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생존에서 꽃피는 생명

푸른 섬 2014. 12. 20. 15:43

생존에서 꽃피는 생명

생존의 터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여기에서 텃세를 부리고, 저기에서 텃세를 부린다.

 

여기 저기에서 외친다. 텃세를 해결하려면 그들의 좋아하는 것을 주라.

 

이미 생존의 터에는 앞선 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완장을 찬 그들은 쉴 새 없이 그 권력을 휘두른다.

 

그 권력 앞에 아무른 연고도 없고, 가방도 없는 자들은 의지할 곳 하나 없다.

 

앞엔 홍해가 가로 막혀 있고 뒤쪽엔 바로의 군대가 쫓아온다.

 

믿음 있는 자라면 뭔가를 기대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문제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이다. 여호와께서 친히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결과가 앞에는 홍해요 뒤엔 바로의 군대다.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 원망 외에 무엇이랴?

 

 

어린양이 피 흘릴 때 자신도 함께 죽었다는 믿음이 있다면 본래의 자리가 죽음의 자리니 무엇이 두려울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5).”

 

말씀은 생존의 현장에서 믿음 없는 자로 발각 나게 할 뿐이다.

 

원망이 있는 곳에 믿음이 생겨난다. 그 믿음이란 주님이 만들어 내신다. 결코 인간 자랑 하지 못하고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만 자랑하도록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사탄이 왕노릇 하는 곳에 살게 하신다.

 

우린 광야를 벗어나고 싶어 안달 난 인생들이다. 광야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광야가 없다면 주님의 십자가는 빛을 보지 못한다. 광야가 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고 높고 크기가 제대로 드러난다.

 

처음부터 자신의 결정과 상관없이 광야로 내몰린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에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자신들이 만들어 낸 환경은 없었다.

 

모든 환경은 주님이 조장하셨다. 그 환경을 조장하신 주님은 그곳에서 죽임당한 어린양의 피의 위력을 돋보이게 하신다.

 

항상 기뻐하지 않는 이스라엘,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이스라엘,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그들 속에 우리가 담겨 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를 항상 기뻐하는 자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자로, 범사에 감사하는 자로 만드시는 현장을 생존의 현장에서 체험하게 하신다.

 

생존의 현장은 오히려 생명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드러내는 바탕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래서 성도는 광야에서 살아야 한다. 광야생활이 없는 자는 이스라엘이 아니요 성도가 아니다.

 

광야는 예수님의 생명을 꽃피게 한다. 그 생명 속에서는 두려움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섬광처럼 밝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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