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숙한 여자
음성설교
룻기3장6-18
잠언서31장10-31절을 먼저 살펴 보겠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상고의 배와 같아서 먼데서 양식을 가져 오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밭을 간품하여 사며 그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심으며 힘으로 허리를 묶으며 그 팔을 강하게 하며 자기의 무역하는 것이 이로운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손으로 손 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 그는 간곤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그 집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집 사람을 위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방석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 그 남편은 그 땅의 장로로 더불어 성문에 앉으며 사람의 아는 바가 되며 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파며 띠를 만들어 상고에게 맡기며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약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그 자식들을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 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말씀을 읽어 보면 남편들을 좋아라 할 것이고, 아내들은 이것은 무슨 아내가 종도 아니고 뭐하는 짓이냐 할 것입니다.
내용을 보면 아내는 뼈 빠지게 일하지요. 뿐만 아니라 입을 열어 지혜도 베풀며 그 혀로 인해의 법을 말한답니다. 그래서 자식들로부터 감사의 말을 듣고 남편으로부터는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나다고 칭찬을 듣습니다.
여기에 한 말씀 더 하시지요. 뼈 빠지게 일해도 곱고, 아름답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고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 아닙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야 싫어하지 않지만 꼭 그 앞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는 말씀을 집어넣어야 하겠습니까?
그래 여호와를 경외하면, 곱고 아름답게 늙을 것이다. 뼈 빠지게 고생하지 않아야 하고, 돈은 그냥 굴러 들어오고.
이것이 여자들이 꿈꾸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현숙한 여인이라고 말씀해 놓고 하시는 말씀을 보면 도무지 여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불합리한 말씀입니다.
물론 잠언서가 쓰일 당시에는 이런 여인이 현숙한 여인이라 여겨졌을 수도 있지요.
우리 과거의 어머니들이 이렇게 살았지 않습니다. 물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상관이 없지만 말입니다.
현숙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일이라는 단어입니다. 이전에 보아스를 유력한 자라고 할때 유력이라는 단어가 하일이라는 단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잠언서31장10절에 나오는 현숙이라는 말이 하일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29절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과 비교하는 덕행이라는 단어도 같은 단어 하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사용하는 단어를 갖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잠언서31장10절 이하를 읽어 보면 현숙한 여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교회 다니는 남자들은 현숙한 여인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눈에 불을 키고 찾지요.
그런데 여자들은 이런 현숙한 여자가 되기를 애쓰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운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고 하면서 뼈 빠지게 일해 남편이 장로들과 함께 하는 자리, 즉 재판장의 자리, 존경받는 자리에 앉게 만듭니다.
아내는 남 좋은 일 시키다가 인생 끝납니다. 뼈 빠지게 일하면 고운 손을,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30절31절에서 칭찬 받는다고 나오지요.
여러분 , 요즘 칭찬 받는 것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칭찬 필요 없어요. 돈만 많고, 아름다우면 최고에요.
현숙한 여인을 찾는 인간이나 현숙한 여인이 싫다고 하는 인간이나 현숙한 여인이 되고 싶다고 하는 인간들은 잠언서를 엉터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백지상태가 아닙니다. 첫째 아담 안에 살기 때문에 죄속에서 성경말씀을 봅니다. 현숙한 여인에 대한 말씀을 보면서 자신이 갖고 싶고 소유하고 싶은 말씀으로 이해를 합니다.
자 이제 다시 룻기로 돌아가 봅시다.
보아스는 룻을 현숙한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역시 하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요.
왜 이렇게 부릅니다.
10을 봅시다.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여기에 인애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헤세드라는 말입니다. 은혜라는 말로도 해석이 됩니다. 이것은 잠언서31장에서도 역시 나오는 단어입니다.
자 그렇다면 보아스의 말을 통해 현숙한 여자의 이유를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보아스의 말을 보면 그 당시 룻은 젊은 나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젊은 여자들은 과부가 되면 얼마든지 젊은 남자를 만나 결혼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지요.
당시 젊은 과부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대세였음도 알 수 있고요.
오늘날이야 돈 많은 홀아비를 결혼하려는 젊은 여자들도 있지만, 룻은 그런 차원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들어간 것은 개인적인 욕망을 따라한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말했지요.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처음 베푼 인애가 무엇이었습니까?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고 시어머니를 따라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에 와서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를 모신 것이지요. 보아스가 이것을 처음 베푼 인애, 헤세드라고 합니다. 나중 헤세드는 무엇입니까?
지금 보아스를 만난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로 보아스를 만난 것이지요.
룻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업 무를 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순종했고, 보아스의 말에도 순종합니다.
이것이 두번째 베푼 인애, 은혜 , 즉 헤세드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행위를 무엇으로 봅니까? 은혜 베푸는 것으로 봅시다. 누구에게. 나오미에게.
이것을 확대해석하면 룻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룻이 베푸는 은혜가 무엇을 따라 베풀어 졌느냐는 것입니다.
모압 땅에서 떠나 올 때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징벌하시는 하나님, 풍족하게 갔지만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시아버지와 자신의 남편을 죽이시는 하나님을 믿었지요. 이 믿음으로 시어머니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룻은 말씀이 적용되는 이삭 줍는 현장으로 생존을 위해서 나갔지요.
룻은 말씀을 따라 나오미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개인을 위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도구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로 베푼 은혜이지요.
창세기38장을 보면 유다이야기가 나오지요.
그곳에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나옵니다. 다말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이방여인이지요.
유다의 며느리가 되었는데, 남편이 죽고 두 번째 남편도 죽었어요. 엘. 오난입니다. 이들은 모두 유다의 자식들이지요. 이번에는 세 번째 아들인 셀라를 다말에게 주어야 하는데 말로 약속은 했어요. 지킬 마음은 전혀 없었지요.
그래서 다말이 기생으로 변장해서 유다의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이 말씀이 룻기 4장 1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다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 없는 유다로 인해 기생으로 변장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보아스는 유다의 며느리 가나안 여인 다말을 알고 있어요.
룻기4장11절에 보면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도 유다의 며느리 다말을 알고 있지요.
보아스는 룻을 유다의 며느리 다말처럼 보고 있어요.
이런 여인을 두고 보아스는 현숙한 여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잠언서 31장의 말씀을 유다의 며느리 다말과 룻을 근거로 해서 보셔야 하겠지요.
현숙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는 이방인이 은혜 속으로 끌려 들어옵니다. 그래서 자신이 희생되어 언약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현숙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누가 누구에게 현숙한 여인이라고 했습니까?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가 현숙한 여자라고 칭했지요. 문제는 룻이 자신이 현숙한 여자가 되기를 노력했습니까 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닥친 대로 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룻을 이끌고 계셨지요.
룻을 이끄는 말씀이 룻을 현숙한 여인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룻을 현숙한 여인으로 만드셨습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누가 만드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셨지요. 문제는 지금 이스라엘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이방여인 룻을 현숙한 여인으로 만드셨습니다.
현숙한 여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십니다.
이방여인 룻이 현숙한 여인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현숙한 여인은 좋은 아내를 만나라는 의미입니까?
고린도 후서11장2절을 봅시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이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신부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신부는 현숙한 여인일까요 아닐까요?
사람들은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십자가의 피로 만든 신부는 어떻습니까?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완벽해요.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는 자가 현숙한 여인입니다.
우리들은 룻기나 잠언서를 보면서 나도 현숙한 여인이 되어야 되겠다고 결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주님이 되셔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자기 백성들을 이미 현숙한 여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현숙한 여인은 십자가 복음, 때문에 죽음의 자리로 내몰립니다. 특히 현숙한 여인이 되겠다고 하는 자들로부터 미움 받고 죽임을 당하지요.
마태복음 7장22-23절을 봅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심판 날에 많은 사람들이 당당합니다. 자신은 주의 이름으로 복음 전했고, 귀신도 쫓아냈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모른다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25장31절 이하를 보면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염소편 즉 지옥 가는 자들이 하는 말을 잘 보세요.
44절 이하입니다.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잘 모르겠습니까? 그러면 양편에 쓴 자들은 뭐라고 답합니까? 37-29절을 보면 자신들은 주님을 대접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상반된 대답을 하지요.
그러니 지옥 가는 자들은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다는 말입니다.
현숙한 여인이 스스로 만든다면 반드시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내가 노력해서, 기도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현숙한 여인이 되었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딱 지옥 가는 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현숙한 여인은 만들어 졌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현숙한 여인은 자신이 한 것이 없다고 해요.
오히려 이렇게 말하지요.
갈라디아서 6장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자신은 죄인이라는 말이지요.
모든 것이 십자가 피 능력으로 산다는 말 아닙니까?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사신다는 것이지요. 자신은 부정되면서.
룻을 현숙한 여인으로 말씀하심으로 이스라엘은 죄인이며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의 피가 흘러넘침을 말씀하십니다. 현숙한 여인은 기업 무를 자로 인해 살아갑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분이 기업 무를 자되십니다.
현숙한 여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주님이심만을 전합니다. 뼈 빠지게 고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