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32

푸른 섬 2015. 4. 12. 18:11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고린도전서612-14

영지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직관으로 인간 구원에 대한 신비한 지식을 깨닫게 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겁니다. 이들에게 몸은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몸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상관없다고 주장합니다.

 

들어 보니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믿는 십자가 복음과 비슷합니까 다릅니까?

 

완전히 다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과 비슷하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요. 비슷한 면이 있지요. 구원은 오직 주님만이 주시는 은혜로 얻습니다. 이 지식을 자신이 소유합니다. 이것을 신비한 지식을 소유했다고 간주하고요.

또 한 가지는 어떤 행동을 해도 몸에서는 죄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몸의 어떠한 행동도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몸이 악하기 때문에 몸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구원과는 상관없다는 영지주의 사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들어 보니 어떻습니까? 십자가 복음과 영지주의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까?

 

사실은 완전히 다르지요?

영지주의 주장의 구원이란 주체가 그 자신입니다. 자신이 지식을 소유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그 지식을 안다고 안다고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앎이 죄로 드러날 뿐입니다.

구원의 주도권은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밖에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몸이 무슨 짓을 해도 죄가 된다는 주장입니다. 영지주의 사상은 몸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복음은 몸이 무슨 짓을 해도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는 증거물로 사용된다는 주장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라면 영지주의는 자신의 영, ,육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혼과 육은 아무른 소용 없다는 주장이고, 영만 소중하다는 주장을 펼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인간 자체가 십자가 안에 가두어져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사상이든 행위든 어떤 것이든 죄로 드러날 뿐이라는 겁니다.

 

12절을 보면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까? 아니면 참으로 쉬운 말씀입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각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능하다. 그러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그렇잖아요.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가능하지 않습니까? 불가능은 없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가능한 모든 것이 다 유익한, 유용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용한 것은 취하고 유용하지 않다면 행하지 않잖아요.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말이지요.

 

그리고 하는 말씀이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 그러나 내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다르게 표현하면 어떤 권능 아래에도 놓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평소 우리들이 생각하는 사고 방식 아닙니까?

 

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어떤 권능도 나를 좌지우지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이런 내용이 성경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사상을 왜 굳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본문을 보통 이렇게 해석합니다.

성도는 자유인이다. 그러나 자유인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선 안된다. 타인에게 유익하도록, 자신에게 유익하도록 살아야 하는 자유인이다라고 해석합니다. 방종해서는 안된다고 해석합니다. 지금까지 살펴 보는 본문들이 그렇게 말씀하는 것 같잖아요.

 

들어 보니 그럴 듯 하지요. 그리고 그 다음 부분은 우리는 자유인이다. 그러나 그 자유로 인해 죄의 노예나,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해석을 합니다.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아요.

 

그런데 만일 12절을 이렇게 해석해 버리면 우리 인간들의 상식과 일치하는 해석이 되어 버립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런 해석은 예수님을 믿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해석해 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문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과연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이 세상에서 누구나, 상식적으로 아는 말을 이곳에 기록한 이유가 방종하지 말고, 죄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일까요?

 

만일 이런 식이 되면 주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중보자이신데 주님은 저리 제쳐 놓고 하나님과 나와 직접 거래하는 꼴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멸망당한 자기 조상의 경험을 기억하여 자신들은 율법대로 행하겠다고 말했습니다(5:27).

이게 뭐가 나쁩니까? 두려움 속에서 떨며 모세를 통해 하시는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하겠다는데 이것이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수준을 몰랐습니다. 두렵다고 해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우상을 섬기다가 그들의 알지도 못하던 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도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우린 본래 그런 인간들입니다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결심했을까요?

결심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서 결단코 그런 일이 자신들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 오셨을 때 말씀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이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자신들은 결코 지옥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대로 살았다는 겁니다. 십계명을 어릴때부터 지켰다는 겁니다. 누가 보아야 세리와 창기보다 죄인이 아니며, 누가 보아도 천국갈 자격이 충분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되지 않으면 천국갈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되잖아요. 예수님께서 왜 바리새인을 무시합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하나 내가 죄의 종이나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 12절을 해석하려면 반드시 구약과 예수님을 거쳐야 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십자가를 거쳐야 됩니다.

 

십자가에서 오늘 본문을 해석하게 되면 어떻게 해석될까요?

 

그 다음 구절을 봅시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앞부분을 먼저 살펴보면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고 합니다. 말이 맞지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장정 오천명을 먹이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강제로 임금을 세워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배를 위한 음식, 음식을 위한 배밖에 모르는 자들은 이것이 깨지는 자리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들도 예수님을 떠나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영지주의자들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이들이 쉽게 접수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사상처럼 들렸다 하더라도 이들의 육은 육이 원하는대로 하고 싶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대로 예수님께서 제공해 주시지 않기에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육이라는 것은 반드시 썩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땅의 논리는 배와 음식의 논리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성경이 너무 수준 낮다고 할 겁니다.

오늘날 어느 누가 배와 음식의 관계로 삽니까? 자아 실현, 자기 이름을 위해 사는 세상인데 그까짓 것 하지요? 이 모든 것이 배에서 나옵니다. 음식에서 나옵니다.

 

주님 앞에서는 이 모든 것들을 폐해 버립니다. 이것 우리들이 예상한 바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는 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주님쪽에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배와 음식의 사이클 속에서 밖에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빠져 나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자유 속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몸이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동의는 됩니다. 그런데 배와 음식을 폐한다는 말씀도 동의가 되지요? 알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죽게 되고 배와 음식도 폐해진다는 것을 알아요. 알지만 음식은 배를, 배는 음식만 위합니다.

 

이것을 지금 몸과 음란으로 말씀합니다.

몸은 음란을 위해서만 움직입니다. 출애굽기34장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땅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을 세우게 되면 그들의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게 될까 하여서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기 좋게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사사기8장을보면 기드온이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 가문을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가문으로 만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릴 것이라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취한 금귀고리를 요구했습니다. 그 금 귀고리로 금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릴 것이라고 해 놓고 왜 금 에봇을 만듭니까? 이건 가나안 땅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노골적으로 우상은 만들지 못하고 나름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는 입장에서 에봇을 만든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상숭배한 겁니다.

 

예레미아1327절을 보면 내가 너의 간음과 사악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위에서 네가 행한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 하시니라

 

이스라엘 온 천지가 음란바다입니다.

호세아 12절에서는 이스라엘을 노골적으로 음란한 여자로 말씀하십니다. 북이스라엘이 그렇다면 남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239절에서 이 세대를 음란한 세대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이 세대의 몸은 오직 음란을 위해서만 있다는 말씀입니다.

 

배는 음식을 위하고 음식은 배만을 위하는 세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다는 말씀에 해당될 수가 없는 세대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않는 다는 말씀이 주님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자기 몸을 위한 말씀으로 해석해 낸다는 겁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가 그렇게 해석해 내고 있지요.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해 있다고 하시는 말씀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없습니다. 어느 누가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음란을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의 위상이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않는 위상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말씀이지 성도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를 다시 살리심과 같이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몸이 음란을 위해서만 움직이기 때문에 몸이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다는 말씀을 늘 위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죽음을 당하는 겁니다.

 

사람이 왜 죽습니까? 죄 때문에 죽습니다. 죄가 없다면, 몸이 음란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면 죽음이 없습니다. 결국 성도는 왜 죽어야 하는 지를 보여 주는 역할로 살아가는 겁니다.

성도는 왜 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기위해 말씀이 성도 속에 들어야 역사하는 겁니다.

 

주께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린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기 위해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배는 음식을, 음식은 몸을 위해서만 있을뿐입니다. 몸은 오직 음란을 위해서만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에겐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 다시 살리심을 보여주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영지주의 자들은 그래, 어차피 몸은 음란을 위해 있으니 에라 모르겠다 내 마음대로 살아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합니다. 성도는 이런 마음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아요.

몸은 자동적으로 음란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요. 이런 움직임, 이런 마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서야 했고 다시 살아나셔야만 했던 이유임을 발각당하게 됩니다. 말씀이 없으면 자신이 음란한 짓을 밥먹듯이 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분에 의해 다시 살리심을 받아야 하는 자리에 있음이 드러나는 자리가 성도의 자리입니다.

 

자기 주체가 더 확고해 지는 자리는 성도의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는 자리가 성도의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