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33 그리스도의 지체? 창녀의 지체?

푸른 섬 2015. 4. 19. 23:38

그리스도의 지체? 창녀의 지체?

고린도전서615-17

여호수아 7장을 보게 되만 아간의 범죄로 인해 아이성 전투에서 패합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치기 전에 정탐을 보냈듯이 아이성에도 정탐을 보냅니다. 정탐 보고에 의하면 이삼천명만 올라가서 쳐도 충분히 칠 수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누워서식은죽 먹기입니다. 그런데 아이 사람들은 한명도 죽이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 삼십육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습니다.

 

이제 여리고성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듣고 마음이 물같이 되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마음이 되었습니다. 아이성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 이스라엘이 여리고성 같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니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삼십육 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립니다. 주 여호와의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여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 들지 않습니까?

 

여호수아라면 이런 말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우리들 생각이 그렇잖아요.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정탐보고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자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니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부리시는 종일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나안 족속들에게 포위되어 몰살당하게 되었는데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 나의 언약을 어겼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 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서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온전히 바친 그 물건을 제하기까지는 원수들 앞에서 패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를 하니 아간이 뽑혔습니다. 아간이 아름다운 외투 한 벌, 은 이백 세겔,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를 탐내어 그 물건들을 자신의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다고 합니다.

 

아간의 말대로 그 물건들을 찾아 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생각에는 원래 하나님 소유였던 그것들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골 골짜기로 아간에게 속한 모든 것, 즉 훔친 은, , 외투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 딸들, 그의 소들, 그의 나귀들, 그의 양들,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끌고 가서 돌로 치고 불살라 버리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로 도로 가져가지 않고 아간과 함께 돌에 맞아 불살라져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아간이 훔친 외투, , 금덩어리는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물건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621절을 보면 그 성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고 합니다.

외투, , 금덩어리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소와 양과 나귀들도 모두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진 물건 속에 포함됩니다.

 

여호수아617절에 여리고 성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잠시 생각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온전히 바쳐지는 것을 구분하여 남녀노소, 소와 양과 나귀들은 모두 멸하는 식으로 바치고, 나머지는 취하여 하나님께 바치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모두 우리가 생각하는 진멸을 하라고 하셨다면 아간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무슨 말인고 하면 이 말씀이 오히려 아간 문제를 야기 시킨 겁니다.

 

자 그럼 여기에서 몇 가지 생각해 봅시다.

아간 한 사람의 범죄로 왜 삼십 육 명이 죽어야 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 소속인데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훔친 것이 문제가 됩니까? 이미 한 편인데.

또 한 가지는 아간이 왜 훔친 물건과 함께 바쳐져야 합니까?

 

먼저 삼십육 명이 죽은 이유는 이스라엘이 한 묶음 이라는 겁니다. 즉 아간과 삼십육 명이 별개가 아닙니다.

달리 표현하여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어를 사용하면 지체라는 말입니다. 지체이기 때문에 아간 한 사람의 문제로 인해 전체가 아간화 되어 버린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십니다. 그래서 삼십육 명의 죽음은 개별적 죽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죽음입니다.. 즉 가나안화된 이스라엘로 보시면 됩니다. 여리고성 멸망과 같은 상황이라 보시면 됩니다.

 

한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문제인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 소속인데 왜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에 손대면 안됩니까라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쳐진 물건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됩니다. 진멸입니다. 가나안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진멸입니다.

심지어 구별하여 바쳐진 금과 은, 동철기구도 진멸입니다. 그래서 훔친 금과 은을 아간과 함께 진멸해 버립니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 여리고 전투로 취해진 금과 은 같은 것들은 진멸되어야 된다는 차원에서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어 이스라엘과 함께 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집 곳간에 이것들을 두었다는 것은 가나안 족속들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일종의 심판의 카드입니다. 이스라엘은 진멸을 늘 함께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간이 동원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한편임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되지 하나님과 한편이 되었으니 이제 내가 원하는데로 하나님과 맞먹어도 되겠다고 하면 진멸입니다. 진멸당하면서 이스라엘됨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되니 세 번째도 이해가 되지요. 아간은 본래 어디소속이라는 말입니까?

진멸되어야 될 가나안소속이라는 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애굽 소속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애굽의 지체였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본래 애굽의 지체였던 자를 이스라엘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지체임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잘라 버립니다.

 

잘라 냄으로서 잘려 나간 자도 이스라엘의 지체임이 드러나고, 잘려 나가지 않은 자도 그 과정을 통해 어린양의 피를 다시 생생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13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온 몸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는 깨끗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팔자가 누구인지 아셨기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룟유다 이지요.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자살했습니다.

이제 아간 같은 구약적 사건이 신약으로 넘어 오니 이런 식으로 바뀝니다. 물론 구약에서는 아간이 지옥갔다는 말을 못합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가룟 유다는 지옥 갔습니다. 이게 구약과 신약의 다른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간 같은 자, 가룟유다와 같은 자로 드러납니다.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도 자신들은 살기위해 발부둥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자신들은 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별개도 주님께서 배후에서 작업하신 별개였습니다. 그들의 아비는 마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별개라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런 자들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랑으로 구출해 주셨습니다. 물론 가룟유다만 빼고 말입니다.

 

구출해 주셨는데 그들이 가룟유다와 달라서 구출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룟유다와 똑 같기 때문에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담대하게 전하게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는 제자들의 위치를 항상 가룟유다, 애굽의 위치에 두고 일을 하십니다. 이렇게 한 묶음으로 만들어 놓고 일을 하시는 겁니다.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진멸하는 방식이 은, , 동철은 하나님의 집 곳간에 두라고 하시고 나머지는 불사르고 죽이는 방식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는 어디 묶음에 속했는냐를 보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에도 똑 같은 방식으로 적용하시어 일하십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이 불에 타 없어질 것을 옆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우린 아간 같은 짓을 하지요. 돈이 나를 살린다. 내 자식이 나를 살린다. 내 남편이 나를 살린다. 교회가 나를 살린다 등등.

 

이렇게 십자가는 성도들의 위치를 항상 애굽에 둡니다.

그래야만 십자가의 피가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나오고 창기의 지체가 나옵니다.

세상은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묶음이냐 창기의 묶음이냐? 이 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디묶음입니까? 이렇게 말하면 나는 둘 중 하나라고 대답합니다.

 

창녀와 합하는 자는 둘이 한 육체가 되고,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하시니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는 내가 어디에 소속일까 답을 찾으려 합니다.

 

아간을 보면서 아간처럼 살지 않아야지. 가룟유다를 보면서 가룟유다가 되지 않아야지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창녀와 합하지 않아야지. 창녀와 한몸 되면 안돼라고 결심합니다.

 

본능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의 지체라면 창기의 지체를 만들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그런데 접붙이는 방식이 있습니다. 로마서11장에 나오지요.

잘라내 버리고 접붙이는 방식으로 지체를 만듭니다. 이게 불가능하다고요. 구약에도 나왔잖아요. 기생라합은 접붙임 당하고 아간은 잘려 나가고. 구약성경에 많이 나오지요. 물론 그림자로 보여 주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출발점이 내가 아닙니다. 출발점이 나가 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잘려나갑니다.

그러나 출발점이 십자가지신 주님이 되면 결단코 잘려나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창기의 지체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앞서 음행한 자를 잘라내라고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17,18장을 보면 음녀가 나옵니다. 왜 계시록 이야기 하느냐고요? 구약 성경이 그렇습니다. 율법에서는 음행이라 말씀하시지만 그 음행이 역사가 흐르면서 우상숭배로 바뀝니다. 달리 말하면 돈 숭배로 바꾸어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신약 성경도 똑 같습니다. 마태복음이나 고린도 전서 같은 경우 음행이 남녀간의 문제를 말씀하지만 그것이 계시록으로 넘어가면 돈 숭배로 귀결됩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이 음녀를 보고 놀랍게 여깁니다. 달리 말하면 숭배합니다. 즉 돈을 숭배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라고 하십니다.

 

모두가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에 취하는 세상입니다. 돈에 취해 살아갑니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인간 있을까요?

 

며칠 전에 목사가 보이싱피시를 하다 걸렸습니다. 그것도 중견교회 목사랍니다. 그렇다면 사례도 얼마정도는 나올텐데 얘 학원비 보태려고 그랬답니다. 사례를 좀 맞추어 주든지 아니면 형편에 맞게 학원에 보내든지. 교인들은 형편에 맞게 학원에 보내시지 왜 그러셨습니까라고 할 것이고, 목사는 사례를 좀 넉넉하게 주시지 왜 그러셨습니까라고 할 겁니다.

 

두 쪽 다 복음엔 관심 없고 돈에 취해있기 때문에 이런식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만들고 있습니까? 창녀와 합하는 한 육체를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주께서 벌게 해 주셔서 번다고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우린 그리스도의 지체와는 너무 거리가 멀어요.

 

그런데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구라입니까? 허풍에 불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말을 할 때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그리스도처럼 사는 삶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마귀적인 생각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들의 생각이지요.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을 증거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보여주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 받은 자는 십자가 지신 분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령받은 사도 바울은 살아가면서 평생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중의 괴수라는 말은 내가 누구보다도 돈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내가 누구보다도 보이싱피싱하는 자입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눈앞에 더 밝히 보입니다. 이런 자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나는 자꾸 내 소속이 애굽인 것 같습니다. 말씀 보면서, 기도하면서, 헌금하면서, 전도하면서 그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그러나 창기의 지체는 말씀 보는 자들은, 기도하는 자들은, 헌금하는 자들은, 전도하는 자들은 오히려 자신은 애굽이 아니라고 우깁니다.

 

자기 본능을 숨기지요. 죽음이 무서워 살고자 하는 그 욕망을 기도와 헌금과 전도로, 바르게살기로 감추는 겁니다. 그러고는 나는 천국갈수 있지요. 나 영생 받을 수 있지요라고 하는 겁니다. 창녀의 지체임을 제대로 증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