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36

푸른 섬 2015. 5. 10. 21:08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고린도전서76-17

오늘 본문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하는 일을 말씀합니다.

즉 결혼으로 인해 발생되는 모든 문제들을 상세하게 말씀합니다.

 

첫째는 결혼을 중심으로 결혼 하지 않은 사람과 과부를 먼저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만일 결혼하지 않았거나 과부가 되었다면 바울 자신과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절제 할 수 없으면 결혼하랍니다. 이렇게 되면 결혼 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절제 할 수 없는 사람, 정욕이 불같이 타는 사람으로 규정이 됩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고 과부가 되었으면 그냥 과부로 늙어 죽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절제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자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혼자 산다고 믿음 좋은 게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단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믿는 사람들 간의 이혼 문제입니다.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지지 말고 만일 갈라섰다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합하라고 합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얼마든지 이혼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믿는 자들은 절대로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갈라섰으면 그냥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무엇을 연구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꼴 보기 싫은 남편, 아내와 이혼할 궁리를 하지 않겠습니까? 갈라서는 것도, 합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세 번째는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면 그 아내를 버리지 말고,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그 남편이 아내와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혹시 믿지 않는 아내나 남편이 믿는 아내나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자녀가 거룩한 이유가 부모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면 이혼하랍니다. 형제나 자매, 즉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런 일에 전혀 얽매일 필요가 없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불렀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불렀다는 말씀 때문에 사람들은 이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씀으로 이 본문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화평이라는 말은 싸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갈라지자고 하는 사람과 사는 것이 화평입니까 아니면 이혼하는 것이 화평입니까?

 

이혼하는 것이 화평이잖아요. 우린 성경을 볼 때 아담의 속성을 담고 해석하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을 해석할 때 사람 사는 세상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혼하지 않는 것이 화평이라는 전제를 갖고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화평은 십자가의 피로 죄용서하심의 화평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남편과 아내가 싸우지 않는 화평이 아닙니다.

 

그래서 화평하려면 이혼하라는 겁니다. 함께 살면 늘 전쟁이잖아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앞서 말한 믿는 아내로 말미암아 남편이, 믿는 남편으로 말미암아 아내가 거룩하게 된다는 말씀에 대한 해석을 공격합니다.

 

왜 공격합니까? 난 화평이 아닌 상태에서의 결혼생활을 지속하겠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으로 인하여 남편이, 아내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느냐고 합니다.

네가 주님도 아닌데 왜 화평 중에 부르신 주님을 모독하느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믿는 남편으로 인해, 믿는 아내로 인해, 아내가 남편이 거룩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에게 나눠 주신 것은 어떤 것입니까?

사람들은 말씀을 보면서 자꾸 적용을 자신에게 하려고 합니다.

물론 말씀은 자기에게 적용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자기가 적용하면 안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과부가 되고 싶어서 과부가 됩니까? 결혼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도권을 내가 갖고 있지 못합니다.

 

믿는 사람끼리 산다고 해도 항상 마음이 같습니다. 일치합니까? 항상 같이 살고 싶습니까? 언제는 같이 살고 싶다가도 언제는 같이 살기 싫습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갈라서지 말고 갈라섰으면 갈라서고, 다시 합하려면 그 남편과 합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와 결혼 하고 싶습니다. 하기 싫잖아요. 그런데 결혼합니다. ? 결혼할 상대가 없잖아요. 아니면 서로 좋아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예수님을 믿으면 당연히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화평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화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니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과 결혼할 때 이혼 할 것이라 예상한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할 것이라는 예상도 못했지만 결혼한 후 그 사람과 이혼할 것이라는 것이 내가 예상 못했습니다.

 

결혼할 때 난 저 사람과 오년, 십년 살다가 어느 해 어느 날에 이혼할 것이라고 해서 이혼하는 사람 봤습니까? 그런 사람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로 인하여 남편이 아내가 거룩하게 된다는 말씀에 혹 하여서 난 꼭 내 남편을 나로 인하여 거룩하게 만들거야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남편들을 초대해서 진수성찬으로 대접하고, 남편을 지극 정성 모시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제가 사는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남편을 예수 믿게 하고 싶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주신 화평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탐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내가 믿고 싶어서 믿었습니까? 그렇다면 그게 가능합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내가 믿어 싶어 믿는 예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믿게 해 주셔서 믿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남편이 거룩해 지고, 아내가 거룩해 지고 자식이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은 그런 상황을 이용하셔서 거룩하게 할 자를 거룩하게 하시는 겁니다.

 

14절에 보면 자식문제가 있습니다. 자식 구원받는다고 하면 물 불을 가리지 않잖아요. 물론 요즘은 자식 구원받는데 관심 있는 부모 아주 적습니다. 공부 잘하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부모들은 아주 많지요.

 

자식들의 거룩이 부모의 거룩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지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믿으면 자식도 믿는다 이런 공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는 부모의 역할을 통해 주님이 그 자녀를 거룩하게 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그럴 것 같으면 난 그냥 자식에게 공부만 잘하라고 하겠습니다. 어차피 거룩이 내 소관이 아니잖아요라고 합니다. 이런 태도가 바로 믿지 않는 자가 갈리자고 하는데, 화평중에 없으면서 끝까지 갈리지 않고 저 남편은, 저 아내는 내가 구원하고 말겠다는 태도입니다.

 

우리에겐 주도권이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주님께서 나눠 주신대로 살아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나눠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결혼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어린 자녀들이 모르지요.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여러분 중 하나가 과부된다는 것 알고 있습니까? 홀아비 된다는 것 알고 있습니까?

그거야 언젠가 되겠지요라고 하지만 언제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누가 또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난 너랑 이혼하겠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고정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달리 말하면 신이 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난 결혼하지 않겠어.’ ‘난 결혼 했으면 이혼하지 않겠어.’ ‘난 예수 믿으면 끝까지 믿을 거야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 인생은 그 어디에서도 고정될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인간이 나옵니까?

고정되었다고 할 때 주님이 죽입니다. 실상 진짜 고정된 자리는 죽음의 자리인데 우린 믿음이라는 가면을 덮어쓰고 산 자리에서 어떤 고정된 지점을 세우려고 합니다.

 

창세기 37장에 보면 요셉이 나옵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꾸는 꿈도 요셉 중심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그의 형제들로부터 죽음이 찾아올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우리가 요셉이라면 그냥 그 꿈처럼 죽음의 과정을 겪지 않고 형제들과 부모의 주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요셉을 죽음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주님을 절대로 우리가 꿈꾸는 기대하는 바를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꿈꾸는 바를 철저하게 뭉게 버린 후 주님께서 배치하신 자리를 주십니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과정을 겪게 하시고 이혼이라는 과정도 겪게 하시는 겁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 인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기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꿈을 해석해 준 댓가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무참히 짓밟힙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지위를 회복했지만 요셉이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 버립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합니다.

 

이때 베드로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고정시키고 싶었습니다. 이 순간을 영원히 고정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베드로 것은 없지요. 야고보 요한 것은 없습니다. 자신들의 초막은 없어도 되니 이 순간을 영원으로 고정하고 싶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모세, 엘리야 사진도 없었는데 어떻게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 봤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위해 죽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신 이유는 너희의 자리가 증인의 자리임을 재차 확인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산다. 과부로 산다. 결혼했다. 이혼 했다. 자식 있다. 그 순간순간을 고정하고 싶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내가 기대하고 기다리든 순간이라면 그 자리를 고정하고 싶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해 초막을 짓고 싶지 않습니까? 난 초막 없어도 됩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디 그게 오래 갑니까? 몇 초를 못 넘기잖아요.

 

결혼하지 않겠다. 결혼 하겠다. 이혼하고 싶다. 자식 낳으니 기쁘다. 자식 때문에 죽겠다. 이게 완전 뒤죽박죽입니다. 마치 삐삐가 사는 별장입니다. 우린 이런 것들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어떻게요? 그렇게 불렀습니다. 고정된 자리가 아니라 변동되는 자리로 불렀습니다.

그렇게 하셔서 주님께서 노리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것이 고정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것이 고정이 되어 버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됩니다.

 

왜 그렇습니다. 바울이 혼자 사는 것이 고정되었다고 생각합니까? 얼마나 결혼 하고 싶었겠어요. 그래야만 십자가의 피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혼자 사는 것이 주님이 살게 하신 삶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결심으로 살았다면 그것은 주님이 배치한 자리가 아닙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결혼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이혼하게 하십니다. 이럴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되지 않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