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30 다툼과 피차 고소

푸른 섬 2015. 3. 29. 20:22

다툼과 피차 고발

고린도전서61-6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오늘 본문 말씀이 약간의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할 겁니다. 피차 고발이라는 사건이 어디에서 출발합니까? 다툼에서 출발하지요. 그렇다면 다투는 것에 대한 문제가 더 근본적인 문제인데 다툼의 결과물인 세상 사람들에게 피차 고발하는 사건을 더 심각하게 말씀하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한 몸의 지체이니 서로 싸우지 말고 사랑합시다. 다투면 안돼요라고 하면서 화목하라는 말씀대로 우린 화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피차고발에 대한 원인인 다툼에 대한 문제점은 뒤로 하고 피차 고발하는 문제를 언급하면서 성도의 위상을 말씀하는 겁니다.

 

먼저 다툼이라고 하면 누굴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까?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피차 다투었다기 보다 아벨이 일방적으로 죽임을 당한 사건입니다. 가인은 왜 이 다툼을 만들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판단이 무조건 싫은 겁니다. 그래서 아벨을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그 살인은 오히려 복수를 불러 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아벨로 인해 자신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스트레스 해소 방식은 아벨을 죽이는 방법 외에는 없었습니다.

 

다툼에 있어서는 야곱과 에서를 빼 놓을 수 가없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왜 다투었습니까?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들은 다투었습니다. 물론 야곱이라는 인물은 항상 이기고 싶어하는 인물입니다.

타인이 존재하는 것 자체 만으로 스트레스입니다. 차라리 독자로 태어 났다면 이런 스트레스 없습니다.

 

야곱은 이기기 위해서 싸움을 합니다. 형이라는 상대와 싸웁니다. 형과의 다툼에서 그는 하나님의 축복권을 뺏아 오고야 맙니다.

 

가인과 아벨시대였다면 야곱이 에서를 죽이든지 아니면 에서가 야곱을 죽였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서로 죽이지는 못하게 하셨지요. 비록 죽이지는 않았지만 가인과 동일하게 역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기기 위한 싸움을 했지만 누가 승리자였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야곱이 승리자처럼 보입니다. 아니 어쩌면 에서가 승리자처럼 보이잖아요.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 일곱 번씩이나 절하잖아요.

 

그런데 승리자는 야곱도 아니고 에서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됨으로 말미암아 야곱은 진정한 승리는 언약하신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음을 축복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이루어 놓은 투쟁의 결과물은 축복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들이 야곱의 두 아내를 볼 수 있습니다.

레아와 라헬입니다.

두 아내는 남편 사랑을 빼앗기 위해 자식 낳는 경쟁을 합니다. 다툼을 벌이지요. 이들이 궁중에 있었다면 한 사람이 독약을 타서 죽이든, 모함을 해서 죽이든 했을 겁니다.

 

이들이 남편 사랑을 차기 위함 싸움으로 낳은 아들이 야곱의 아들들, 12지파의 조상이 됩니다. 이들은 베노아가 베냐민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모릅니다. 내 슬픔의 아들이 오른손의 아들로 바뀌는 원리를 알지 못합니다.

 

실제로 열두 지파를 멸망 당하고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함을 받습니다. 라헬이 죽으면서 낳은 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활을 제대로 증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레아와 라헬은 다툼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고자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열왕기상 3장에 나옵니다.

그 때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창기 둘이 있었는데 둘 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창기가 자가다 아들을 누르는 바람에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때 그 창기가 다른 창기의 아들을 자신의 죽은 아들과 바뀌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둘을 다툼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솔로몬이 어떤 판결을 내립니까?

칼로 산 아들을 둘로 쪼개어 각각 절반씩을 창기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지요. 이때 진짜 아들의 엄마가 포기합니다. 오히려 아들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아들의 죽음을 스스로 맞이합니다.

 

저 창기의 아들이 된다면 자신에겐 아들이 없습니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지혜의 솔로몬이 이 여인이 산 아들의 엄마라고 판결을 내립니다.

 

다툼이 왜 일어났습니까?

산 아들이 내 아들이라고 우기기 때문이지요.

 

산 아들을 죽은 아들로 여기게 될 때 다툼을 해결됩니다. 이것을 솔로몬의 지혜로 우리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끼리 다툼이 일어 났습니다. 그런데 이 다툼은 세상 법정에까지 가야 해결될 다툼입니다. 돈 조금 떼어 먹었다고 그러겠습니까? 뭔가 큰 다툼거리가 발생했겠지요.

 

일억을 빌려 줬는데 갚지 않으니 고발을 했는지 아니면 다른 문제인지 우리는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충분이 다툴만한 상황이고 그 상황은 충분히 세상 법정에 고발할 만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성문법전인 함부라비 법전에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법이 나와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입니다.

 

함부라비 왕이 악을 없애기 위해 이 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무엇이 악일까요?

남이 나의 눈을 상하게 한 것이 악이지요. 그러면 이 법을 그대로 적용하면 자신이 상한 만큼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겁니다.

 

좀 노골적인 법입니다. 지금은 모든 문제를 돈과 옥살이로 해결합니다. 대부분 돈이면 다 해결되지요.

 

교통사고 내서 사람이 죽었다면 함부라비 법전에 의하면 그 사람도 교통사고로 죽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돈으로 해결하잖아요. 물론 죽지도 않고요.

 

지금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다툼이 발생하고 그 다툼으로 인해 세상법정에 고발했다는 것의 의미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세상 법정에 고발했다는 것은 그를 죽이겠다는 의미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듯이 자신에게 손해를 가져온 자는 죽여 버리겠다는 것이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이 문제는 다르지 않습니까 라고 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끼리 다투었다고 해 봅시다. 왜 다툽니까? 그 이유는 나를 기분 나쁘게, 다르게 말하면 나에게 정신적인 물질적인 손해를 가져왔기 때문에 다투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문제가 해결되면 되는데 이 상황에서 멈추지 않고 법정에 고발해서 반드시 나의 억울함을 풀어 내겠다고 한다면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짐작이 가지요.

 

먼저 다툼이라는 것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를 우리들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성도의 위상을 말씀합니다. 성도의 위상은 세상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할 역할을 성도가 합니다. 뿐만 아니라 천사도 판단할 겁니다.

교회에서는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 누군고 하면 세상에 있는 판사들, 검사들, 변호사들입니다.

 

상상이 안가죠?

 

판사시키려고, 검사 시키려고, 변호사 시키려고 안달나서 그렇게 되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해 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교회는 이런 것들을 경히 여깁니다.

 

이 세상 틀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들이 보기에 저들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도지사든 모두다 경히 여김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교회안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판단을 맡기느냐는 말입니다.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지혜자가 너희 중에 없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우린 다툼의 최종목적지가 어디인지 알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기대하는 바는 다툼하지 말라는 말씀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이미 고린도 교회는 세상법정에 고소를 해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여러분들이라면 뭐라고 편지를 쓰겠습니까?

 

세상법정에 고소하지 말라고 편지를 쓰겠지요.

아니면 그런 상황이 닥치지 않게 다투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고 편지를 쓸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식이 아니라 책망을 합니다.

너희들이 어떤 자들인데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에게 판단을 맡기느냐는 겁니다. 너무나 의외의 말씀이지요?

 

오히려 교회가 보여주어야 하는 역할이 나오도록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그 역할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는 역할을 하게 합니다.

 

즉 다툼 없는 교회, 세상 법정에 고발하지 않는 교회를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교회 안에 형제간의 다툼을 해결할 지혜자가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 기분이 어떨까요?

 

성도는 세상을 판단하고, 천사도 심판하는 그 위치에 있습니다.

이런 의식을 갖고 살아갑니까?

 

지금 고린도 교회는 이런 의식이 없어요. 무슨 의식만 있습니까?

내 옆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의 경쟁 의식입니다.

 

저 놈이 죽어야만 내가 살수 있다는 마음입니다.

 

가인이 왜 아벨을 죽였습니까?

 

내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함께 모여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자존심은 살아 있지요.

사실 자존심이 살아 있어야 주님의 피를 제대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늘 다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서 난 지혜가 없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참 지혜자는 예수님 밖에 없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우린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꿈꾸는 교회로 만드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교회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만드신 교회는 죄가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다투는 교회, 오히려 세상법정을 더 존중히 여기는 자들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교회에 책망을 하십니다. 주님이 왜 지금도 기도하셔야 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역할로 교회는 존재합니다. 주님이 왜 지금도 주님의 피로 구원하셔야 하는 지를 증거하는 자로 책망받는 교회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 다투지 맙시다. 서로 죽이려고 하지 맙시다라고 마음 먹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 먹더라도 그게 그렇게 안됩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타인이 있은 이상 타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식하기 때문에 비교가 되고 비교가 되면 경쟁이 되고, 경쟁이 되니 이겨야 하고 이겨야 하니 죽이고 싶습니다. 어느 누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피만을 자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법정, 우리가 마땅히 경히 여겨야 하는 자들이지만 어느 순간 중히 여기는 자들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식을 키우면 노골적으로 드러나잖아요. 세상에서 경히 받는 자가 되라고 가르칩니까 아니면 중히 여김을 받는 자가 되라고 가르칩니까?

 

중히 여김을 받는 자가 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교회는 이런 자들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경히 여김을 받는 자, 의사, 박사, 대통령, 국회의원, 판사, 변호사, 검사, 재벌 회장, 재벌 회장 사모님 등.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 배치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죄가 봄날에 벚꽃피듯 활짝 피라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죄가 활짝 꽃이 피려면 교회에 나오셔야 합니다. 나오셔야 다툼이 일어나고, 세상것을 중히 여기는 것이 드러 납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피만을 자랑는 교회가 됩니다. 주님은 이걸 노리고 다투는 교회, 세상법정을 중요시 여기는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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