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35남자,여자, 아내, 남편

푸른 섬 2015. 5. 3. 17:07

남자여자, 남편아내.

고린도전서71-5

오늘 본문은 남자와 여자, 아내와 남편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을까요? 왜 아내와 남편을 만드셨을까요?

남편과 아내를 만들었다고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됩니까?

 

창세기 2장을 보면 처음에는 남자 아담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만든 것이 남자의 갈빗대 하나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처음부터 부부였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담만 있었습니다. 남자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만들었을 때에는 이미 남편과 아내로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반드시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창세기에는 분명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하여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결혼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십니다.

 

이게 뭔가 맞지 않아요. 동일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처음 창조 원칙이 끝까지 견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바뀝니다.

 

남자와 여자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해야 된다는 것이 남편 아내 관계가 어디론가 사라지 버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 아내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시작은 분명 남편 아내라는 한 가지 조건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남편 아내 조건이 아니라 독신도 좋다고 하십니다. 두 가지 조건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이 본문을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마태복음19장에서 아내를 내어 버릴 것 같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제자들의 말에 예수님께서 타고난 자만 그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받을 자만 받게 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하나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결혼해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근거하면 결혼하는 것이 독신보다는 수준이 확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도 독신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수준 높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라고 시작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신부가 결혼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신부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수준 높은.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결혼하는 것이 신앙적 수준이 높습니까 아니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신앙적 수준이 높습니까?

 

아마 백의 백은 모두가 다 결혼하지 않고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수준 높은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너무나 수준 낮은 관계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남편과 아내를 이야기할 때 우린 항상 떠오르는 말씀이 에베소서 말씀입니다. 524,25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

이런 말씀 정도면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수준이 높잖아요. 결혼이라는 것이 이런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기껏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차원에서는 남편과 아내랍니다.

성경이 갑자기 수준이 확 떨어진다는 생각 들지 않습니까?

 

차라리 창세기 2장 말씀대로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라는 말씀이 훨씬 더 수준 높은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수준 낮은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들 생각에 말입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닮은 아들을 낳고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선악과를 따먹은 후 인간들이 할 일이란 딱 세 가지 입니다. 태어나고 아들 낳고 죽는 것, 이것이 인간들이 할 일입니다. 결국 죄인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자손, 즉 죄의 자손만 생산하고 죄 값으로 죽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남자와 여자가 할 일입니다.

 

창세기29장 이하에서 야곱이 아내 라헬과 레아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왜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칠년, 칠년, 즉 십 사년을 그토록 고생했는가? 그런 이야기가 왜 성경에 기록되어야 하는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레아와 라헬이 왜 그토록 남편 사랑 받기 위해 자식 생산에 열을 올리는 내용을 성경에 담을 필요가 뭐 있는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연애사가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린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연애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혼도 별 의미 없고, 자식 낳는 것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연애사도 중요하고, 결혼도 중요하고 자식 낳는 것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이 중요하다, 즉 꼭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나고 죄인 낳고 죄인으로 죽는 것이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야곱의 시시콜콜한 사랑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야곱은 자기 자신만 사랑한 죄인, 라헬과 레아도 자기 자신만 사랑한 죄인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자기 자신 사랑의 죄를 사용하셔서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하셨습니다.

 

야곱이라는 바탕을 완벽하게 깔아 놓고 그 바탕이 항상 드러나는 이스라엘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을 아주 도드라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나름 신앙 좋은 사람 되겠다는 입장에서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도 화답하셨지요. 그런데 천국을 위해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나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사람들은 그래 난 천국을 위해 결혼하지 않겠다하여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분명 천국을 위해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나 할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내가 천국을 위해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하면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에 들어가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을 위해 결혼하지 않게 하셨을 때에는 내가 천국을 위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가 반드시 빠질 때 가능한 말씀입니다. 내가 천국을 위해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해 버리면 하나님은 뭐가 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본문 말씀을 볼 때 너무나 저급한, 수준 낮은 말씀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꼴랑 부부관계 때문에 결혼하고 그것도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 잠시 각방을 쓰라는 말씀보단 차라리 결혼하지 않고 늘 기도하는 것이 훨씬 수준 높은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제발 이런 수준 낮은 원초적인 본능에 대한 이야기는 집어 치우고 수준 높은 사랑이나 복종이나 그런 말씀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마치 오늘 본문 이야기를 하면 눈을 내리 깔고 생각합니다.

 

이게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해당되거든요. 그러다 보니 본능에 해당되는 것은 저급하잖아요.

밥먹는 것도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나는 밥 먹기 위해 살아간다라고 하면 저급한 인간 취급합니다.

 

적어도 난 자아실현을 위해 살아 갑니다라고 해 줘야 뭔가 수준 있고 교양 있고, 대화할 만하고 상대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너무나 수준 낮은 이야기를 합니다. 남편의 의무, 아내의 의무를 다하라고 합니다. 아내의 몸이 남편 것이고, 남편의 몸이 아내 것이랍니다. 그러니 이런 저급한 말씀을 보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수준 낮은 말씀에 순종합니까?

순종 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가 내 몸이 아내 것이고, 남편 것이라 생각합니까?

내 몸은 내 것이지요. 소유권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말씀을 갖고 현행법에 가져가면 구속됩니다. 감옥 갑니다.

 

말씀이 인간들이 생각하기에 너무나 저급한 말씀을 하는 것 같지만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이런 저급한 말씀에도 순종할 마음 추호도 없습니다.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몸은 내 것이다라는 것이 확정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앞서 창세기를 살펴보았지만 우리 인생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내 몸이 내 것이라면 태어나고 낳고 죽었더라는 말씀이 짜증납니다. 분노가 일어납니다.

기껏 그런 꼴 보여 주라고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습니까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태어났으면 뭔가 꿈이 있어야 하고 그 꿈을 이루어 보고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시작은 미약하지만 네 나중은 창대하게 막을 내려야 인생을 산 것 같잖아요.

꿈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죄인으로 태어나 죄인만 생산하고 죄인으로 죽는 것이 꿈이라면 어느 누가 그것을 꿈이라고 인정해 주겠습니까?

 

내 몸은 내 것이니 나는 내 몸을 통해 나를 더욱더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가는 것이 꿈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내 몸을 아내를 위해 남편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까? 이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인생 살려고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께 어떤 부부를 만났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이 말하기를 난 내 아내가 조선시대 여인인줄 알고 결혼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나는 남편과 아내가 동등한 입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야기 들어보면 남편 입장 아내 입장 다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 부부 말속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하면 나는 나다라는 강한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즉 나를 위해 너가 있고 너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아내요 남편이라는 겁니다.

 

얼핏보면 오늘 본문과 비슷한 것 같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와 정 반대의 뜻입니다.

, 남편 너 죽어라, 아내 너 죽어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말씀을 나를 위해 이용해 먹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 하지 않으려고 하고, 결혼 하려고 하고, 남편, 아내 행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결혼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없어서? 혼자 살기 편해서? 그렇다면 반대로 결혼하는 이유는 돈이 있어서. 둘이 사는 것이 좋아서이겠지요.

여기 어디에 주님이 들어갈 자리가 있습니까?

 

아내나 남편, 혼자 사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오직 한 가지,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과정으로 주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야곱은 야곱취향대로 아내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찾는 방식은 그 시대 그 풍습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야곱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곱이나 오늘날 성도는 자신의 취향대로 결혼하거나 혼자 살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어디까지나 주님께서 결혼하게 하셨고, 주님께서 혼자 살게 하시는 범주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결혼이나 혼자 사는 것을 통해 십자가의 피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인을 낳고 죽음으로 죄인임을 확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결혼이나 혼자 사는 것은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해 그렇게 살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내 몸은 내 것이라고 늘 우기면서 결혼생활 합니다. 아니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어떻게 엮여져 있는 지를 제대로 보여 줍니다.

교회는 늘 주님의 피가 아니면 소망 없는 자로 드러나는 지체로 살아감을 보여줍니다. 결국 처음 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 한 몸을 만들기 위한 시작이었음을 성도의 독신생활이나 아이면 부부관계를 통해 증거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