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남편에게로 달려가자
사무엘상25장39-42
아비가일은 나발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나발이 죽자 다윗은 아비가일을 자신의 아내로 삼고자 하여 사환들을 아비가일에게 보냅니다.
사환들을 맞이한 아비가일은 자신을 아주 낮추어 말합니다.
내 주의 여종은 사환들의 발을 씻길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다윗의 뜻을 알고 그대로 다윗에게 가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여러분. 느낌이 어떻습니까?
마치 다윗이나 아비가일이나 나발이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둘을 결혼해 버립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상식으로는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지요.
물론 과거 문화가 그러하다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문화가 드러하다고 하더라도 다윗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예표하는 사람 아닙니다.
가장 예수님과 근접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런 다윗이 문화가 그러하다고 해서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요?
남편이 죽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윗은 아비가일을 자신의 아내로 삼으려고 합니까?
이런 것은 좀 성경에 없었으면 하지 않습니까?
결혼이란 어떤 것입니까?
분명 창세기 2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둘이 한 몸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물론 다윗이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별 문제가 없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43절을 보면 이스르엘 아히노암을 취하였더니 그들 두 사람이 자기 아내가 되니라고 합니다.
그러니 가장 예수님을 잘 증거해야 될 다윗이 아내 취하는데 급급하게 보이는 것을 볼때 우리들의 시각으로는 이해도 할 수 없고 용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해서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까?
서로 용서해주고, 이해해 주고. 이게 우리들 생각 아닙니까?
그런데 아니가일은 마치 남편 나발이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에게 가버립니다.
이런 아내가 우리 주변에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어떤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남편의 아내가 곧장 새로운 남자에게 가버립니다.
아무리 옛날이지만 문제는 다윗이 아닙니까?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아비가일을 아내로 취할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럼 왜 다윗이 이렇게 빨리 아비가일을 아내로 취했는지 그 답을 찾아 보겠습니다.
다윗은 분명 개인의 삶을 살았지만 결코 그 개인적 삶이 자신의 삶이 아닙니다.
다윗의 삶은 예수님을 보여 주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가 아비가일을 취한 것도 이런 입장에서 보아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7장8절 이하를 보면 참으로 이상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은 바울처럼 그냥 독신으로 사는 것이 혼인하는 것 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혼인한 자들은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남편은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고자 하면 갈리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고 하는 말이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주 아리송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이것은 단지 바울의 명이 아닙니다.
주님의 명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어 보면 일관성이 있어 보입니까 없어 보입니까?
일관성이 없죠.
혼인하지 말라고 하면 말라고 하든지, 아니면 혼인하라고 하면 혼인하라고 하든지.
또 이혼하지 말라고 하면 말라고 하든지, 이혼하라면 하라고 하든지.
그러면서 결론에서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애매모호한 말입니까?
나는 독신으로, 나는 이혼자로, 나는 이혼해서 재혼하는 사람으로 주님께서 부르신지 어떻게 아닙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독신으로 부르심을 입었다. 재혼한 것도 주님의 뜻이요 이혼한 것도 주님의 뜻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말들은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왜 이렇게 우리 인간 세상에 혼란을 가져오는 내용을 말씀과 애매모호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로마서 7장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리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니라”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란 본래 어디에 매여 있는 인생입니까?
법에 매여 있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인생이 성도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하기기 위해서라는 것이지요.
성도란 법에 매이는 인생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모든 법에 매여 있습니다.
즉 결혼이라는 것도 세상의 법, 율법에 다 매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성도를 결코 구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과 결혼하는데 무슨 이런 것들이 성도를 옭아매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7장에서 그렇게 애매하게 말씀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사실은 애매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명확하고 분명한 말씀입니다.
오직 한분 . 예수님만 믿는 삶을 사는 것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만 전하는 삶이 성도입니다.
그러니 독신으로든, 결혼해서든, 이혼해서든 상관업이 오직 예수님만 증거하는 삶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산다고 위축될 필요없고, 자랑할 것도 아닙니다.
결혼해 산다고 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이혼했다고 해서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재혼했다고 해서도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 모두가 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각 성도를 부르신 삶입니다.
그러니 만일 이런 것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가로막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르심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성도라 볼수 없지요.
이런 것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성도와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이런 것들을 너무나 소중이 여기고 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이야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다윗이 괜히 싫어지죠.
다윗을 본받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그가 다른 것은 다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아내를 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고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11장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이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결한 처녀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비가일처럼 죽은 남편을 생각지 않고 다윗에게 속 달려가는 모습입니다.
성도는 아비가일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은 것에 얽매이지 않는 인생이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