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다니엘 강의 제1강a

푸른 섬 2015. 6. 4. 23:42

가락교회 - 다니엘 강의 이 근호 목사

 

1a

 

다니엘 11절입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에 있은 지 삼 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사람이 사는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에 느부갓네살이 등장한다는 것은 뭔가 절 못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이라 할 때 이 약속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저희끼리 단합대회하고 회의해서 약속의 땅이라고 결정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그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의 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약속의 땅이라고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내막에 대해서 제대로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언약, 약속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하나님께서 의중에 담고 있었던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이 땅하고 결합되어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유다 사람들은 약속의 땅이라고 하니 자기들 살기 좋은 약속의 땅이라고 오해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한 것은 천국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살고 있는 유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좋으면 그것이 마치 천국인양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해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철회하시지 않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애초부터 약속을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래, 니들이 뭘 알아. 하지만 내 약속은 내 약속대로 그냥 밀어붙일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약속의 땅, 이곳이 천국이기 때문에 이 땅은 천국을 보여주는 땅으로서 약속의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살기 좋은 땅을 약속의 땅으로 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한 그것을 보여주는 땅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는 것은 자기가 살기 좋은 땅입니다. 자기가 살기 좋으면 천국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천국은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사람들의 기대와 전혀 안 맞는 대립되는 새로운 어떤 사태나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약속의 땅과 천국을 일치시킵니다.

 

그 사건이 심판사건입니다. 약속의 땅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밀려옵니다. 내가 살기 좋은 땅이 갑자기 괴로운 땅이 됩니다. 이제는 위기의 땅, 죽음을 유발하는 땅입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들어온 것은 그것은 배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약속의 땅에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게 하셔서 우리가 사악한 땅이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인정사정도 안 봐주고 그냥 처벌하고 파괴하고 부숴버립니다.

살기 좋은 땅이 천국이라고? 꿈 깨라. 그건 내가 언급한 그 약속의 의미가 아니야. 그건 니가 일방적으로 오해한 약속이야, 내가 준 약속은 그런 식이 아니야. 너는 심판 받아 마땅함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진정한 약속의 의미를 모르고 약속의 땅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십니다.

 

70년 동안 그들은 포로로 잡혀 가서 70년 포로생활이 끝나면 돌아와야 됩니다. 70년입니다. 69년도 아니고 72년도 아니고 딱 70년입니다. 7 X 10, 7이라는 것을 앞장 세워서 이렇게 10을 해서 70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도 하나님이 진정으로 생각했던 그 약속 안에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710, 이 의미가 70년입니다. 따라서 약속을 숫자로 표기하면 70이란 숫자가 됩니다. 70을 어떻게 지상에, 약속의 땅에다 펼치시는가? 이것이 다니엘 해석의 묘미입니다.

 

약속을 숫자로 표기해 놓습니다. 표기된 숫자가 사태와 사건의 연속의 연결로서 이 땅에 펼쳐지게 됩니다. 여기에서 7이라는 것은 창조입니다. 그런데 그냥 창조가 아니라 완전한 창조를 7로서 표기됩니다. 천지 창조 때 7일 동안 만드시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7일 동안입니다. 8일도 6일도 안 됩니다. 7일 동안 천지창조작업을 완성 하셨다는 것은 완전한 천국의 모습이 이 70년 포로기간 동안에 완성된다는 말입니다. 먼저 70년 동안 복역이 됐다는 것은 죄지어서 포로 잡혔습니다. 즉 오해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은 포로 잡혀서 70년 동안 가만히 있습니다. 70년 동안 수감생활 합니다. 수감생활 한다는 말은 천국 이루는데 일절 보탬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한 쪽으로 치워 버렸습니다. ‘나가, 너는 70년 뒤에 올 거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서 치워 놓습니다. 치워놓고 뭔가 작업해 놓고 다시 거기 들어갈 때 ~!’라는 소리가 나오게 하시는 조치, 그것이 바로 다니엘에 나타난 조치입니다.

 

다니엘에서 그런 작업을 할 때 누구하고 하는가? 일단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방나라 왕인 느부갓네살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그 천국을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달성하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이방나라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와도 모릅니다. 그런 인간이 해야 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인자를 핍박 하는 일입니다. 인자 하면 신약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왔던 그 다니엘을 인자라고 합니다. 그 다니엘을 영적으로, 복음적으로 언약에 의해서 핍박을 해야 될 중차대한 역할이 느부갓네살에게 있습니다. 이 역할을 하면서 느부갓네살은 점차 짐승이 되어 갑니다.

 

사람이 짐승으로 변해 버리면 그 짐승은 결국 창세기에 나오는 뱀의 후손과 연결됩니다. 뱀의 후손은 뱀 같은 속성, 저주받은 속성을 지닌 어떤 인물이 등장합니다. 여기에 뱀과 대비가 되면서 승리자의 모습을 띄는 그 모습을 여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뱀이 영적인 해석이 되면서 덩달아 여자 자체도 영적인 해석을 요구받게 되는 그러한 짝을 이룹니다.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은 분명히 인간인데 짐승으로 변신됩니다. 짐승은 핍박하는 기능을 해야 합니다. 짐승에게 핍박받는 기능은 사람이 아니라 인자가 합니다. 주변의 짐승과 뱀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핍박받는 모습으로 그 여자의 후손이 정체를 드러냅니다.

 

여자가 애 낳았다고 다 여자가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이 먼저 등장하고 그 뱀의 후손에 의해서 여자의 후손이 드러납니다. 그 후손을 통해 여자가 누군지 밝혀집니다. 뱀의 후손에 의해 발꿈치를 상하고, 압박과 고난을 입는 그분만이 바로 유일한 여자의 후손이 됩니다.

 

따라서 다니엘에서 제일 큰 문제가 어떻게 역사적인 사건이 묵시적인 이해와 해석을 유발시키도록 여기서 제공해 주느냐입니다. 그 논리적 과정이 어떻게 정리되는가?

 

1절에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에 있은 지 삼년에” BC 605년입니다. 2, 3, 4차에 걸쳐서 약속의 땅에서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갑니다. 약속의 땅에서는 여호와께 속했던 유대인들이 포로 잡혀 가면서 느부갓네살에게 속합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짐승입니다. 짐승 속에 언약 백성, 약속의 백성이 있습니다. 짐승 안에 약속의 자녀가 들어 있습니다. 약속의 자녀는 여기서 못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자기들은 하나님 안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이 세상을 못 빠져 나옵니다. 우리가 짐승의 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가만히 살면 구원될 이유가 없습니다. 갑자가 요셉을 모르는 바로 왕이 핍박을 합니다.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라는 이유 때문에, 요셉이라는 이유 때문에 난데없이 핍박을 당하게 되니 그들이 부르짖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등장하셔서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같은 경우에 그들은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안 섬기면 풀무 불에 던진다고 했을까요? 다니엘의 세친구나 다니엘 은 업무에 있어서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국가 공무원으로서 정직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믿으면 죽인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다니엘에서 어렵습니다. ‘너 여호와 믿지, 죽어라.’가 아니라 여호와 섬기는 것과 반대 되는 것을 사항을 만듭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는 풀무 불에 넣는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 전부에서 예수 믿는 시간 정하고, 나머지는 일반 농사짓는다고 할 때, 그러면 농사짓고 일요일 날 교회 나오는 것이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바뀌어 농사 짓는 것을 짐승동상 앞에 바치지 아니하면 죽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일요일날 교회 나와 혼자 예수 믿는 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오락, 취미생활입니다.

 

다니엘서에서는 사적인 신앙은 의미가 없습니다. 마귀가 그래, 당신은 신앙생활하고 나머지는 우리끼리 하면 돼.’ 이렇게 허용하는 마귀가 아닙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뱀은 시비 걸 만반의 준비가 다 돼 있습니다. 호시탐탐 때만 노리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짐승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 짐승과 대비가 됩니다. 짐승이 노리는 어떤 특수한 집단이 이 바벨론 안에 들어 있어서 이걸 짓밟게 되는 사태를 하나님께서 유도하셨습니다.

짐승이냐 아니면 여자의 후손이냐? 이 둘 빼고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두 항목중 어느 쪽에 속하느냐? 이것이 현실 전부입니다. 3의 영역은 없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짐승, 여자의 후손을 빼 버립니다. 그래서 세상은 누굴 높다, 낮다 할 수 없습니다. 전부 다 균등하고 서로 평등하고 서로 존중해야 될 그런 이상적인 사회를 꿈꿉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이, 천국 만드는 작업이 남아 있는 이상 그것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차질 없습니다.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천국 만들기에 지금도 쉬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너대로 하고 나는 나대로 그냥 밀어붙입니다. 밀어붙이시는 중에 걸려든 것이 다니엘의 세친구입니다.

 

결국 일이 터져 우상이 등장하니 진짜 믿는 자의 본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극단적입니다. 풀무 불 속에서 만납니다. 그곳에 짐승이 노리고 있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세 사람 들어갔는데 네 번째 사람이 등장합니다. 짐승(마귀)은 압니다. 다른 사람은 이 현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체조하고 레슬링하고 축구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그리스도 있다는 것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예수 안을 질문하는 이유는 자신은 눈에 띄는 예수님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예수 보면 안 믿습니다. 왜냐하면 흠모할만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용가치가 없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에 괜히 봤어, 괜히 봤어. 안 보고 상상해서 믿는 게 낫지. 괜히 봤다.’고 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막이 있는 것을 고막이라 합니다. 귀에 있는 고막 그 고막을 통해서 이쪽 외부에 있는 현실을 해석합니다. 외부에서는 고막이 없으면 그냥 파동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고막을 통해서 두뇌에 있는 안쪽에 들어와 버리면 현실에 있는 모든 물결들, 음파들이 제자리의 의미가 그 안에서 차곡차곡 정립이 됩니다.

 

우리는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회사에 가고 활동하고 주부는 설거지하고 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고막을 통과해서 보면 어느 것이 짐승의 일이며 어느 것이 성령의 일인지가 보입니다. 그 고막 역할을 하는 사람, 그게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고막이 아~주 얇아요. 치면 뚫어지고 째지고 다칩니다. 이 얇은 고막 역할이 이쪽 현실과 저쪽 현실을 전부 다 갖고 있으면서 이쪽 현실을 저쪽 현실로 즉, 영적으로 제대로 해석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그러한 현실입니다. 이 얇은 막, 이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134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주께서 십자가 질 때 약하심으로 죽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지금 다 처단할 수 있는 문젠데 의도적으로 가장 약한 분으로 죽었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이라고 합니다. 저항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얇은 고막이라고 보면 됩니다. 고막 통과하면 예수 안이고, 천국입니다. 고막 바깥으로 나오면 흔히 말하는 우리 현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울려 퍼지는 모든 진동의 해석은 안쪽에서 합니다. 본부에서 약속의 관점에서 해석을 해서 분류작업을 다 해버립니다. 저건 악령의 일, 저건 성령의 일, 다 해석합니다.

 

수사 극에 보면 범인을 잡아 취조하는 취조실이 나옵니다.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고 안쪽에서는 밖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취조실에 갇혀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해석은 우리를 둘러싼 다른 영적 세계에서 합니다. 지금 천사들과 성령께서 또 예수님께서 다 지켜보는 가운데 있습니다. 여기서 사태를 일으키고 거기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조성된 것이 바로 짐승에게 갇혀 있는 남은 자들입니다. 남은 자는 주님의 개입으로 우리는 구원됩니다.’를 증거 합니다. ‘절대로 우리 힘으로서는 이 마귀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자가 남은 자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쉽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힘으로는 이 악마의 힘을 이길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전제로 깔고 해야 됩니다. 사람들이 그걸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제가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마는 그것으로 마귀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라는 그 말을 해야 합니다. ‘제가 교회를 수십 군데 세우고 개척교회 했지만 그건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됩니다.’ 왜 이런 말을 못합니까? 믿음이 없으니 못합니다. ‘내가 십자가를 알고 언약도 압니다, 하지만 그 아는 것으로 구원되지를 못합니다.’ 왜 이런 말을 못합니까?

 

짐승이 우리가 몇 마디 한다고 그것 때문에 아이쿠, 무서워이런 짐승, 이런 마귀 없습니다. ‘웃기네.’ 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위선 떠는 것을 다 압니다.

 

2차 포로 잡혀갈 때, 여호야김 잡혀갈 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잡혀갔습니다. 여호야긴은 대우받는데 아버지 여호야김은 죽습니다.

 

약속의 땅은 그대로 있는데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약속된 백성이 포로로 잡혀 갑니다. 그런데 그 작업에 느부갓네살이 동원됩니다. 느부갓네살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잡아 갔습니다. 바벨론 안에 약속의 자녀들이 들어 있습니다.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약속 + +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땅은 그대로 있는데 씨가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이루는 것이 씨에서 무럭무럭 나온다면 약속의 자녀들이 살고 있는 바벨론 땅이 약속의 씨를 품었다는 이유 때문에, 약속의 땅의 역할을 해야 됩니다. 단 차이점은 부정적으로 해야 됩니다.

 

부정적으로 해야 된다는 말은 느부갓네살이 이스라엘, 유다 때문에 망해야 되는 그런 역할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약속의 땅 역할을 한다는 것은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품은 유대인 때문에 짐승으로 변해야 됩니다. 바벨론이 짐승 됩니다. 바벨론에서 나온 나라도 짐승이 됩니다. 짐승 1, 짐승 2, 짐승 3, 짐승 4가 됩니다. 계속 짐승, 짐승이 나옵니다. 언제까지 계속 짐승이 나오느냐? 짐승에 대비되어 인자 1, 인자 2 인자 3..해서 마지막 인자가 등장할 때 짐승을 지배하고 있던 우두머리가 등장합니다. 옛 뱀이라고 하고 마귀라고 하고 사단이라고 하는 그게 나옵니다. 그 최후의 인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반면에 저쪽의 오야봉은 옛 뱀, 마귀입니다.

 

오야봉 남기고 나머지 다 철거해버리면 결국 남는 것은 여자의 후손과 뱀만 달랑 남습니다. 현실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필요한 악마도 동원돼야 되고 천사도 타락해야 됩니다. 그리스도가 주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역사와 이 땅은 그동안 주께서 창조했다 이렇게 됩니다.

 

원래 구약에는 유일신, 주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른편에서 지지지~직 해서 뭔가 포지션이 하나 나옵니다. 신이 하나인데 신의 오른편에서 지지지~직 나오면 이게 가 됩니다. ‘는 역할이 있습니다. 원수를 발등상 되기까지 우편에 있는 역할입니다. 여기에서 까지란 말은 계속 지속한다는 의미입니다. 끝까지 유지될 때까지, 원수를 지배할 때까지 내 우편에 있어라. 이게 바로 주께서 내 주에게하신 말씀입니다. 다윗이 이쪽 주와 저쪽 주님 둘 다 보고 있습니다.

 

다윗언약이 뭐냐 하면 유일신인데 유일신에서 또 하나의 주가 튀어나오는 해괴망측한 신입니다. 세상에 이런 신은 없습니다. 주 안에 또 주가 있을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주에게서 주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다윗언약에서 다윗 역할은 손 터는 역할입니다.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수 없고 내 원수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다윗 자신이 주의 원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주에게서 나온 주님에 의해서 승리한 자, 장군이 있습니다. 우리야 장군입니다. 우리야 장군을 다윗이 죽였습니다. 그 죽음을 근거로 다윗은 용서받습니다. 두 분의 주께서 일으키시는 모든 내용이 하나의 그림자 역할을 하라고 이 땅에 어떤 흔적을 남깁니다. 우리야라는 역할의 탤런트와 우리야를 죽여야 될 다윗의 역할을 하는 탤런트가 등장합니다. 이쪽은 아람 군대 등장해서 이스라엘과 싸우고, 이쪽은 벗은 여자 하나 나와서 목욕하는 장면이 있어야 되고, 이런 모든 역을 맡은 배역들이 결국은 원수를 이기는 분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온 그 주님만이 주님으로서 원수를 이긴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지상에서 그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도 이 땅에서 살아야 됩니다.

 

다니엘이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바벨론에서 버틴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똑똑했기 때문에 계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꿔서 내 꿈 네가 찾아내라.’ 할 때 다니엘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다니엘도 기도해 보고 알아보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다니엘이 백과사전처럼, 컴퓨터 하드웨어처럼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시를 줄 때 우리가 풀 수 있는 것을 주시지 않고 어떤 포지션만 언급합니다. 난 이런 자리에, 넌 저런 자리에, 둘 사이에 차이나는 포지션만 이렇게 지정해 줄 뿐입니다.

 

그 포지션이 다니엘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존재하고 느부갓네살은 짐승 안에 존재합니다. 다니엘이 예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니엘이 속해 있는 약속 때문에 다니엘을 약속 안에서 다룹니다. 반대로 저쪽은 성질이 더러워서 아니라 짐승 안에 속했기 때문에 짐승처럼 느부갓네살을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을 읽을 때 인간적으로 봐서 느부갓네살이 별로 잘못한 게 보이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갔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그래 내가 잘못했다.’ 제국의 왕으로서 이렇게 스스로 자기 잘못을 자인하는 왕이 그렇게 흔치 않습니다. 그 정도 겸손했으면 구원받을 만도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 보세요. 자기 스승 팔아먹었다고 자살했습니다. 그 인간성 멋집니다. 사나이 중에 사나이입니다. 그런데 사나이 중에 사나이가 되어 지옥 가서 보디빌더 할 일 있습니까?

 

따라서 그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어디에 소속돼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있는 포지션, 어떤 특수한 지점, 그 위치가 그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느부갓네살은 짐승의 위치고 다니엘은 남은 자 위치입니다. 약속은 아직 안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씨를 옮겨갈 때는 약속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약속의 성공을 이루기 위한 내용이 더 확대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를 단일 신으로 봤습니다. ‘우리는 주를 섬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 옆에 주님이 튀어나올 줄 몰랐습니다. 튀어나온 주를 섬겨야 될 텐데 자기는 유일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자신들을 버릴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약속은 주님께로부터 바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은 튀어나온 오른편에 계신 주를 경유해서 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경유한 것을 인간의 능력으로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한다. 이것을 불교신자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뭐가 모자라서 그렇게 하느냐고 합니다. 바로 구원하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이 능력 없어서 비서 하나 들일 일이 뭐가 있느냐고 할 것입니다. 불교신자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도 평소에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의 비서 역할로 주님이 등장한다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할 때 이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마귀가 점지해 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비교해 보라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흠모할 게 없고 우리 하나님은 참 멋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주님은 흠모할 만하다고 합니다. 그런 주님은 가짜 예수입니다. 그건 자기 입맛에 맞는 예수입니다. 진짜 우리 생활에 관여해서 내 뜻대로 되지 않게 하는 주님 만나면 인간들은 학을 뗍니다. 진저리납니다. ‘괜히 예수 믿었어. 괜히 예수 믿었어. 이러면 안 믿을 걸. 괜히 믿었어. 괜히 믿었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믿지 마라.’고 하실 것입니다.

복음하고 부부문제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통해서 자기를 다시 한 번 정립합니다. 저 여자가 다르다고 해 버리면 나는 다른 사람이 돼 버립니다. 지금의 내가 아닙니다. 지금의 내가 있기에는 주변에 많은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고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부부하고 복음하고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모든 개념들은 주님 보시기에 이건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마귀한테 속아 넘어가기 딱 맞는 그러한 인생으로 오늘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도 좋지만 마귀가 뭐라 하면 하고 고개 숙입니다. 예수님이야 뭐 사탄아 물러가라. 난 할 수 있다.’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만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다른데서 유혹이 들어오면 아이쿠, , 잠시 안 믿죠.’이렇게 나옵니다.

 

3을 이길 수 있는 그런 예수님은 없습니다. 3인데 교회 오는 애들은 이미 수능을 포기한 애들, 해도 안 되는데 교회 와서 기도나 해야지 하는 애들입니다. 3은 아무도 못 이깁니다. 그런데 고 3 이기는 게 있습니다. 월드컵! 아시안 게임! 이건 고 3을 이깁니다. 여학생들 신납니다. 여학생들은 스포츠 안 좋아하잖아요. 남학생들은 월드컵하면 공부가 머리에 안 들어옵니다. 그러면 남학생들은 성적 팍팍 내려가고 여학생들은 팍팍 올라갑니다.

 

사람은 내가 나를 주관하고 있는 게 아니고 환경이 나를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깜빡깜빡 잊어버립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점잖게 행동하는 것은 환경이 나를 건드리지 않아서입니다. 환경이 건드린다든지 술 한 잔 들어가면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환경이 바뀌면 술 안 먹고도 술주정 됩니다. 술주정이 되고 횡설수설하고 큰 소리 내고 합니다.

 

다니엘은 그걸 이야기합니다. 현실이라 하는 것은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네 인생은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인생을 정하는 것이다고 하십니다. 네가 정하지도 못하는 인생에서 왜 쓸데없이 고민을 네가 하느냐 말입니다. 고민은 주님이 합니다.

 

제가 어떤 분이 질문해서 답변을 했습니다. ‘신학 공부를 왜 합니까?’ 신학공부는 오락이라 했잖습니다. 오락이 아닌 것은 태어난 것과 죽는 것밖에 없습니다. 태어날 때 쌍꺼풀이 안 됐다. 그건 오락이 아닙니다. 그런데 쌍꺼풀 수술 하면 그게 오락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에게 의미를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은 원수하고 싸우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하고 싸웁니다. 쌍꺼풀 없는 내가 쌍꺼풀 있는 나로 변하기 위해서 빨리 돈 모아 쌍꺼풀 수술 하려고 합니다. 양악 수술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운 것을 따먹지 마라 할 때는 먹고 싶어도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걸 따먹는 순간부터 인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이냐 아니냐는 것은 인간을 만드신 주님이 알지, 내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모릅니다. 우린 몰라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걸 안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 포지션이 우리로 하여금 사람으로 만듭니다. 주께서 정하신 뜻대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주께서 너는 이렇게 돼.’라는 것은 우리의 계획이 아닙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해주십니다. 성령이 그렇게 탄식하면서 기도함으로써 이렇게 되게 됩니다. 이 노선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바로 의롭게 된다 할 때, 우리는 내 노력으로, 내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나의 본성을 우리는 그때그때마다 발각당합니다. 그럴 때 ~! 주님의 공로 아니면 나는 내 의를 포기할 그런 놈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낍니다. 내가 어떤 경우라도, 한강에 자살할 경우라도 자살하는 순간에도 나는 내 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태어난 것은 오락이 아니고 죽는 것도 오락이 아니지만 한강에 뛰어드는 것은 오락입니다. 사업 부도나서 이런 꼴로 부끄러워서 못살겠다 이것도 오락입니다. 오락이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내가 생각한 내 존재 가치의 의미를 나에게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뭐 다들 한 오락들 하시죠? 오락 참 잘들 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그대로 안 죽습니다. 우리는 호락호락 죽을 인간이 아닙니다. 뭐 덮든지 꾸미든지 째든지 붙이든지 위장하든지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민낯, 화장기 없는 얼굴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짐승의 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좀 고개 숙이고 내가 어떻게 하면 살지?’ 이게 없어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는 내가 어떻게 공무원해서 어떻게 해서 살지?’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냥 민낯, 맨 얼굴입니다.

 

 

왜냐 하면 포로 잡혔다는 자체가 이미 죄수 아닙니까? 죄수가 무슨 자기 개성을 발휘합니까? 죄수인데!! 어떤 처지도 주께서 주신 형벌인 것을 온 몸으로 감수합니다. 그냥 죄수 입장에서 그냥 꾸밈없이 주어진 사태에서 공무원 하라면 공무원하고 나가라면 나가고 절해서는 안 된다 하면 안하면 됩니다. 기도 계속하면 되고 다니엘처럼 보란 듯이 문 열어놓고 기도합니다.

 

이런 역사적인 것들이 어떻게 묵시적인 일들로 역사의 이름으로 역사 안에서 어떤 사태로 아주 특이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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