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룻기강해 4 룻기2장1-13

푸른 섬 2012. 8. 12. 14:32

룻기강해 4 2장1-13

룻의 믿음





음성설교


룻기2장1-13

1절을 읽어 보면 앞으로 사건이 보아스 중심으로 흘러갈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친족중 유력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유력한 사람의 뜻이 무엇입니까? 힘 있는 사람, 아니면 부유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입니까?아니면 유력한 재산가라는 뜻입니까?

성경 번역을 보면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왜 이렇게 해 놓았는고 하면 유력에 사용된 두 단어의 뜻이 이런 의미로 사용되어지기 때문이지요.

r/BGI깁보르라는 단어는 강력한 사람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물론 용감한 의미도 있습니다.

lyIj' 하일 이라는 단어는 부, 힘, 능력, 군대, 덕, 현숙한 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집니다.

그래서 깁보르 하일을 번역할 때 유력으로 번역하든지 아니면 재력가, 혹은 부유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으로 번역을 합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2장 이하에 나오는 보아스를 보니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신앙적인 덕을 가진 재력가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이렇게 번역하든 저렇게 번역하든 보아스를 깁보르 하일이라는 사람으로 규정했을 때에는 룻기에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 가를 통해 깁보르 하일이라는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이 상상하는 깁보르 하일이 만들어지겠지요.

보아스라는 이름 앞에 엘리멜렉의 친족중 유력한 자라는 수식어를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보아스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짐작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자는 굉장한 기대감을 갖게 되지요.

풍족하게 나갔지만 빈 털털이로 돌아온 나오미, 이름을 마라로 고친 나오미, 그리고 그 시어머니를 따라온 룻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잔뜩 기대하게 하지요.

읽는 사람이야 이런 기대로 보겠지요.

그러나 당사자는 어떨까요?

2절을 보면 현실은 지금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밭이 되었든지 곡식 베는 밭으로 가서 이삭을 주어야 생존이 되는 현실입니다.

룻이 내게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 이삭을 줍겠다고 합니다.

만일 어느 누구도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삭을 주울 수 없고, 생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레위기19장9-10절을 봅시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사사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누가 레위기19장9,10절 말씀을 순종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보아스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곡식을 벨 때 다 거두지 않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는 습관 즉 가난한 자들이 추수를 한 논이나 밭에 나가 떨어진 이삭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든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특별한 상황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의 습관을 그대로 율법으로 끌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사건들이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삶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동일한 삶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 나오미와 룻은 이제 팔자가 펼 것이라는 상상은 자기 생각이지요

각각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에 보아스는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분명 사사기 결론에서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라고 결론 내렸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보아스라는 인물은 어떻게 만들어 졌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셨지요.

목사들은 사사기 결론 같은 본문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과장되었다. 왜냐하면 드보라도 있고, 입다도 있고, 기드온도 있고, 보아스같은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가? 그것은 대부분이 그렇게 하니 그렇게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되면 신약성경이 잘못되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온 세상이 심판아래 있다는 로마서3장19절 말씀도 또 다시 해석해야 하겠지요.

온 세상이 심판아래 있다는 말씀은 온 세상은 맞는데 그 중에 몇 사람은 아니더라고 해석해야 하겠지요.

뿐만 아니라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다는 말씀도 또 다시 해석해야하고.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겐 필요 없는 십자가를 지신 것이 되겠지요.

보아스를 볼 때 모든 인간들이 죄아래 가두어져 있는 입장에서 보아스를 보아야 합니다.

그가 어떻게 율법에 순종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보아스를 사용하셔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보면 우연히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룻이 알고 간 것도 아니지요. 모르고 이삭을 줍는데 그 땅에 보아스의 땅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을 이런 식으로 하십니다.

룻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어요. 단지 생존에 필요한 양식구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보아스와 만나게 하셨습니다.

4장1절에 마침이라는 단어가 있지요.

보라라는 단어인데, 보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으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말하는 중임을 강조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보기 좋지요. 그러나 우리들이 나오미가 받은 복을 안다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식의 복을 상상하면 곤란합니다.

그리고는 룻이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그러자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조장쯤 되겠지요.

룻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6절 하반 절에서 7절입니다.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이 구절을 보면 3절 말씀이 분명해 지지요.

룻은 처음부터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줍기를 한 것이지요. 룻은 보아스의 땅이었는지 몰랐지요. 그래서 우연히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룻이 아침부터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해서 하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 다른 이삭 주우러 온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지요.

그러자 보아스가 룻에게 이삭을 여기에서만 주우라고 합니다. 물도 이미 길러 놓은 물을 마시라고 합니다.

보아스가 룻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룻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10절입니다.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에 대해 어떤 취급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룻의 태도를 보세요. 자신은 이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방여인이기 때문이랍니다.

룻의 이런 태도와 말을 통해 룻은 자신이 보아스를 통해 받은 은혜가 엄청나게 큰 것임을 인정합니다.

이에 대해 보아스가 뭐라고 합니까?

11-12절을 봅시다.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히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는 룻의 행동을 누구와 비교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행동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12장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룻의 행동을 아브라함의 삶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19장4절을 봅시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출애굽사건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히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가 룻을 주체로 말을 했지만, 출애굽을 아는 보아스에게는 룻이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것은 오히려 여호와께서 독수리 날개로 너를 업어 이곳으로 인도하셨다는 말이지요.

또한 창세기15장1절을 보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 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보아스는 창세기15장1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보아스는 룻을 단순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어쩌다가 나오미 집안에 시집와서 베들레헴으로 온 룻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룻을 아브라함과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합한 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13절을 봅시다.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백성들에겐 왕이 없습니다.

각각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각각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것은 이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온 것에 대한 감사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감사가 없어요.

이 땅에 들어온 것이 무슨 은혜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기쁨은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룻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보아스 당신이 은혜 베푸는 것이 너무나 큽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은혜로 살기를 바란다고 하지 않습니다. 보아스 당신이 나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라고 하지 않습니까?

모압여인, 이방여인 룻이 베들레헴에 들어 옴으로 말미암아 사사시대의 이스라엘과는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의 깊이가 얼마나 큰지가 드러납니다.

마태복음8장5-1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사복음서는 구약을 축소한 내용입니다.

사복음서 안에 구약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물론 신약 다른 성경도 다 들어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백부장을 만난 사건도 룻기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구약본문과도 연결할 수 있겠지요.

백부장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나라의 본 자손들, 즉 자신들은 틀림없이 천국갈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하던 자들이 지옥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룻기시대에는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심판주 되신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젠 심판주 되시는 분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믿지 않습니까?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은 이들의 믿음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합니다.

룻이 보여준 태도와 동일한 태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만 하시면 된다는 사실을 믿고 있지요.

이 말은 병이 낫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심판주 되심을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 한 사람의 믿음을 두고 이스라엘 전체를 판단하시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전체가 믿음 없다는 말씀이지요.

주님께서 백부장의 종을 병들게 하셔서 백부장이 받은 믿음을 이 시점에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병나은 종은 단지 백부장의 믿음을 드러내는 도구였지요.

결국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이 심판주 되심을 전하는 믿음입니다.

성도의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각자 우리의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뭔가 특별한 삶은 없지요.

내가 안하면 모두가 다 특별한 삶이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정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꺼집어 내십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증거케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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