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룻기강해 7

푸른 섬 2012. 9. 2. 21:46

룻기강해 7 4장1-12

나오미와 룻



음성설교

룻기4장1-12

보아스가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를 찾았습니다.

처음에는 기업 무를 자가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5절에서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엘리멜렉의 땅을 돈 주고 사는 것은 좋습니다. 문제는 그 기업이 자신의 기업이 되지 않고 엘리멜렉 가문의 기업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무르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보아스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고 하면서 신을 벗었습니다. 신명기25장5-10절을 보면 계대결혼법이 나옵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거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 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긴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레위기25장22-28절도 보겠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모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보아스가 첫 번째 기업 무를 책임이 있는 사람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있지요.

이 사람은 단지 레위기25장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25장은 신명기 25장과 연결해서 보아야 함을 보아스가 알려 주지요.

그러니 희년이 되기까지 자기 소유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이익이 되니 좋은데, 문제는 그 소유가 룻이 낳는 아들 소유로 가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손해 보는 장사지요.

그래서 이 사람은 기업 무를 자 됨을 포기합니다. 물론 수치심을 무릅쓰고.

그 집안이 신 벗긴 자의 집이라 명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세요.

그러나 이 사람에게는 이러한 수치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익이지요.

보아스는 어떻습니까? 엘리멜렉과 기룐, 말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누구편을 들겠습니까?

보아스 편에 서겠습니까 아니면 기업 무를 자를 거부한 사람 편에 서겠습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은 보아스 편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성경을 보는 관점은 교훈적인 관점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갈까에 관심이 있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로마서1장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성도가 의인이라면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지요. 그런데 이 본문조차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해석을 믿음으로 믿음의 행위에 이른다고 해석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믿음 있는 행위를 주장합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이 있어도 행위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믿음 없다가 되지요. 마치 야고보서 처럼 말입니다.

야고보서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야고보서를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육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유대인들이 구약을 해석하는 방식과 똑같이 해석을 합니다.

자 . 문제는 십자가의 피능력 만을 믿으면 구원이 되지 않습니까?

이 말도 다시 풀어야 합니다. 피 능력을 믿는 믿음은 주님이 성령을 통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구원이 부족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지요.

분명히 의인도 살아갑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행위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행위들이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의 결과물이라는 말입니까? 믿음의 결과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절대로 자신들이 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살려 주시는 분만 내어 놓습니다.

예수님만 전하는데 그 예수님을 그냥 예수님이라 하지않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전하지요.

이렇게 되면 자신은 부인되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전파됩니다.

요한복음10장에 보면 삯군과 선한 목자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기업 무를 분은 자기 목숨을 양을 위해 버리는 분입니다.

룻기를 통해 보면 기업 무를 분은 누구를 위해 기업을 무릅니까?

요한복음에서는 이미 자기 양이 정해져 있습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이지요.

그런데 그 양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입니까?

빈손입니다. 기업 무를 자가 없으면 거지처럼 살아야 하고, 굶어 죽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요한복음10장은 요한복음9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9장에 무슨 사건이 나옵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9장39-4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예수님의 양들은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자, 지옥가야 마땅할 자,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받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양 아닌 자들은 어떨까요? 똑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양들은 예수님이 양들을 찾아 주니, 불러 주니 자신이 어떤 자임일 고백합니까?

나는 지옥가야 마땅한 자입니다. 저는 보지 못하는 맹인입니다라고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음성을 모르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나는 문제없어.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야. 나는 맹인과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이야. 저 인간은 저주 받아 태어났지만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축복받은 인간이야.

이들에겐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겐 예수님의 피가 필요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소경인자, 저주받은 자를 위해 피 흘려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자의 영도 받게 하시고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습니다(갈5:21).

따라서 아들의 영을 받은 자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만 자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삯군은 어떨까요?

자신에게 손해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20장33절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고"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사나운 이리, 즉 삯군목자의 등장과 비교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목자는 절대로 양떼를 아끼지 않습니다. 양떼를 이용할 뿐이지요.

이렇게 말하면 우리야 그런 것 쯤 다 분별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나운 이리가 양의 탈을 썼다는 것입니다.

양의 탈을 얼굴만 쓸까요? 아닙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가 다 하나님 말씀에 합한 말씀들입니다.

요한복음10장에서 삯군들은 곧 유대인들이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말씀을 말했지 자기만을 했습니까?

양의 탈을 쓴 이리는 철저하게 성경말씀을 근거로 해서 말합니다.

예를 들면 기도하세요. 전도하세요. 십일조 하세요. 감사헌금하세요. 봉사하세요 하지요.

이 말이 뭐가 나쁩니까 나쁘지 않죠. 성도라면 헌금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기도하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봉사하는 것도, 감사하는 것도.

문제는 무엇을 위해 이것들을 하라고 합니까?

주님을 위해. 말은 그렇게 하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할까요? 자기 배를 위합니다.

목사 자신을 위해 기도, 전도, 봉사, 헌금을 하라고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가르치지요.

그렇다면 성도들은 양의 탈을 쓴 이리의 말을 잘 들을까요 안 들을까요? 물론 그 목사가 이리라고 삯군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교인들도 무엇을 원합니까? 성공을 원하지요. 땅의 축복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신께 빌어야 하겠지요.

내 행위를 잘 해야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 말을 잘 듣지요.

주님께서 시켜서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시켜서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노리는 바, 즉 축복을 노리고 행위를 하는 것이지요.

죽이 딱딱 맞아 떨어집니다. 그러니 목사는 설교를 어떻게 합니까? 말씀을 지키고 행하면 축복해 주십니다.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받는 쪽으로 몰아가지요.

십자가로 죄 용서 받은 것은 기본일 뿐이고, 천국이야 이미 확보해 두었고, 이제는 이 땅에서 축복받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의 마음이 룻과 같겠습니까?

이런 사람의 마음이 소경과 같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마음이지 지금은 시간이 지났지 않으냐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 잘했지요. 지금은 내 마음이 전혀 소경같지 않고, 룻과 같지 않다는 말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감사하지 않다는 말이잫아요.

자기 이익만 챙기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게 오늘 나오는 기업 무를 자를 포기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들에겐 오직 한 가지 목표밖에 없습니다. 내가 성공하는 것.

그러나 예수님의 양인 자들도 오직 한 가지 목표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성도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성공해서 주님을 더 잘 전할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겠지요.

사도들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고.

그러나 성경은 그와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길로 가시고 십지가 지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빈털터리였는데 이미 풍족하게 다 받았습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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