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31

푸른 섬 2015. 4. 7. 09:17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고린도전서67-11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불의를 행하는 그 행위라는 것이 속인 자도 해당 되지만 속임을 당했기에 그 억울함을 세상 법정에 고발한 자도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사기를 칠 때 사기를 당하고 손해를 당하는 것이 의로운 것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당장 이런 맘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나를 속이든지, 사기를 치든지 해도 참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물론 내가 사기를 쳐도 안 되지요.

 

이럴 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이천 여 년 전에 있었던 고린도 교회를 너무 수준 높게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도 역시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들과 뭔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곤란합니다.

 

우리들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듯이 고린도 교회도 우리와 다르지 않게 오늘 본문을 이해했을 겁니다.

 

지금 우리들 중에 서로 속이는 자가 있고 속임을 당하는 자가 있는데, 주님의 영을 받은 사도 바울이 속이는 것도 불의라고 하고, 그리고 속임을 당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속임을 당한 후에 어떤 처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그 행위가 불의한지 불의하지 않는지 분명히 말씀하신다.

 

차라리 속아 버려야. 차라리 불의를 당해 버려라. 그것이 의로운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 몸과 만나면 우리 몸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율법을 만나는 우리 몸은 항상 그 법에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법에 비추어서 내가 불의하냐 불의하지 않느냐?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을까 받지 못할까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항상 법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하는 겁니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에 대해 내 소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그래도 여전히 율법은 율법의 기능을 우리 몸에서 일으킵니다.

 

우린 살고 싶은 욕망, 천국가고 싶은 욕망을 내 몸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습니다.

 

레위기413절 이하를 보면 속죄제를 드려야 할 때를 말씀하십니다.

부지중에 죄를 범했는데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어떤 계기로, 즉 어떤 사람이 깨닫게 해 주면 속죄제를 드리면 죄 용서해 주신다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참 쉽지요. 부지중에 죄를 범했다. 알고도 죄를 범할 사람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이게 전제 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그게 죄라는 것은 알아요. 그런데 자기 몸이 아벨을 죽여 버린 겁니다. 예가 맞지 않는 것 같나요?

 

민수기 13장에 보면 열두 지파 대표들이 광야 가데스에서 출발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옵니다.

질문 드립니다.

열두 정탐꾼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알까요 모를까요?

 

당연히 알지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모를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이들은 신나게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갑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정탐을 누가 시켰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정탐하자고 한 것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을 내려 그래서 열두 지파의 대표들이 가나안 정탐을 떠난 겁니다.

 

그런데 정탐 보고가 어떻게 됩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이 강하지만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하지요. 그러나 나머지 열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정복은 미친짓이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 소리 지르며 통곡합니다. 소리지라고 통곡하는 이유를 알겁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거죠. 결국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죽었다면, 광야에서 죽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합니다.

 

여러분 상상이 갑니까?

그들 눈앞에 모세가 있어요. 아론도 있어요. 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적들을 자신들이 직접 체험했어요.

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을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알아요.

 

그런데 그들의 몸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죄를 지어요. 다르게 말하면 부지중에 죄를 범한 겁니다.

 

가인의 행동이 이런 행동입니다.

 

자 그러면 우린 이런 생각이 들지요. 레위기 4장에서 이럴 경우를 대비해 죄를 깨닫게 해주면 속죄제 드리면 끝나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전염병으로 쳐서 멸하고 모세를 이들보다 크게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이럴 것 같으면 왜 속죄제를 알려 주셨나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모세가 죄를 사해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드립니다. 달리 표현하면 중보기도 하는 겁니다. 달리 표현하면 모세가 대신 속죄제물이 되는 겁니다. 지금 죄를 깨닫는 사람은 모세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해요. 그러니 죄를 아는 모세만이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우리들 같으면 이미 레위기 4장에서 속죄제 규례가 있으니 모세를 통해 죄를 깨닫게 해 주어 이스라엘 회중이 속죄제를 드리게 하면 될 것 아니냐고 할 겁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약속의 땅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천국 가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천국 가는 방법을 빨리 찾아 그 방법으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속죄제규례를 주신 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을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지중에 죄를 범하는 죄인으로 드러나야 하고, 중보자 외에 어느 누구도 그 죄를 깨닫는 자가 나오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중보자의 기도로, 중보자의 희생으로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중보자의 위상을 제대로 드러내 주는 역할로 그들은 부지중에 죄를 범하는 자로 드러나야 하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지중에 죄를 범하는 자로 만드십니다. 육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어떤 만남을 주선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데스에서 정탐꾼을 보내게 하셔서 아낙 자손을 만나게 함으로 죄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자신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만 자랑하게 됩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중보자가 누군지를 전하는 것이 목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 하지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천국의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들에게만 허락되었다고 하셨지요. 마태복음 1311절에서.

 

그런데 천국비밀을 제자들이 알아들었습니까? 못 알아들었어요. 알아들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발악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16장에서 예수님이 주님이이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베드로가 고백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때로부터 비로소 예수님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신앙고백을 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 역시 베드로가 대표로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절대로 안된다는 겁니다.

 

천국이 비밀 안다고 아는 게 아니에요. 배웠다고 배운 게 아닙니다. 천국의 비밀을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신앙고백 하는 베드로, 십자가의 기를 결사반대하는 베드로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베드로의 육이 예수님의 말씀과 만나지요. 육이 싫어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제공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앞서 고백한 고백의 내용을 부정하는 행위를 합니다.

 

베드로는 사탄이 되어 버립니다. 베드로의 본모습은 육이 제대로 드러나는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십자가 말씀을 하지 않을 때에는 베드로의 본모습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죽음이나, 생존과 직결되지 않을 때에는 우리의 본모습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를 죽음이나, 생존과 직결된 사건을 만나게 하시지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니 뭔가 거창한 것 같지요. 그러나 실상 우리들일 살아가는 순간순간들이 그러하지요.

그러니 우린 주님을 무시하잖아요. 그러니 우린 십자가의 피를 자랑하지 않고 돈을 자랑하고 자식 자랑하고, 내 건강한 것을 자랑하잖아요.

 

저도 풍문으로 들었습니다. 가풍이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집안 곳곳에 부적을 부칩니다. 불길한 것을 제거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가풍이 미신이라고 무시해요. 그러면서 자기 집안의 가풍을 갖고 옵니다. 백일 떡을 입술에 풀칠해 주는 겁니다.

 

내가 잘되고 내 집안에 잘되는 것에 올인하는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나는 속이지 않는다. 나는 속임을 당해서 속아 넘어 가겠다. 나는 결코 불의를 행치 않겠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음행하는 자, 우상숭배 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 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속여 빼앗은 자가 맨 마지막에 배치해 두었지요. 이건 죄의 경중을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속여 빼앗는 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탐욕을 부리게 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해요.

 

우리 중에 탐욕 없는 사람 있나요? 난 없다고 하는 사람 있나요? 돈에 없으면 술에, 술에 없으면 자식에, 자식에 없으면, 가풍에, 명예에 이게 꼭 두더지 게임 같아요.

 

두더지 게임 알지요?

여기 올라와 망치로 내리치면 저기에서 올라오고. 그곳을 누르면 다른 쪽에서 올라오고.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오히려 난 이미 이 과정을 통과 했어.

 

그러니 난 속이는 자가 아니야. 나는 탐욕하는 자가 아니야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입니다.

 

베드로의 육이 육대로 드러날 때 주님의 십자가가 가장 돋보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다고 할 때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의 결정에 전적인 지지를 보냈다고 해 보세요. 그러면 베드로가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 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뭐가 됩니까?

 

우린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이 부활절로 교회들이 지키지요. 지난주가 고난 주일인고. 그래서 사람들은 음식도 먹지 않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해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십자가에 달려 보기도 하고, 손에 못을 박아 보기도 합니다.

 

이런 짓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높여 주질 못해요. 오히려 이런 행위는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드러내지 못해요. 자신들이 훌륭한 사람인데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따로 필요할 이유가 없잖아요.

 

자기 자신만으로도 충분히 천국 갈수 있는데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 필요가 없잖아요.

 

성도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자로 들통 나면서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지를 증거하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