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창세기43장16-34

푸른 섬 2007. 7. 16. 12:45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창세기43장16-34

요셉이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청지기에게 명했습니다.

자신의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아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오정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그러나 요셉의 집으로 인도함을 받은 야곱의 열 아들은 두려움 속에 사로 잡혔습니다.

지난번에 내려 왔을 때 자루 속에 들어 있던 돈으로 인해 자신들을 결박하고 노예를 삼고 자신들의 나귀를 빼앗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청지기에게 사실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청지기가 의외의 말을 합니다.

23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 내고”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들은 단지 먹을 것을 구하러 왔지만, 오히려 자신들에게 재물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그렇게 두려워 하든 문제도 다 해결 해 놓았습니다.


자신들이 염려와 자신들이 어떻게 했는가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싫어하든 요셉이 이 일을 다 해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므온도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요셉이 들어오자 이들은 준비한 예물을 요셉께 드렸습니다.

가나안 땅의 특산물입니다.

예물과 상관없이 이들은 이미 풍성한 대접을 받습니다.


예물을 드리고 땅에 엎드리어 절합니다.

그러자 요셉이 묻습니다.

너희 아버지 그 노인이 안녕하시느냐 지금까지 생존하시느냐?


그들이 대답합니다.

주의 종 우리 아비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 요셉을 그렇게 조롱하던 형들이 지금 요셉을 향해 주라고 부르고 있고, 이들의 입을 통해 자신들의 아버지도 결국 요셉의 종임을 말합니다.


창세기37장8절에서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라고 하면서 더욱 미워하던 저들이 지금 요셉 앞에서 절하면서 자신들은 종이요 요셉은 주라고 스스로 시인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노라.


그러고서는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30절입니다.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 듯하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왜 요셉은 계속해서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형제들에게 감출까요?


그 이유는 형제들의 마음이 주의 마음과 일치되도록, 즉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 버린 아버지 야곱의 마음과 일치되며, 얍복강가에서 낮아지신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되는 것을 알기까지 요셉은 자신의 마음을 숨깁니다.


그리고 요셉은 음식을 줄때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오배나 주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형제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인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종이 어디 감히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차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형제들이 요셉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들은 주님의 크신 은혜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놓아 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그분의 즐거움에 참여케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과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온갖 근심 걱정과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예수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참된 평안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평안가운데 인도하셔서 함께 즐거움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한 가지 더 알아야 하는 사실은 요셉이 베냐민에게 다섯 배나 더 준 것에 대해서 형제들은 어떤 불평불만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들의 입장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이들을 즐거워합니다.


즐거워한다는 것은 요셉의 결정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남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에 대해서 함께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투하고, 시기하고, 불평불만을 늘여 놓습니다.


모든 것을 십자가 지신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주셨는데 마치 자신이 하는 것이 자신의 공이나 되는냥 그것을 내세우고, 자랑하고 난리 법석을 떱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아니면 그런 것이 없는 사람에 대해 무시합니다.


교회가 가지지 못해, 소유하지 못해 안달이 났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모든 것을 잃게 하시기 위해서, 버리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은혜로 모든 것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오직 주님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로 살기 위해 모든 것들을 다 은혜로 받은 자들입니다.


고린도 전서4장6,7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로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바울과 그 일행들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는데, 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갖고 자기 잘났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주님의 피로 구속받은 이유는 자기 소리를 내라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하라고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소리 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한 자기 자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님의 소리를 내며 주님만을 자랑합니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주님이 주신 마음과 동일한 마음을 품고 있는 모습입니다.

자신은 철저하게 낮아지고 부인되며 오직 예수님만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주관 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지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형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통역을 세워 놓았지만 그것은 형제들에게 자신을 감추기 위한 방편입니다.


돈에 대한 문제도 다 처리해 놓았습니다.

시므온 문제도 처리해 주고, 베냐민을 요셉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관대로 베냐민에게만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 버립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특별히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과연 미워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요셉홀로 다 처리하는데 형제들이 지금 어떠한 시비도 걸 수 없는 입장이요, 베냐민을 특별히 대우한다고 해서 자신들이 만일 과거 요셉에게 했던 행위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셉이 정말 주와 같이 행세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보여줍니다마는 요셉은 형제들의 모든 것을 아는 입장에서 형제들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주님되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2장 25절을 보면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사람 속에 있는 것을 다 아십니다.


가롯 유다가 어떻게 자신을 따르다가 자신을 팔지, 또한 어떻게 죽을 지, 다른 사도들이 어떻게 자신을 따르다가 배신하고 다시 자신의 증인이 될지를, 그리고 그들의 어떻게 죽게 될 것까지, 고난 받는 것 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성도의 삶이 이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이 이미 아시는 삶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요셉과 함께 즐거워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성도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성도와 전혀 의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구속의 위력은 우리를 의롭다 할 뿐만 아니라 영화롭게 하는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3장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끝없는 자기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죽음과 환난과 핍박가운데로 인도하셨고, 그런 가운데서도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편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요셉의 형제들처럼 두려워 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성도는 이미 주님 안에 놓여 있는 자입니다. 

성도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그 내막을 아는 자로써, 결론을 아는 자로써 두렴 없이 용감하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니 성도는 늘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의하며 박수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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