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아버지의 장례식

푸른 섬 2015. 7. 15. 10:13

아버지의 장례식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내가 살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인사해 본 것도 처음이었다.

친척들과 형들과 누나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 중엔 나와 관련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0.3%정도.

사람들의 관심은 먼저 돌아가신 부친에게 있었다. 어떻게 하다 돌아가셨느냐? 그리고는 곧장 남은 자식들을 위로하기 바빴다.

 

형들과 누나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들도 와서 장례절차에 따른 예배의식이 있었다.

목사님들의 설교를 이렇게 가까이서 들어 보기는 실로 오래 만이었다.

 

인간들의 상식은 장례식과 관련된 예배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배의 중심이 죽은 자와 살아 남은 친척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나 다를까 목사들의 설교는 죽은 자의 신앙을 높이면서 자식들이 그 신앙을 본받아 살아 라는 식의 설교였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능력을 언급하는 것은 기본이다. 바리새인의 성경해석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 들일 수 있고 사람에게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능력, 즉 십자가의 능력을 말한다면 반드시 한 인간의 삶이 부정당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그 삶을 부정하지 않았다.

부족한 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삶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죄인으로 보신다.

죄인을 태어나게 해서 죄인을 살게 하시고 죄인을 죽게 하셔서 모든 것이 십자가 지신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감을 증거하는 죄인의 삶을 살게 하셨다.

 

형들과 누나는 나에게 설교할 시간을 배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주일아침에 예배를 드리자고 요청했고, 무덤에서도 하자고 했다.

 

우리는 나와 관련 없는 사람이 죽으면 그려러니 하지만 나와 관련 있는 사람이 죽으면 발악한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러했다. 그들은 평소 예수님을 믿고 살았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는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 믿음이란 자기 가족을 위한, 자신을 위한 믿음이었음이 드러났다.

 

지금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의 주님이심을 증거하라고, 인생이 흙이며, 죄인이라는 것을 증거하라고 육신의 아버지는 죽으셨다.

 

육신의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딱 잘한 것이 두 가지다. 태어남과 죽음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못한 곳이다. 그렇다면 팔십구세까지 살아왔던 삶은 누구의 삶이었는가? 늘 자신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렸다고 생각하며 늘 앞날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았다. 집을 나설 때 항상 무릎 꿇고 기도했다. 기도의 힘을 믿었다. 새벽마다 새벽기도를 가서 기도했다. 자녀를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물론 교회를 위해 기도도 했다.

 

예수님은 늘 자신 편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니 복음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다. 그러나 목사님이라면 어느 누구나 존중했다.

 

주님이 자신 편이라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병과 죽음을 닥치게 하시면 곤란하다. 그러나 주님은 병들어 죽게 하셨다.

 

확실하게 헛된 삶, 죄인의 삶임을 보여주는 역할, 기능을 하게 하셨다.

 

육신의 아버지가 땅 속에 묻히는 이 순간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주님과 함께 죽었고 주님이 내안에 사는 자로, 일평생 그 주님을 증거하는 사로 살아가는 인생임을 알아라고 우리에게 이런 상황을 주셨다.

 

나의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다. 나의 인생은 주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땅 속에 묻히는 육신의 아버지처럼 헛된 자임을 고백하며 영원히 헛되지 않은 주님만 자랑하자.’

 

 

장례식 다음날 나의 도착과 함께 분위기는 약간 이상해진다.

이미 내가 복음만 말한다는 것을 아는 형제들로서는 내가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나를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초대된 목사들의 설교에 대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예상대로 했다.

 

모든 장례절차를 마치고 마지막 결산을 할 때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예수님만 이야기 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어떻게 예수님만 이야기 하느냐?’

 

그래서 오늘도 목사들은 장례식에 가서 예수님만 전하지 않고 예수님을 전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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