무를 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을 분수 있습니다.

말이야 좋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룻은 그냥 시어머니 말씀대로 할 뿐입니다.

참 독특하지요. 자신이 희생해야 할 자리는 군말하지 않고 갑니다.

이삭 줍는 것은 스스로 알아서 합니다. 그러나 기업 무를 자, 즉 말씀과 관련해서는 순종만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저들과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는 룻은 시어머니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있지요. 독특한 상황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보아스의 말도 그렇게 받고 있고요.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약속의 땅 사람, 보아스와 나오미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자신이 모압땅에 살았던 삶은 없습니다.

여기에서 룻기가 왜 보아스가 주인공이 아니라 룻이 주인공이 되는지를 짐작할 수 있지요. 사실 룻기를 보는 보아스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 아닙니까?

보아스가 없었다면 룻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가 볼 때 룻의 신앙이 대단해 보입니까 아니면 보아스의 신앙이 더 커 보입니까?

모압땅에서 떠날 때에야 룻의 신앙이 대단해 보이지요. 그런데 베들레헴에 왔을 때에는 보아스의 신앙이 더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시대에 보아스와 같은 신앙인,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왜 룻기는 룻기라고 이름을 지었을까요?

보아스라고 하지 않고, 사실 기업무른자도 보아스이지 않습니까?

룻기의 주제가 기업 무를 자인데. 기업 무를 자가 중요하지, 그 은혜를 입는 대상 룻이 중요할까요?

중요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성경은 성경을 읽는 대상이 죄인임을 선언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방여인 모압과 같은 자들이다. 그런데 엘리멜렉이 범죄하여 이방여인 모압이 약속에 땅에 들어와서 은혜를 입게 된 것처럼, 너희들의 구원이 그러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룻기를 읽으면서 보아스를 생각할 것입니다.

보아스처럼 믿음 좋은 사람이 있었는데 왜 사사기에서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룻기에서는 보아스를 중심에 놓지 않고 룻을 중심에 놓느냐고 말입니다.

룻기를 보면서 뭔가 본받아야 하는데 룻보다는 오히려 보아스를 본받을 것이 더 많지 않습니까?

그는 본래 이스라엘 백성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룻과 비교하여 볼 때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룻기는 룻을 주인공으로 기록하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든 누구든 다 죄인으로 간주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아스도 마찬가지이지요. 보아스도 자신이 모압여인과 같지 않다고 한다면 절대 기업 무를 자로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모압여인과 다를 바 없는 은혜 받은 인생, 은혜로 살아야 할 인생임을 알기에 기업 무를 자로 나선 것입니다.

물론 자신도 이렇게 나서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신앙은 룻기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만일 자신이 룻이라면 약속에 땅에 들어 왔다면 기업 무를 자를 찾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도행전16장을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힌 이유는 귀신을 쫓아냈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니 주인들이 화가 나서 바울과 실라를 잡아 거리로 관원들에게 끌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주인들이 로마사람임을 알 수 있지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신분임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죄수들도 들었습니다.

문제는 그때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이후 간수가 잠에서 깨었습니다.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했습니다.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5절을 보면 바울과 실라 외에도 다른 죄수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 났을 때 26절을 보면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라고 하지요.

그러니 다른 죄수들의 매인 것도 다 풀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죄수도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 바울과 실라를 위해 존재하는 죄수들이지요. 이들은 옥문이 열리고 자신들이 매인 것이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아니 도망 칠 수가 없었지요.

바울과 실라를 위해 , 중요한 것은 간수와 그 가족을 위해 말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내용은 없어요. 단지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은 들었지요.

그런데 이들에겐 구원이 없었어요.

그러나 놀랍게도 간수와 그 집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30-31절을 봅시다.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4절에 보면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다라고 하지요.

여기에서 하나님은 곧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어려워요.

이미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요.

이것과 오늘 본문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말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누구에게 베풀어집니까?

귀신이 쫓겨난 여인입니까? 아니면 이 여인의 주인들입니까? 아니면 바울을 잡은 관리들입니까?

아니면 감옥에 갇힌 다른 죄수들입니까?

희한하게도 이들의 활동으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고, 이것으로 인해 간수와 그 온 집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 아닙니까?

우리들은 이렇게 기대할 것입니다.

그래 귀신들렸었던 그 여인이 구원을 얻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여인을 돈벌이로 사용하던 주인들이 그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을 것이다. 이런 기대를 하시겠지요.

아니면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미를 들은 죄수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혀 우리의 기대와 상관없는 자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렇게 구원을 베푸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주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전해 보세요. 우리 기대대로 되지 않습니다. 나의 예측과는 전혀 달라요. 주님은 이런 식을 일을 하십니다.

우리의 행위들을 하게 하시면서, 행위들을 부정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바울이 너무 괴로워서 귀신을 쫓아 내었어요.

귀신이 뭐라고 합니까?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을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놀랍지 않습니까?

귀신이 바울일행을 소개시켜줍니다. 그러나 이런 소리는 정말 미친 소리에 지나지 않죠.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여러 날을 그렇게 하니 바울이 심히 괴로워 귀신을 쫓아냅니다. 참 희한하지요.

여인을 불쌍히 여겨 귀신을 쫒아내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일로 감옥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감옥에 들어감으로 간수와 그 온 집안에 구원을 얻었습니다.

바울일행히 기대할 수 없었던 구원이지요.

이것은 단지 간수와 그 가족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에서 처음 구원 얻은 루디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루디아는 바울이 기대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요.

행16장14절을 보면 주께서 그 마음을 열었다고 하시지요.

바울이 예수님을 믿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증인이었습니다.

짜증나서 귀신을 쫓아냈는데 주님께서는 그 상황을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과정 속에 집어 넣어신 것입니다.

바울이 왜 복 받은 자인가?

보아스처럼, 나오미처럼, 룻처럼 기업 무를 자, 즉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하시는 자를 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기에 복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시면 됩니다. 뭐 특별한 것 없습니다. 말씀이 생각나시면 나시는 대로, 기도하고 싶으면 기도하시고, 찬송하고 싶으면 찬송하시고, 돈 벌고 싶으면 돈 버시고, 짜증내고 싶으면 짜증내시고, 나름대로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이런 인생가운데 기업 무를 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사용하셔서 기업 무를 자인,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자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자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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