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룻기강해 3 1장19-22 마라

푸른 섬 2012. 7. 22. 18:23

룻기강해 3 1장19-22

마라




음성


룻기1장19-22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데리고 곧장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나오미와 며느리가 베들레헴이 도착할 때에 온 성읍이 떠들썩했습니다.

온 성읍 사람들은 나오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멜렉과 결혼한 나오미,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도 풍족했던 나오미, 그녀의 이름답게 언제나 즐거운 여인인 나오미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오미를 진짜 나오미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와 돌아온 꼴을 보니 이 사람이 정말 나오미냐 라고 묻는 것입니다.

왜 이런 꼴을 당했느냐는 말이지요.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산 나오미의 꼴이 그야 말로 거지꼴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자신이 망한 것을 자랑하겠습니까 아니면 부끄러워하겠습니까?

나오미 사건이 남의 사건이니 우리는 성경대로 답변을 하려고 하지요.

나오미는 어떻게 말합니까?

20-21절입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자신을 나오미 즉 즐거움이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하지요.

마라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쓴, 괴롭다라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에 있을 때에는 나오미였습니다. 그런데 모압땅에서 살다가 베들레헴으로 돌아 올 때에는 마라가 되었습니다.

왜 나오미는 자신의 이름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로 불러라고 했습니까?

전능자가 자신을 괴롭게 하셨답니다. 즉 여호와께서 자신을 징벌하시므로 나는 더 이상 즐거움이 없는 인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살 때,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출발할 때는 너무나 풍족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즐거움이 다 사라진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로 불러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15장을 한번 봅시다.

22-26절입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이 사건은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한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고, 애굽 군대를 여호와께서 모두 죽이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출애굽기13장2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서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낯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지금 이스라엘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이야 시간이 지나면 어떻습니까?

금방 잊어 버리지요.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난 것은 지난 일 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수르광야로 들어가서 사흘 길을 걸었는데 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목이 마르겠습니까?

그러다 드디어 물을 발견했습니다.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서 말입니다.

마라라는 지명은 이후에 지어진 이름이지요.

물이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문제는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마라라고 지었습니다.

오늘 본문 룻기에 나오는 마라라는 단어와 똑 같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모세에게 원망했습니다.

조건이 딱 맞아 떨어지지요. 원망할 조건 말입니다.

삼일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상황에서 드디어 찾은 물이 써서 도저히 먹을 수 없다면 어떤 반응이 나오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원망이지요.

그러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이 사라지겠지요.

두말하면 잔소리 아닙니까?

그런데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신다고 합니다.

26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지금 마라사건과 이 말씀의 연결고리가 있습니까?

있지요. 쓴물을 단물로 바꾸셨잖아요.

물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언제 이스라엘을 치료하신다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정하신 법도와 율례를 지켜 순종하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의를 행하면, 여호와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면, 여호와의 모든 규례를 지키면 애굽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는 법도가 무엇인지 율례가 무엇인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의를 행하면, 여호와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면 , 여호와의 모든 규례를 지키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중 하나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쓴 물을 단물로 치료하신 사건이 왜 일어났습니까?

이스라엘의 원망에서 일어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애굽사람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민수기14장22절을 보면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실 때에 애굽 사람과 똑 같다. 바로와 똑 같다라는 선언입니다.

여기에서 열 번 에 강조점을 두셔야 합니다.

바로가 열 번이나 여호와의 말씀에 반항했습니다.

장자가 죽어도 이스라엘을 추격하다가 홍해에서 몰살당했습니다.

사흘 동안 물을 찾지 못하다가 물을 찾았는데 쓴 물이라 도저히 마실 수 없으니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하나님께서 왜 마라, 이곳에서 시험을 하신다고 하셨을까요?

지금까지만 보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했습니까?

불순종했지요. 사실 질질 끌려 다니는 입장 아닙니까?

형편이 좀 좋아지니 신나하다가 형편이 어려워지면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 아닙니다.

그러니 시험을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쓴 물이 어떻게 단 물이 되었습니까?

물이 노력했습니까?

아니지요.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한 나무를 물에 던져서 달게 되었지요.

쓴물이 한게 있어요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단지 쓴물은 쓴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쓴물을 단물로 바꾸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이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마라, 이곳에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치료를 받을 조건이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의를 행하면 치료해 주신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이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이지요.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인들이 당한 질병이 없다는 사실은 여호와께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나오미가 자신을 마라라고 한 이유가 분명해지지요.

말씀에 불순종해서 지금 꼴이 슬프고 괴로운 꼴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름을 마라라고 지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출애굽기15장26절에 말씀하시는 치료하시는 여호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굉장히 역설적이지요.

지금 말씀에 불순종하여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땅으로 가서 쓴, 괴로운 상태가 된 것 자체가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마라에서 다시 나오미로 바꾸어 줄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치료하시는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나오미는 모압땅에서 그냥 살다 죽어야합니다.

그러나 마라의 모습으로 베들레헴에 돌아 오게 하신 것은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오미 가정에 징벌을 내리시고 괴롭게 만드셔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 해서 꼭 질병을 치료한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예수님께서 치료하시는 분으로 오셨지요.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병 고침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떠납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자만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됩니다.

그러니 출애굽기15장에 나오는 여호와 라파라는 말을 내가 원하는 식으로 이해하면 마귀의 생각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위해 죄인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도가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4장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마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만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자랑하는 방식이 나오미랑 같아요.

나오미가 마라가 됨을 전했듯이, 이 여인은 자신이 행한 모든 것들을 부끄럼 없이 말하면서 예수님을 전합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모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일이 너무나 크고 놀라운 은혜이기에 성도의 눈에는 치료하시는 여호와, 곧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보여야 합니다.

자신이 행한 일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그렇지요. 자신이 행한 일을 뻔뻔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만 높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귀하기 때문이지요.

마가복음5장25-34절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앞에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부정한 과거가 드러남과 예수님께서 고쳐주심이 만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치료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전했습니다.

성도에게 많은 일들이 닥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뭡니까?

십자가지신 예수님만 믿고 전하라고 이 사건을 일으킴을 알아야 합니다.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 하라.

우리도 이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마라의 인생으로 살더라도 그 인생이 제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전하는 인생임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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