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창세기41장1-13

푸른 섬 2007. 7. 16. 12:44
 

언약대로 되어짐

창세기41장1-13

술 맡은 자가 복직된 지 만 2년이 지났습니다.

요셉은 여전히 감옥에서 죄수들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41장14절을 보면 요셉이 수염을 깎고 그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오니 라고 합니다. 감옥에서 죄수로 있다가 왕 앞에 서게 되는 모습입니다.

상상이 갈 것입니다.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자신이 하숫가에 서 있는데 아름답고 살지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가 갈밭에서 뜯어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뒤에 또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게 하숫가에 섰더니 그 흉악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찌 일곱소를 먹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든 바로가 또 꿈을 꾸었습니다.

이번에는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세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 버렸습니다.


잠을 깨어 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번민했습니다. 평소에도 꿈을 꾸었지만 이번에 꾼 꿈만은 예사롭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의 술객과 박사를 모두 불러 그들에게 꿈을 고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술객은 주술적인 것을 그리면서 점을 치거나 마술을 부리는 자들인데 특히 이들은 재능을 갖고 해몽을 하기도 합니다.


박사는 과학과 예술, 신탁(oracle)과 해몽 등과 같은 일에 관계하였던 애굽의 현인(賢人)들을 가리킨다.


그러니 평소 이들은 왕이 꿈을 꾼 것에 대해서 너무나 해몽을 잘하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꾼 꿈에 대한 해몽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저들도 나름대로 해석은 했을 것이지만 결코 바로의 마음을 흡족히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 꿈으로 인해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소개하게 됩니다.


바로의 꿈을 요셉이 아주 간단 명료하게 해석합니다.

일곱해는 대 풍년이 들고 그 후 7년은 대 흉년이 든다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흉년이 너무 심해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왕에게 33-36절을 말합니다.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치리하게 하시고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국중에 여러 관리를 두어 이 일곱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 관리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에 적치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해 흉년을 예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을 인하여 멸망치 아니하리이다”


요셉은 꿈의 해몽뿐 아니라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까지도 알려 줍니다.


바로 왕이 왕인것 같지만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죄수의 몸으로 애굽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16절을 보게 되면 요셉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 모두가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요셉이 그 꿈을 해석하기 전에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왕에게 아부를 하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뒤로 가보면 요셉의 이 말이 굉장한 의미를 갖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어 애굽에, 바로에게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평안을 가져다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시고 그 꿈을 꿈 해몽전문가들도 결코 해석할 수 없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요셉 중심, 아닙니다.

세상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요셉을 애굽으로 팔려 보내시고, 감옥에 갇히게 하신 것입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뭇별같이 많게 하리라는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요셉을 지금 이런 상황으로 몰아 넣어시고,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술객이나 박사들도 해석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보면서 무엇 중심으로 봅니까?

사람 중심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 중심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보면서 자꾸 사람중심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게 되면 성경 말씀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 언약 중심으로 보아야 모든 구절구절들이 제대로 해석되어 질 수 있습니다.


13년의 세월을 종으로, 죄수로 보내는 것도 인간중심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약중심으로 보게 되면 언약의 완성자이신 주님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장면으로 요셉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주라는 개념의 의미를 요셉을 통해 밝히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왕조차 이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술 맡은 관원장은 자신의 복직으로 인한 기쁨으로 요셉의 청을 완전히 잊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 이년이 지난 후 바로가 꿈을 꾸게 됨으로 다시 요셉을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이년동안 무엇을 했는가?

죄수로 있었지요. 그런데 그의 변화된 모습은 조금 전에 읽은 41장3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전에는 꿈을 해석함으로 살기를 바랐지만, 2년이 지난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여전히 감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입장입니다.


이년동안 요셉의 마음을 바꾸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이런 마음이 되게 하시기 위해 13년의 세울을 종으로 죄수로 세월을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마음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살리는고 하면 자신을 죽이려던 형들을 살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이용해 자신이 살려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꿈 해석을 통해 철저하게 봉사하는 모습, 뭔가 계산을 넣지 않는 봉사라고 할까요.


과거 자신이 주가 되는 꿈을 꾸었을 때 막 자랑하는 모습과는 비교되는 모습입니다.


이런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장차 오실 약속의 씨가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려 왔고, 모함으로 감옥 온 것도, 떡 맡은 자와 술 맡은 자가 꿈을 꾸고, 바로 왕이 꿈을 꾸고 그 해석을 요셉이 한 모든 것들이 곧 하나님께서 언약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가를 보여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어떤 상황을 만들어 내실지 알 수 없습니다.


모세 같은 경우는 오히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희한 하지요. 요셉은 총리대신이 되지만 모세는 오히려 왕자의 신분을 벗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느 쪽이 좋겠습니까?

요셉입니까 모세입니까?


왕자신분 갖고 예수님을 믿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결코 그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신분이 어떻든, 왕자든, 총리든, 죄수든, 종이든 상관없습니다. 어떤 삶의 순간도 우리 생각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감옥에 갇혀도, 자유인이 되어도  주님께서는 이 모습 그대로 언약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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