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34

푸른 섬 2015. 4. 26. 16:58

성령의 전

고린도전서618-20

 

창세기153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복의 기준으로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람을 복의 기준으로 세우겠다고 하셨을 때 우리들은 아브람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을 복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를 따지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브람을 살펴 보아도 복의 기준이 될 만한 자격 조건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아브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땅의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즉 아브람을 복의 기준이라 하셨으면 복의 기준이라고 믿으면 되는데 우린 반드시 그 근거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 근거를 찾아도 근거가 없습니다.

 

아브람의 행위에서 그 근거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고 연구해 보아도 아브람에게서는 그러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무조건 무조건 축복과 저주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나쁜 짓을 했음에도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라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 하실 때 그 기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준은 아들의 죽음입니다. 이삭의 죽음이 아브라함을 살립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의 죽음이 곧 축복과 저주의 기준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브라함의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는 믿음 속에 있었습니다. 제대로 표현하면 주님의 믿음이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에게서 축복과 저주의 근거는 절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실 일을 갖고 아브람을 부르셔서 일을 진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브람은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전혀 될 수 없는 존재로 부각될 뿐입니다. 아내를 누이로 속여 자기 생명 연장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 부려 자기 종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낳아 약속의 자손 만드려고 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과정은 우리들이 기대하듯이 살면 살수록 더욱더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거리가 멀어져 갈 뿐입니다.

 

마지막엔 아들 못 낳는 상황이 되었지요. 도무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는 대척점을 이룰 뿐이었습니다.

 

이런 대척점을 이루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 이름이 이삭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었기 때문에 이삭이 되었습니다. 물론 기쁘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마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본심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름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복의 기준, 저주의 기준이 된다고 하셨을 때 우리들의 기대는 복의 기준다운, 저주의 기준다움을 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대는 더 큰 실망을 불러 옵니다. 오히려 아브람은 자신의 행함과 상관없는 축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핏 값으로 산 자가 어떤 자임을 제대로 보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를 성령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전이라고 하면 우린 먼저 무엇을 생각하게 되는가 하면 아브라함을 바라보듯이 우리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과연 내가 성령의 전다운가를 먼저 따집니다.

 

앞서 창기의 전이라든지 음행이라든지 이런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들이 성령의 전이라는 말씀을 듣게 되면 이 말씀과 반대되는 개념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전이라면 음행을 피하는 것이 성령의 전다운 모습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세리와 창기에 비교했습니다. 그들과 비교할 때 자신들은 하나님 율법에 근거해 감사할 내용들이 너무너무 많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괜히 창기와 세리를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우린 말씀을 듣게 되면 누구와 비교합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내 행위가 어떤가를 생각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표를 냅니다. 즉 선악를 중심으로 성령의 전다운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음행했는가? 그렇다면 나는 성령의 전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내가 음행하지 않았다면, 창녀와 몸을 합하지 않았다면 나는 성령의 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음행을 피하라고 합니다.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한다고 18절에서 말씀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린 본능적으로 움추립니다.

그러면서 내 몸에게 죄를 범하는 것과 몸 밖에 있는 죄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몸에게 죄를 범하는 것을 더 나쁜 것으로 간주하려 듭니다. 그러면서 나는 성령의 전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너희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런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은 수준이 너무 낮아요.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너희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말씀은 이미 확정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성전이 되었다가 아니 되었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이미 성령의 전 기능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아브람을 부르실 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축복을,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리겠다는 말씀은 이미 확정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과 상관없이 주변은 아브라함 때문에 축복을 받고, 아브라함 때문에 저주를 받습니다. 이건 무조건 무조건입니다. 그는 축복과 저주의 기능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하고 연구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음행했다고 성령의 전이 부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나는 성령의 전이니 나는 절대로 음행하지 않을거야라고 한다면 그것도 성령의 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전은 내가 노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령의 전이 내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면 그건 성령의 전이 아니라 나의 전입니다.

 

분명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소유권이 이미 넘어 갔습니다. 내가 아무리 돈을 더 투자하고, 아름다운 인테리어를 해도, 아무리 더렵혀도 그건 나와 상관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값을 지불해서 샀습니다.

 

그러면 어떤 값을 지불했습니까?

십자가의 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지불하고 샀지요.

 

이게 중요합니다.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라고 했을 때 성령의 전은 확정된 겁니다.

즉 십자가의 피만을 드려야 하는 곳이 성령의 전입니다.

십자가의 핏 값이 드러나는 장소가 성령의 전입니다.

 

다른 것을 드리거나 다른 것이 드러나면 성령의 전이 아닙니다.

 

성령의 전은 극과 극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성령의 전은 인간의 죄가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증거되는 자리입니다.

 

아들의 피가 제대로 증거 되려면 죄가 제대로 드러나야 합니다. 즉 아들 죽임이 드러나야 합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그 버림받음이 드러날 때 성령의 전이 됩니다.

 

십자가의 피와 죄의 차이는 늘 평행선입니다. 이 차이는 절대로 좁힐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평행선입니다.

만일 좁혀 진다면 그곳은 성령의 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를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은 아들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은 우리 몸으로 십자가의 피만을 증거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어 하신 말씀이 내 언약을 지키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조건이 붙습니다. 내 언약을 지키면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람을 부르실 때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었습니다. 오직 약속만 주셨지요.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다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먼저 아브라함이 축복의 기준이 될 만한, 저주의 기준이 될 만한 조건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를 갖고 노골적으로 드러내시는 겁니다.

 

즉 너희들은 내 언약을 지킬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겁니다. 그래서 어떠한 죄를 범하더라도 죄용서함을 받으려면 이미 정해진 제물, 확정된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즉 너희들의 죄는 이미 확정되었다는 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 그들의 죄가 확정되었고 그 죄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 줍니다. 그래서 어떤 죄를 범했든지 확정된 제물의 피를 흘리면 죄용서함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확정된 제물의 희생을 제대로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구약에 죄를 범했을 때 확정된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드러났습니다.

 

성령의 전은 이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확정된 죄가 발각되어 지고 그 죄가 용서함을 받는 자리가 성령의 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몸으로 영광 돌리는 모습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면 떠 올릴 수 있는 생각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율법 지키기입니다. 이것 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라고 물으면 대답이 인간의 행함외에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요? 내가 믿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가 나와야 하는데 반드니 나를 주어에 집어 넣어서 믿는다고 하고 무엇을 행한다고 할 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함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릴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을 그렇게 밖에 해석 할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영광을 생각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떠나 버리면 영광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십자가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은 인간 쪽에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전이기에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자기는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차이의 불변, 즉 평행선을 보여주는 자가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