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마태복음 9장 36 불쌍한 자

푸른 섬 2015. 3. 3. 21:36

불쌍한 자

마태복음936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영화를 보면 팔십 아홉 된 할머니가 구십 여덟 먹은 할아버지의 무덤을 보면서 자신은 집으로 가는데 할아버지는 불쌍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우리들은 불쌍하다는 것의 기준이 항상 내가 가진 입장에서 상대를 보면서 불쌍하다고 말합니다.

 

설날이 되면 자식들이 찾아오지 않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불쌍하고, 결혼 못한 사람이 불쌍하고, 취직 못한 사람이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없는 사람도 불쌍하고, 돈이 많아도 자식들이 못나면 불쌍하고, 이 땅에서 불쌍함은 그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목자 없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본적도 없겠지요. 내가 나의 목자인데 어느 누가 나의 목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나름대로 내가 나의 갈 길, 즉 불쌍하지 않는 인생을 살아갈 능력이 얼마든지 있는데, 단지 재수가 없어서, 노력이 부족해서 행복해지지 못했을 뿐이지 조금만 더 참고 노력하면 나도 행복한 인생을 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 대목이라서 재래시장에 가보면 모든 사람들이 각각 사고팔고 하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설 대목에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는 사람에게 혹시 목자가 있습니까? 당신은 불쌍한 사람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지금 대목인데 장사 못해서 불쌍한 사람이지 목자 없다고 불쌍한 사람은 아니라고 할 겁니다.

 

특히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고 기도하고 십일조 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며 살아가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들을 결코 불쌍한 자라고 생각하기 않습니다. 돈도 많고, 힘도 있고 뿐만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신들이 불쌍할 이유가 없지요.

 

또한 자신들이 불쌍히 여겨야 할 대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 외에는 모두 지옥가야 마땅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아 맞아 죽을 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죽었지요. 돌에 맞아 죽는 자신이 불쌍한 사람이지 돌을 던지는 자들이 불쌍합니까?

 

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복음 때문에 돌에 맞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돌을 던지는 사람입니까?

어쩔 수 없이 돌을 던지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들이라 대답합니까?

 

스데반 집사님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천국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스데반 집사님이 보는 눈은 이 땅에 속하여 살아가는 자들의 시각과 전혀 다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누가 불쌍하다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를 보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23:28).

 

도대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중에 누가 불쌍한 자라는 말입니까? 육에 속한 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여자들은 자신과 자신들을 위해 울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당사자들임을 알지 못해요.

 

지금 당장 사형수로 죽는 예수님이 너무나 불쌍할 따름입니다. 내 자식은 집에 멀쩡히 잘 있으니 울 일이 없다. 직장 잘 다니고, 공부 잘하고 결혼 생활 잘 하니 울 일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자식 공부 잘하고, 결혼 생활 문제없고, 돈 잘 벌고, 직장 좋고, 퇴직연금 꼬박꼬박 잘 나오면 울 일이 어디 있습니까?

자식들이 갑자기 죽든지 아니면 80여 년 동안 함께 산 남편이 죽든지, 그런 일이 일어나야 울잖아요. 자기가 자신을 불쌍히 여기잖아요.

 

그러지 않는 이상 자신이 불쌍한 자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불쌍한 자에서 벗어나 버립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면 불쌍한 자리에서 벗어나 불쌍하지 않는 자리에 앉게 됩니다.

 

누가복음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오지요.

왜 세리 자신이 불쌍한 자입니까? 돈을 떼어 먹어서일까요?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자신이 불쌍한 자라고 할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 세리가 정직하게 타인을 괴롭히지 않고 살았다면 뭐라고 기도하겠습니까? 당연히 바리새인처럼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얼마나 제대로 살았는가를 나열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의롭게 된다는 기준이 얼마나 겸손을 떨고 낮추느냐가 되어 버립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 한 둘입니까? 우리도 천국가기 위해 얼마든지 세리처럼 기도할 수 있잖아요. 천국 가는데 그것 하나 못하겠습니까?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라면 그 사람이 세리가 되었든 바리새인이 되었던 자기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인정합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 고백이지요. 그러면 도대체 어떤 상황이길레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겁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 설 때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말이 나옵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지 않는다면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없어도 얼마든지 살아 갈수 있다면 그런 사람이 어떻게 불쌍한 자이겠습니까?

 

요한복음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열두 제자만 남았습니다. 남은 자들이 불쌍합니까? 떠나간 자들이 불쌍합니까?

 

떠나간 자들이 아니라 남은 자들이 불쌍한 자들이죠? 가룟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성령 받은 후 어떻게 살아갑니까? 자기의 원함과 늘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게 불쌍한 삶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을 때 우리들은 어떤 생각부터 하게 됩니까?

무리들이 돈이 없다. 옷이 없다. 집이 없다. 직장이 없다 그런 것을 떠올립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돈 없으면 돈을 주시고, 건강하지 않으면 건강을 주시고, 직장 찾으면 직장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은 자신이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왔는데 이 땅 인간들은 목자를 다른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돈이 나의 목자요, 건강이 나의 목자요, 예배당이 나의 목자요, 결혼이,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나의 목자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아무리 쫓아가도 결국 죽습니다. 결국 죽는 다는 것은 그게 목자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죽음이 끝이 아니지요. 그 죽음도 그림자입니다.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죽은 남편의 무덤을 보면서 불쌍하다고 하는 것은 영원한 심판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할아버지를 성도라 했어요. 교회가 그 할아버지 집에서 가까이 있었어요. 목사는 등장하지 않지만 목사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개와 관련되어서만 나와요.

 

개가 없다면 목사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목사가 무엇을 전했는지 모르지만 전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만 그 할머니에겐 진짜 불쌍한 것이 없어요.

 

진짜 불쌍한 것은 자식 키워도 자식들 소용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설날이 되면 자식들이 부모들을 어떻게 모시느냐를 갖고 싸움도 일어나고 하지요. 그 영화에서도 나옵니다. 밥을 몇 번 해 줬니? 전화는 몇 번 했니 그러면서 형제간에 싸움이 나지요. 그런 모습을 봐야 하는 부모가 불쌍합니까?

 

그거 불쌍한 것 아닙니다. 성도가 만일 그런 것이 불쌍하다고 해 버리면 주님의 불쌍히 여김을 조롱당하는 겁니다.

 

우리가 불쌍히 여기는 것이 따로 있다면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불쌍히 여김 속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신은 지금까지 주님께 열심히 기도했고, 간구 했고 성경책 열심히 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의 좋은 상황을 주셨다는 겁니다.

십자가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요. 왜 그렇습니까? 경제적 형편이 어렵고, 건강하지 않고, 자식이 애를 먹일 때 불쌍한 자이지만 이런 것들이 해소 된 상황에서는 더 이상 자신이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간증들이 이런 것들이잖아요.

 

성도들을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들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십자가의 피 용서가 한없이 작용하는 그런 자들이라는 겁니다. 성도는 그 불쌍히 여기신 분을 전하라고 불쌍한 자리에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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