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역사가 되어 버린 십자가

푸른 섬 2015. 9. 16. 20:59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다면 말씀 듣기 위해 시간을 내겠지만 나에게 어떤 이익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시간 바쳐가며 말씀을 들을 이유가 있겠는가?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이나 자든지,

아니면 그 시간에 야구 중계를 보든지,

아니면 그 시간에 장사를 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든지,

아니면 그 시간에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든지,

아니면 그 시간에 남편이나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든지,

아니면 그 시간에 다음에 어떤 장사를 할까 연구하든지,

아니면 그 시간에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를 만나든지,

아니면 그 시간에 나에게 도움이 되는 가족들을 만나든지,

아니면 그 시간에 친구 결혼식에 간다든지,

아니면 그 시간에 아이 학원에 간다든지,

아니면 그 시간에 영화를 본다든지,

아니면 그 시간에 아이 성적 향상을 위해 도움을 준다든지.

 

십자가 복음은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 이미 정답을 아는 이상 더 새로운 것도 더 신기한 것도, 더 놀라운 것도 나올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만나는 현실은 항상 새롭다. 늘 동일한 삶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일생이 주는 압박감은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다. 그래서 육이 부딪히는 현실은 늘 버겁기만 하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집념은 더욱더 강해진다.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좋은 노후,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천국.

 

이것을 위해 오늘도 격렬히 달리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제자리다. 또 제자리다. 제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

 

제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으면서도 육적 몸이 느끼는 것은 항상 새롭다는 것이다.

오늘의 염려가 오늘의 염려로, 오늘의 염려가 또 오늘의 염려로.

염려의 새로움이 날마다 다가오니 십자가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십자가 복음은 시간 날 때, 은퇴해서, 나이 많아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고, 어차피 내 소관을 떠나 있으니 이 얼마나 편한가?

 

그런데 왜 한 가지만 알고 다른 한 가지는 모르는가? 한 날 괴로움을 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한 날 염려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심을 왜 인정하지 않을까? 그러면 참 편할텐데.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으로 가두어 두심을 믿는다면 얼마나 기쁜가? 그 속에서 주님께서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내시는 능력을 맛보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새롭다는 것이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새롭다는 것도 역사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 믿을 것은 나의 땀 밖에 없다.

 

그러나 나의 땀도 주님의 은혜 속에 들어간다. 그런데 믿을 수 없다. 그러니 십자가 복음은 아련하다.

 

그 아련함이 결국 십자가 원수가 된다.

 

십자가 복음을 알았고 그 복음만을 전하든 자들이 더 이상 십자가 복음이 싫어서 떠나간다.

 

십자가 복음은 비현실적이다. 나에게 도움이 안 된다.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다. 내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 믿음이다.

 

내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라는 말도 하나의 구호에 불과하다. 이제 내가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도 전혀 새롭지 않다.

 

그러나 하루하루 육신이 부딪히는 현실은 새롭다. 신기한 일이다. 생존이나 소속감을 위해서나 자아 실현을 위해서는 매일 새롭다. 힘들어도 육신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귀찮아도. 비용도 기꺼이 지불한다. 왜냐하면 늘 새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은 새롭지 않다. 고정되어 버렸다. 과거가 되어 버렸다. 날마다 새로운 현실을 부딪히게 하시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인데 하루하루의 삶에서 십자가를 제거하니 남는 것은 나의 열심 밖에 없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현실화를 자신의 삶과 마주쳐야 하는데 그 어린양의 희생과 자신의 삶은 별개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피 흘린 어린양은 어린양이고 내 현실은 내 현실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내 현실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우상을 맘껏 섬겼다가 진멸 당했다.

 

십자가 복음이 내 현실에 이익을 가져다주는가?

십자가 복음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한다. 주님의 희생만 높이라고 한다. 십자가 지고 따르라고 한다.

짜증난다. 결국 죽음, 진짜 죽음이 무엇인지 증거하다 가라고 한다. 그래야만 진짜 영생이 무엇인지 증거된다고 하신다.

 

난 날마다 나를 긍정하며 살고 싶다. 지금 시대에 나를 긍정하는 방법은 성공밖에 없다.

그러니 십자가 복음은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 어차피 주님이 알아서 하실 일.

 

내 일은 내가 챙기자는 식이다.

 

그러나 내 일 주님 일 따로 없다.

내 일이라 여긴 그 일이 주님 일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 다른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하신다.

긍휼의 그릇은 평생 긍휼을 담는 그릇이요 진노의 그릇은 평생 진노를 담는 그릇이다.

주님의 긍휼을 보여주는 그릇인지 아니면 바로처럼 진노를 보여주는 그릇인지 말씀은 분명 가른다.

 

지금도 십자가 복음은 가른다. 누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인지 누가 그렇지 않은 자인지를.

주님은 지금도 친히 일하고 계신다. 십자가를 앞장세워 자기를 부인하게 하시고 주님만 증거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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