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다니엘강의 제1강b

푸른 섬 2015. 6. 4. 23:44

1b

사과 껍질만 모아 동그랗게 모양을 만들면 그 실체는 없지만 어느 정도 사과 크기의 윤곽이 나옵니다. 사과 껍질을 이어보면 , 이 껍질을 보니 사과 알맹이가 이쯤 되겠다.’라고 눈에 들어옵니다.

 

다니엘은 바로 그 껍질을 보여줍니다. 껍질을 보여 알맹이가 등장하도록 합니다. 그렇게 껍질로 감싸는 역할이 바로 역사입니다. 역사가 없다는 것은 오해입니다. 저보고 역사는 없습니까?’ 이렇게 묻는 교수가 있는데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과 껍질을 보게 되면 그 안에 묵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묵시 즉, 알맹이를 보여주면 그 자체로 묵시가 아니고 역사가 되어 버립니다. 때문에 거기서 알맹이를 보여주면 안 됩니다. 껍질만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했습니다. 도마는 만지고 보고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보이는 눈을 가진 인간은 이미 그 자체가 역사적 존재입니다. 역사적 존재는 항상 역사적 존재만 들끓고 역사와 존재만 온다고 합니다. 사과껍질은 껍데기만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껍데기를 만나는 가운데 안쪽의 묵시에 의해서 껍질이 발생된다는 사실을 감 잡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껍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걸 허황되게 봅니다. ‘이거 뭐 똑같은 사물을 보고 그건 그냥 우연이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껍질로 보는 자는 아니야, 주님이 하신 거야.’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자는 아무리 봐도 주님이 하신 걸로 안 보이는데, 어디서 주님이 나와이렇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 중에 하나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디오피아 내시입니다. 이사야 53장 성경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받는 주인공이 누군지 알지 못했습니다. 빌립 집사가 와서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했을 때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질문을 합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이 고난 받는 종이 이사야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할 때 그 분이 바로 얼마 전에 돌아갔다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껍질이 아닌 사람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안에 동그란 뭐가 있다고 생각하고 껍질로 이렇게 동그랗게 쌌다고 생각한다면 이디오피아 내시가 보이지 않지만 사과를 통해서 껍질을 보게 됩니다. 빌립 집사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껍질로 보니 둘 다 같은 껍질로 만나게 됩니다.

 

안쪽의 사과를 모르면 도무지 알수 없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 예수란 말이 안 나옵니다. 연결이 안 됩니다. 빌립집사는 성령에 충만했습니다.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보이지 않는 실체가 보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 축구공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상대도 그렇게 될 때 예수 안에서 서로 봅니다. ‘이렇게 우리는 다 같이 껍데기에 불과합니다.’라고 합니다. 주님이 만들어 가시는, 주님이 칼질해서 벗겨놓은 또 벗겨 놓은 사과껍질입니다. 우리가 죽고 난 뒤에는 성령께서 예수 믿는 사람을 또 껍질로서 벗겨 놓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도 우리와 같이 그리스도만 증거 하게 됩니다.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누구하고 이야기합니까? 베드로하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제자들은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일종의 하나의 역사적 인물로 봤습니다. 묵시적 인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라면, 역사적 인물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계시면 다른 곳은 예수님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덩치가 있고 키가 있고 몸무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방을 나가버리면 이쪽은 예수님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 왕의 신하가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니까 거기 계시지 말고 걸어서 이동해서 그 몸체가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 아들한테 손을 얹으면, 같은 역사적 인물이니 손을 대면 병이 낫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네 아들은 이미 나았다.’고 하셨습니다. 나았다는 말씀을 듣고 신하가 믿었습니다. 이것이 이상합니다. 어떻게 믿느냐 말입니다. 방금 예수님보고 오셔서 손을 대야 병이 낫겠다.’ 했는데 역사적 인물이 오지도 않았는데 나았다는 말은 말이 안 됩니다. 믿고 가보니 말씀하신 그때에 병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도대체 너희들은 기적과 표적이 아니면 믿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이 어떻게 말로 설명이 됩니까? ‘어떻게라고 묻는 자체가 내가 아는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예수님을 역사적 사실로 표현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역사적 표현력에 담기지 않습니다. 사과껍질은 사과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사과껍질에서 사과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감 잡았을 뿐입니다.

 

주님에게서 나온 믿음만이 주님에게 인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믿음 만들어서 주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사과에서 나온 껍질만이 우리가 나온 사과 본체로, 알맹이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로서 감사하게 됩니다. 지금도 주께서는 사과를 계속 깎고 있습니다.

 

묵시를 설명할 때는 묵시가 역사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묵시가 만들어 낸 역사적 흔적들이 다니엘에 깔려있습니다.

 

역사와 묵시의 차이점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하고 어려운 부분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우리 형은 의사다.’는 표현은 이 세상에서 역사적인 우리 사회에서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 형은 의대 나와서 지금 의사다.’ 역사적으로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사 자체가 묵시를 만나게 되면 이게 몽땅 틀린 표현이 됩니다. 묵시를 표현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틀렸다. 죄다. 부족하다. 미흡하다.’가 됩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원인과 결과를 역사에서 찾아냅니다.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정지된 매직을 던집니다. 2바퀴 돌았습니다. 역사에서는 매직이 2바퀴 돈 것의 원인을 내가 팔에 에너지 힘을 줘서 돌리기 때문에 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 매직은 2바퀴 돌았다.’라는 식으로 역사적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묵시적으로는 이것이 맞지 않습니다. 역사는 ‘~~~~.’ 가 될 때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묵시에서는 2바퀴 돈 원인을 지상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찾으면 안 됩니다. 내가 밥을 숟가락을 들고 먹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됩니다. 그러나 묵시에서는 숟가락을 드는 것도 내 힘이 아니고 입에 들어가는 것도 내 힘이 아닙니다. ‘숟가락 들었다. 밥이 넘어갔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묵시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숟가락을 들어 밥을 뜨니까 밥이 넘어갔다.’ 이렇게 되면 이건 역사적 산물이 됩니다.

 

내가 이만큼 된 것은 모두 내 덕이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역사적 산물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고린도전서 1510절입니다. 이것이 묵시가 됩니다. 쉬운 것 같지만 무진장 어렵습니다. ‘나는 너 때문에 못 살겠다.’라고 하면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됩니다. ‘나는 네가 못살게 굴기 때문에, 못살게 구는 너도 묵시적 존재고, 못살게 당하는 나도 묵시적 존재고, 너는 나를 핍박했고 나는 핍박 받고.’ 원인과 결과가 성립이 안 되는 이것이 묵시적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꿉니다. 느부갓네살이 평소에 그동안 멋진 꿈꾸려고 애를 많이 썼기 때문에 꿈을 꿨다면 느부갓네살은 역사적 인물로서 마감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 나 꿈 꿨어. , , 별이 나한테 절했고 볏 집단이 나한테 절했어.’ 이런꿈을 얼마든지 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형들이 화를 냅니까? 형들은 그것을 역사적 꿈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역사적 꿈으로 보지 않고 묵시로 봤습니다. 때문에 요셉이 속해 있는 층, 포지션과 요셉의 형이 속해 있는 포지션이 차이난다는 것을 형들이 감을 잡고 화를 낸 것입니다. ‘이게 건방 떨고 있어. 어디서 건방 떨고 있어.’

 

소년 다윗이 골리앗 전쟁 때 나타났습니다. 다윗의 형들은 골리앗을 못 이긴다고 합니다. 요셉의 형들이나 사울 왕은 역사적인 것에 속한 인물이기 때문에 골리앗을 이기려면 골리앗을 이길만한 더 힘 센 장수가 있어야 됩니다. 골리앗을 이기려면 더 큰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나야 이긴다는 것이 우리 몸에 익혀 있는 역사적인 논리 구조입니다. 거기에 소년 다윗이 등장했습니다. 그러자 골리앗이 젖이나 더 먹고 와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다윗이 골리앗 만나는 그 역사적 사건을 묵시적 상황으로 바꿉니다. 너희들이 해석할 수 없는 약속의 개입이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약속은 역사적인 것으로 알고 있는 그 곳에 묵시적인 사건으로 침범하고 침투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처형당한 나무입니다. 종교적인 나라에 종교적으로 대들고 반항하다가 민중들이 화가 나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종교적 나라는 정신세계가 혼란스러우면 나라꼴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김일성 동상을 무너뜨렸다. 북한은 용서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정신으로 김 일성 동상은 우상이기 때문에, 신이기 때문에 안 용납이 안 됩니다.

 

역사 속에 계속 묶이게 하는 것은 악마입니다. 악마는 묵시를 역사로 바꿔놓고 역사에서 못 벗어난 채 묵시를 바라보게 합니다. 역사에서 나온 묵시와 묵시에서 나온 묵시가 다르다는 그 점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거 모르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갖고 계속 우려먹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고방식 갖고 있는 묵시는 가짜묵시입니다. 그것은 옛날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구름 타고 오실 것이다.’라면서 기다리면 뭐 합니까? 이미 왔는데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꾸려면 다니엘부터 바뀌어야 됩니다. 다니엘부터 감 잡아야 됩니다. 내가 있는 포지션이 보통 포지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유일신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신과 비교한 나만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른 편에 주님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등장은 사람 눈에 안 보입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신은 유일신입니다. 따라서 신이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 우편에 등장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이 유일신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만 잘 섬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튀어나온 신을 또 섬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윗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 때문에 나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고 목욕하는 여인을 내가 겁탈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다윗 언약으로 다윗의 행위를 사과껍질로 연결시켜 버립니다. 연결시켜 버리니 다윗과 밧세바에서 태어난 애가 죽습니다. 죽고 난 뒤에 다윗은 눈물을 쓱 닦고 그 다음부터는 애통하지 않습니다. 그 뒤 여디디아, 곧 솔로몬이 태어납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이 한분인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그 하나님을 철떡 같이 믿고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서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다윗의 역사적인 사건 속에 나타내셨습니다. 묵시적인 사건화 돼 버린 다윗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인생 자체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 죽었다가 솔로몬 되는 이러한 사건 속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알았던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을 앞장 세워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 말씀 지키면 되죠?’ 이랬던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갖고 논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안에 십자가 사건을, 묵시적 사건을 일으키면서 나를 십자가에다 푹 집어넣어 삶듯이 우리 자체가 푹 삶기게 하십니다. ‘! 내가 죽어도 마땅한데, 돌에 맞아 죽어도 마땅한데 내가 이렇게 살았네, 살았네. 누구 때문에? 우리 주님 때문에.’ 그래서 새로운 하나님, 새로운 주 예수라는 새로운 주님을 우리로 하여금 증거 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아니구나! 십자가야, 십자가! 이렇게 바뀌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해석하라고 했을 때 다니엘은 절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 같은 경우에 꿈을 해몽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여전히 갇혀 있을 때 절망입니다. 그 절망, 그 절망이 바로 역사에서 묵시로, 묵시에서 역사로 넘어 가는 다리가 됩니다. 저쪽으로 넘어갈 때 반드시 절망의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십자가로 된 좁은 길 아니면 영생은 없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절망을 해야 됩니다. 노예에서 결코 자기 힘으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모세가 애국자 안중근처럼 해서 노예해방 하면 안 됩니다. 절망을 경험케 함으로 말미암아 너는 묵시적 존재에 속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과껍질로 이 세상에서 다루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게 있습니다. 우리가 묵시적 사건으로 다루어지면 그때부터 우리의 몸 때문에 그 묵시가 사과껍질이 아니라, 우리자신이 사과로 변하는 수가 생깁니다. ‘나는 묵시야, 묵시야, 나는 묵시 사람이야, 예수 안에 있어서.’ 이렇게 까불기 시작합니다. ‘이제 내가 하는 뭐든지 선한 것이고 내가 하는 일은 주와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의 일은 뭐든지 성령이 하는 일이야.’라고 합니다. 완전히 교주가 됩니다. 묵시가 졸지에 역사로 바뀌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했습니다. 다윗이 왕 되고 나서 우리야 처단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 믿으니, 율법 다 아니, 자기는 왕이니, 자기는 묵시적 존재니까 뭐 걸릴 게 없습니다. 시편 보세요. 전부 다 계시 받고 한 예언입니다. 그런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원수가 되는 그 모습 자체가 다윗은 이미 묵시적 존재에 포함 돼 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묵시적 사건 속에 그는 이미 한 연극배우로 포함이 되었습니다.

 

묵시를 역사화 시켜서 내가 소지할 수가 없다는 걸 명심해야 됩니다. 어제 은혜 받았습니까? 그 은혜 오늘까지 유효하지 않습니다. 늘 우리는 새로운 절망과 그 절망 속에서 비취는 주님의 새로운 구원의 손길을 붙잡아야 됩니다. 실제로는 늘 우리가 잡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먼저 잡게 하십니다.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의 꿈 이야기는 솔직히 말해서 절망입니다. 그리고 죽어야 됩니다. ‘다니엘아, 너 똑똑하지? 어제 내가 꿈 꾼 것 네가 기억나도록 해봐라.’ 이것은 다니엘이라도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역사적으로 원인이 되어 어떤 결과를 낳겠다는 논리 자체가 주님의 묵시 앞에서는 안 통합니다. ‘주님이 내가 십일조 하면 복주겠죠.’ 라는 것은 안 통합니다. 내가 묵시를 역사로 소지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우리가 절대로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 마르다가 예수님을 잘 대접했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 마리아 편이었습니까? 예수님은 누굴 칭찬했습니까? 마리아보고 칭찬했습니다. 마리아보고 단독적으로 칭찬한 게 아니고 마르다와 비교해서 칭찬했습니다. ‘마르다야, 너는 음식 준비한다고 그렇게 분주한데.’ 마리아는 주님 앞에 턱 받치고 이렇게 앉아 말씀 들었습니다. 얼마나 밉상스러웠겠어요? 그걸 싸가지라고 합니다.

 

칭찬 했을 때 마리아보고 칭찬했지, 마리아 자체를 두고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마르다는 뭘 느꼈습니까? 마리아 앞에서 절망을 느낍니다. 자기 딴아 열심히 준비하는데 이건 싸가지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원인이 되어 나온 모든 결과는 역사일 뿐입니다. 묵시가 아닙니다.

 

묵시가 오게 되면 원인을 내가 세울 수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절망에 빠집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에게 내가 어제 꿈 꾼 거 알아내봐.’ 라고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원인이 돼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하고 같이 동침해도 안 됩니다. 뇌파를 집어넣어도 병이나 알 수 있지 안 됩니다. 블랙박스도 아니고, 안 됩니다. 만일 꿈 블랙박스 있으면 우리는 틀기가 곤란합니다. 대충 아침에 꿈 편집해서 기억나지, 꿈 다 꾼 거 다 그대로 노출되면 낯 들고 못 삽니다. 우리는 항상 기억을 편집하게 되어 있어 천만다행입니다.

 

다니엘은 자기 자신에게 원인이 없습니다. 우리 같으면 절망입니다. 그런데 그 절망을 다니엘에겐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나에게 절망을 주었다는 말은 주님이 원인이 되어, 묵시적 세계의 내가 결과물로 이미 가입돼 있다는 것, 포함이 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네가 못해, 내가 해.’ 라는 그 업무에, 그 작업에 우리가 이미 하나의 재료로 삽입이 되었다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예수님이 12제자와 다니면서 하는 일이 그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걸 이해를 못했습니다. 물 위를 걷기도 하고 오병이어도 하고,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원인을 내가 뭘 했어? 내가 뭘 해서 이런 복을 받았지?’ 자꾸 역사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기적 일으켰다는 소문 듣고 하는 말이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면 당신을 메시아로 믿겠다.’고 나왔습니다. 이처럼 기적을 우리가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이 되면 이미 우리는 우리가 원인이 되어 믿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안 보여줘하는 것이 아니고 요나의 기적을 말씀합니다. 절망입니다. 죽음입니다. 네가 죽는다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너는 안 죽고 싶지? 내가 죽여줄게.’ 이게 기적입니다.

 

나는 안 죽고 싶어요.’ 이게 원인이 되어서 더 살고 싶다는 것은 역사적인 우리 인생관입니다. 그런데 주께 포함된 사람은 그것이 허용 안 됩니다. 우리는 살고 싶어도 죽어야 됩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죽고 싶어도 계속 살려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보다 더 무서운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살려내는 그 순간부터 내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너 죽었는데 살았어. 더 이상 네 것이라고 하지 마.’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이제는 그때가 좋았지, 그게 없어져 버립니다. 이제는 무조건 살았어. 무조건 살았으니 앞으로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건 주님이 원인이 된 것이기 때문에 감당이 안 됩니다.

 

그러니 어제 가 오늘 가 아닙니다. 어제 따로 있고 오늘의 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 형은 의사이다.’ 가 아닙니다. 우리 형 + 의사 입니다. 어제 나도 나고, 오늘의 나도 나고 내일이 되면 내일 죽을지 모르지만 내일되면 나입니다, 영어로 and, and, 무엇 그리고 무엇 그리고 무엇 그리고, 이것이 묵시적 논리입니다.

 

역사적 논리는 무엇은 무엇이다.’ 입니다. 무엇이 원인이 되어 이런 경우가 나온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묵시적 원인은 역사 속에 없습니다. 그냥 만들어진 사과껍질만 열쇠고리처럼 이어지고, 이어지고 할 뿐입니다. 그래서 다니엘 보면서 우리도 이렇게 하자.’ 그런 소리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70년이란 포로기간을 정해 준 것도 주께서 묵시를 보여주기 위한 적합한 기간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70년이라 하는 것은 조금 전에 이야기한 완성의 기간입니다. 결국 70년이 나중에 70이레로 바뀌면서 다시 셋으로 쪼개집니다. 7+62+1로 분해되면서 7621이레에 쏠리는 방식으로 됩니다. 1이레!

 

1이레, 이것은 다니엘 9장에 나옵니다. 다니엘이 계시를 받을 때 , 다니엘이 70이레 계시 받을 때가 좋았다. , 사자 굴에 나왔을 때 좋았다. , 느부갓네살이 꿈 꾼 것을 자기도 몰랐는데 알아맞힐 때 좋았다.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좋았습니까? 모두 다 다니엘로 하여금 절망케 했습니다. 다니엘로 하여금 더 이상 나는 이미 살려낸 몸이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좋다, 기쁘다, 내가 관리할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되었습니다. 그런 아쉬움? 내 인생 내가 관리할 수 없다는 아쉬움 같은 것. ! ‘주께서 무섭게 다루시는구나.’를 알게 됩니다.

 

다니엘에게 인자야, 장차 1이레를 이루시려고 오실 분이 있다고 하십니다. 1이레를 이룬다는 말은 70이레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70이레를 이룬다는 말은 70년의 의미를 즉, 70년 동안 포로 잡혀야 되는 70년의 의미를 비로소 완성이란 이름으로 알려 줄 그분을 안다는 것이 됩니다. 결국은 그분 있으매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위하여, 그분 때문에 있습니다. 그분을 주님이라고 높이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그러한 논리로 귀결됩니다. 다니엘이라 하는 것은 역사에서 묵시로, 비행기가 이륙하듯이 이륙하는 그 논리적 전개과정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어떻게 역사적 땅에서 묵시적 약속의 땅으로 도약이 가능한가? 그건 짐승이 등장하고 그 짐승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그 짐승을 극복하고 거기서 이겨낸 그 인자의 왕국이 등장함으로써 역사에서 묵시로의 도약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풀이하면 묵시에 있는 분이 역사적 인물로 길게 늘어뜨렸다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묵시적 세계에 있던 그분이 이 땅에 발을 길게 놓았습니다.

 

이것을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이 보여줬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은 바벨론 시대에 필요한 금신상입니다. 머리는 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철이고 발은 철과 진흙이고,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눕혀 버립니다. 하늘까지 높아지겠다는 금 신상을 눕혀버리니, 역사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역사에서 역사로 계속 이어질 뿐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식으로 하늘나라가 이 역사 속에 개입을 합니다.

 

땅과 하늘 사이를 꽉 차게 잇게 만든 금 신상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면 자빠집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늘은 역사 끝에 있게 됩니다. 이렇게 개입하시는 이분이 진정한 주님입니다. 우상을 발로 차서 우상 끝이 역사 끝으로 조성하기 위해서 개입하신 그분이 바로 주님입니다. 그것을 숫자로 이야기하면 70이레입니다.

 

70이레 나온 근거는 포로로 잡혀가 벌 받는 기간인 70년에서 나왔습니다. ‘유다야 네 손들고 있어.’ 이 말입니다. 너는 손들고 벌 받고 있으면 나머지 모든 해결은 너를 손들게 하신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70이레 만에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완료 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다니엘이 말한 끝을 알려면 세상 전체가 높은 저 하늘나라를 쳐다보며 종교적이고 정치적으로 하늘나라로 나아가겠다는 그러한 분위기가 자꾸 일어나야 됩니다.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나를 하늘로 올려 보내겠다는 그 운동, movement, 종교, 기독교라든지 이런 종교 운동이 맘껏 확산되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하늘나라 먼저 갑니다. 예수님이 유대인 바리새인들보다 세리나 창기가 먼저 하늘나라 간다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기도하고 죄인은 손들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감히 하늘도 쳐다보지 못할 때 세리가 의인이라고 평가 받았습니다.

 

그렇게 되는 근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묵시적으로 오신 그분이 죄 없다.’ 하면 그 순간 죄 없습니다. 현장에서 간통하다 잡힌 여자 보고 나는 네 죄를 묻지 않겠다.’ 하면 어느 누구도 그 여자에게 죄 물으면 안 됩니다.

 

결혼해서 아가씨가 라면도 제대로 못 끓인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그 여자한테 라면 잘 끓이면 내 아내답다는 그 원인을 누가 집어넣었습니까? ‘나는 여자는 라면을 잘 끓여야 한다.’ 는 그 원인을 내 안에 내장돼 있었던 것을 아내에게 요구한 셈입니다. 만약 그러한 심보 같으면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이여, 제가 요렇게 행동하니까 저 예뻐서 구원하겠죠?’ 라고 그 원인을 자기의 선한 행위로서 출발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체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죄라고 아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없습니다. 성령받은 사람만 이걸 죄라고 인정합니다.

 

내가 잘해야 복 받는다는 이것 자체가 죄라는 것, 그걸 인간의 힘으로 고백이 안 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가 잘해야 구원받는다는 이것 때문에 우리 주님 죽었습니다. 이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습관, 버릇, 평생 지니고 가야 될, 평생 나오고 또 나오고 할 수밖에 없는 이 역사적인 그것 때문에 묵시적 존재를 오해하고, 묵시적 존재인 예수님을 오해해서 주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 해결이 다 되었습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역사적 존재라고 하면 문제 해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네가 누구야?’ 라고 하면 나는 내가 원인이 돼서 뭔가 결과를 항상 기대하는 그런 존재. 그래서 나는 죄인이다.’ 이렇게 됩니다.

 

다니엘은 이것을 실생활로 합니다.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그런 환경들을 만들어 냅니다. 다니엘 세 친구는 우상에 절하라 할 때 절 안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우상보고 절하라 했는데 안 했습니다. 그때는 금신상입니다. 금신상보고 절 하느냐 안 하느냐 원인 결정을 니가 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절을 하면 너는 살고, 절 안 하면 너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다 역사적 존재다. 나는 절해서 살았다. 너는 절 안했으니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거기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거기서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다니엘 세 친구는 나는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아는 그런 법칙에 난 동조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는 말이 그럼 죽는다.’ 고 합니다.

 

네가 금 신상에 절 안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죽음입니다. 다니엘 세 친구가 죽게 된 원인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 약속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잠자리채를 하나 준비해 놨습니다. 십자가 잠자리채에 걸리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게 안 보입니다. 그들의 포지션이 세상 포지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우리 자신에 의해서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포지션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세상 포지션은 죽고 사는 것이 자신에게 절하면 살고 안 하면 죽는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죽고 사는 것은 자기하기 나름입니다. 이것이 세상 포지션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보시는 죽음은 주님의 말에 의해서 좀 죽어줘.’ 입니다. 그렇다면 느부갓네살이 절 안하면 죽는다.’ 라는 말은 느부갓네살이 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 백성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느부갓네살을 부린 것입니다. 주께서는 느부갓네살을 부려서 다니엘 세 친구 찾아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역사적인 질문을 던지게 해서 다니엘 세 친구로 하여금 세상적인 죽음을 거쳐 진짜 구원받은 매미채(진짜 죽음)에 걸려오도록 주께서 그렇게 작용을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주께서 불속에서 구원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할 때 이 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절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내가 죽으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가만있습니다. 지금 사무보고 있는데 괜히 절 안한다고 시비 걸어 죽이려고 합니다. 이건 내가 어떻게 손 쓸 수 있는 입장이 안 됩니다. 구원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헌금해서 구원받으면 내가 손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내가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것을 통해서 구원해 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공로는 주님께 돌립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네가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다고 할 때 구원받은 사람은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라고 합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내가 언제 주님을 위해서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언제 내가 옥에 있을 때 돌아보았습니까?’ 라고 할 때 이 소자에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라.’ 고 하십니다. 그러면 , 그때 그 애 하나.’ 이것 아닙니다.

 

주께서 영생 주기로 한 사람은 주께서 버리지 않습니다. 늘 곁에서 천사를 보내든지 성령을 보내서 늘 이런 사태를 일으킵니다. 일으켜서 내가 원인이 안 된 이상한 것이 우리 속에서 발산될 수 있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십니다. ‘내가 이런 놈이 아닌데, 나는 뭐든지 굽신굽신 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런데 그때는 절하기 싫던데.’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내 능력 밖에서 내가 하지 않은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 일들이 사과를 깎아놓은 사과 껍질에 해당됩니다. 묵시적인 껍데기가 우리에게 해당되는 역사가 됩니다. 그 역사는 우리에게 나온 원인이 아닙니다. 주께서 원인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족들과 다니엘 같은 사람들 수천 명이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럼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대부분의 남아있는 사람들은 아주 비천한 사람만 남겨두고 중간 되는 사람들, 군사들은 죽었습니다. 결국 포로 잡혀 왔다는 것은 죽음을 대체한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70년 포로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알아야 될 것은 우리는 이미 죽어 있는 존재다.’ 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죽이십니까? 이것만 알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신 거 여러분 아시죠? 우리가 살아 남아있는 이유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 도대체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 죽으셨는가? 이것 아시면 됩니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역사적 존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묵시적인 사태를 만들어 주시면 ! 이런 것 때문에 우리 살리기 위해서 죽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 우리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막같이 약한 막, 세상도 알고 영적 세계도 알고 간들간들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사태가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보는지 상관없이 주님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저희들이 알고 싶습니다. 다니엘을 시작 하셨사오니 다니엘을 통하여 고막같이 얇은 막이지만 우렁찬 주님의 음성이 나오고 우렁찬 악마의 음성도 같이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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