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룻기강해 7 4장13-22

푸른 섬 2012. 9. 10. 00:04

룻기강해 8 4장13-22

오벳



음성

룻기4장1-22

룻은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가 읽은 본문은 룻기 결론부분입니다. 그런데 룻기라고 하면 룻이 주인공으로서 행복하게 살았다로 결론이 나야 하지 않을까요?

 

백설공주나 신데렐라나 그런 동화들이 다 그런 류가 아닙니까?

사람들이 룻기를 읽으면서 룻이 백설 공주처럼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모압여인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고, 시어머니께 효성도 다하니 결국은 보아스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룻기전체를 두고 설교한다면 룻처럼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자신의 신분이 어떠하든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으면 주께서 보아스와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물론 이혼한 과부가 들으면 더 기분이이 좋겠지요. 꼭 이혼한 과부가 아니라도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있다면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했던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착하게 살면 보아스와 같은 왕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이유가 다 이런 이유입니다.

 

지금 나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면, 성실히 한다면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다.

룻을 보라. 그녀는 이방여인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으니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사용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한다는 것은 자신이 이 땅에서 크게 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요.

 

돈 많은 사람은 그렇지 않을까요? 똑 같습니다. 전도서 1장8절을 보면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어느 누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벗어 날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교회를 와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외쳐도 이들이 원하는 예수는 육신의 정욕을 위한, 안목의 정욕을 위한, 이생의 자랑을 위한 예수입니다.

 

요한1서2장15절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 세상에 있는 것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우리 사람의 눈에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닌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지요. 자식, 남편, 돈, 회사, 집, 교회, 집사, 장로, 목사 등등. 이 모두가 세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요한일서2장15절에서는 이런 사람에서는 아버지의 사랑, 즉 십자가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고 선언해 버립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오늘날 목사들은 어떻게 설교를 합니까?

사람을 위해 설교를 하지요. 노골적으로 세상 것을 사랑하라고 설교를 합니다.

교회를 위해 설교를 합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즉 십자가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사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음을 날마다 증거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그들이 변명을 하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말씀을 지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말씀을 지키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주지요.

 

오늘날 교회 다닌다고 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을 세 부류 정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말씀을 지켜서 복 받겠다는 사람이지요. 물론 그 지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지킵니다.

 

주일 예배 빠지지 않기, 새벽기도 빠지지 않기, 수요예배 빠지지 않기, 십일조 떼어먹지 않기, 감사헌금하기, 선교헌금하기 등등.

 

이런 것들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 기대합니다.

 

또 한 부류는 좀 다른 부류지요. 이들은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합니다.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자신들의 수준은 좀 높다고 생각하지요.

 

 

또 한 부류는 그냥 교회 다니기입니다.

예배 드려주기입니다.

그래도 천국은 가야 하니까? 혹 내가 잘못될 수도 있으니 예배 드려주는 것이지요.

 

이들은 모두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두 번째는 부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내가 어떻게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의 능력을 자신의 몸으로 만들어 내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하는 자들입니다.

입술로는 주님의 능력이라고 하지만 결국 이들의 자랑은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들의 행함입니다.

 

자신들의 행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기복신앙, 즉 무조건 복 받겠다고 하는 자들보다 다 무서운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들 모두를 합쳐 놓은 자들이지요.

 

그러니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다니는 모습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당신 유대인들이 다 행했던 행함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룻기를 결론 내면서 왜 룻은 아기 낳는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오벳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까?

 

룻이 낳은 아이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오벳입니다.

오벳의 뜻은 섬기는 자, 종이라는 뜻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이름을 지었습니까?

 

나오미를 위한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15절을 보면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 네 노년의 봉양자로써 오벳이 되는 것입니다.

 

이름을 정말 희한하게 지었지요.

좋은 이름 그렇게 많은데 왜 종이라는 이름, 섬기는 자라는 이름으로 지었을까요?

제가 대학다닐때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친구가 아들을 낳았어요. 그 아들 이름이 하민이입니다.

 

그런데 제가 부를 때 하종이라고 불렀어요.

친구가 별로 안 좋아하지요.

그런데 이름이 오벳입니다.

 

오벳은 누구를 위한 오벳입니다.

자기를 위한 오벳이 아닙니다. 나오미를 위한 오벳입니다.

룻의 인생이 그렇지요. 룻이 어떻게 살았다는 것은 나오지 않습니까?

단지 아기 낳고 그 아기는 나오미를 위한 아들로 살아가게 됨을 말씀할 뿐이지요.

인간들은 꼭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속이 후련합니다.

 

교회를 다녀도, 학교를 다녀도, 일을 해도, 모든 일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기분이 좋지요.

 

왕따라는 말이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다 따돌려도 혼자 놀면 되잖아요. 물론 때리고 괴롭히면 문제가 있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혼자 놀면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꼭 소속되고 싶어 하거든요. 그런데 소속된 것으로 만족할 인간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 주님의 피로 구원해 주셔서 성령의 은사들을 각 사람들에게 내려 주셨어요.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로 감사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은사를 갖고 자신이 교회의 중심에 서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으로 살아가는 인생,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인생. 그 인생은 다름 아닌 룻이었습니다.

 

룻을 보면 그야 말로 섬기는 인생이었지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 자리에서는 빠져 버립니다. 시키는 대로 살다가 사라져요.

오벳이라는 인물이 왜 중요합니까?

오벳의 손자가 다윗이 되잖아요.

 

다윗 왕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섬기는 자로, 종으로 살아야 참된 왕임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곧 예수그리스도, 종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종으로 오셨습니다. 섬기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룻은 오벳을 낳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실 분, 우리를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룻은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도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성도가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면 그 인생은 보여주는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무엇을 보여줄까요?

 

십자가를 보여주는 인생, 십자가를 전하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들은 이 땅의 것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하지요.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늘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임을 자각하며 살아갑니다.

룻이나 오벳이나 나오미, 이들 모두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다는 말은 믿음을 보여주기 위한 삶을 주님께서 살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모압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그곳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게 하다가 말론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베들레헴으로 오게 되었고,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오벳을 낳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풍족하게 베들레헴에서 살았지만 탐욕을 따라 모압땅으로 내려갔지요. 그곳에서 심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약속의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목격하게 됩니다. 룻을 통해, 보아스를 통해. 오벳을 통해.

 

이들의 삶은 십자가지신 예수님, 즉 종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시는, 생명을 살리시는, 영원히 죽지 않게 하신 주님을 전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요한일서2장17절을 봅시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붙들고 싶고 잡고 싶은 것은 다 지나갑니다.

꺼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날마다 새롭게 올라오는, 마치 창조주처럼 행세하는 정욕도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요한복음을 보면 분명히 나와 있지요.

주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을 전하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면 사랑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사랑을 모르는데 무슨 사랑이 나오겠습니까?

 

자신이 복 받을 수 있는 자요,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자라고 한다면 어떻게 사랑이 나오겠습니까? 자기 복 받는 것이 중요하고, 말씀을 지키는 자신이 소중한데 형제 사랑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성도란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오직 예수님의 증인으로만 살다가 인생이 끝나게 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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