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없겠느냐?
사무엘상26장1-12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결코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성으로 모든 욕망을 제어할 수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에게 이런 반론을 할지 모르지요.
그러면 다 세상이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렇죠.
욕망들이 폭발하여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잊어버립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만이 정말 그곳에서 하나님보시기에 합당하게 살았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하시려고 하셨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롯이 그의 행함이 반듯하여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이 찾아 왔을때 자기 딸을 내어 주겠다는 태도가 과연 우리들이 받아들이기에 가능한 태도입니까?
아마 오늘날 이런 목사가 있다면 아무도 그런 교회 안 갈 것입니다.
손가락질하고 오히려 온 인터넷에 그런 이야기가 도배 되겠지요.
그러면 롯이 이러했으면 소돔과 고모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을까요?
아이도 있고 한데.
아이들도 그렇게 저질스럽게 살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죠.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18장20,2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 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누가 부르짖었을까요?
베드로 후서2장7,8절을 보면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동네 깡패들이 찾아 왔을때 롯이 취한 행동을 볼때 우리가 이 말씀에 동의할 수 있습니까?
아마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들이기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행위의 세계속에 사는 인간들은 결코 은혜의 세계를 알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롯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롯의 삶 자체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간주하시는고 하면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롯으로 평가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두 딸을 내어 주려고 하는 롯에서 이런 평가가 합당한 평가입니까?
절대 아니죠.
상식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롯에서 이런 평가를 내린 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뿐만 아니죠. 그가 소돔성에서 빠져 나온 후 취한 행동들을 보면 더더욱 이런 평가는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모암과 암몬이 롯과 그의 딸들을 통해 생겨난 족속이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성경을 좀 고상하게 보려고 하는 인간들은 신경질이 납니다.
무슨 이런 하나님이 다 있나 이런 마음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부분들은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대충 대충..
롯의 모습이 우리가 보기에는 비록 개판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의 욕망대로 살아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롯에게 은혜가 왕노릇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팔짝 뛰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주 듣는 여기 모인 우리들도 아마 이런 롯을 받아 들이기가, 이런 말씀을 아멘하기가 참 어려울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런 롯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왕노릇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그냥 불쑥 튀어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수기23장20-21절을 보게 되면 동일한 의미의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게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아니 우리가 볼 때 저들이 결코 우리의 행위와 나은 인간들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도 얼마나 배신을 많이 땡겼습니까?
그런데도 허물과 패역을 보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발람 선지자가 발락의 사주를 받고 분명 이스라엘족속들을 향해 그들의 행위에 근거하여 저주를 퍼부을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냥 저주를 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퍼 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들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돈을 받고 이스라엘에 저주를 퍼 부르려는 거짓 선지자의 저주 기준은 이스라엘의 행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가 왕노릇 하는 백성들입니다.
제가 서론을 이렇게 길게 말씀드린 이유는 인간이란 이스라엘이든 롯이든 아브라함이든 이들의 삶이 뭔가 특별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이들의 삶의 모습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인간들의 삶의 모습이 동일하다는 것이지요.
돈을 벌려면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기도만 합니까?
아니죠.
양들을 먹어야 하고, 물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하고, 경쟁자와 싸워 이겨야 하고, 생존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사람들은 은혜가 왕노릇하면 인간의 본성이 바뀔 것이라고 자꾸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특별한 모습을 볼수 가 없습니다.
단지 하나. 이 말씀 붙들고 있습니다.
허물과 죄를 보지 않으신다는 사실.
십자가의 사랑 그 하나만 붙들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나머지는 지나 내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모두가 다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인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처음에 모든 인간들은 자기 욕망대로 살아간다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사울왕은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제어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전에 울며 불며 하던 모습 다 어디로 갔는지 알수 없습니다.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군사를 끌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오히려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야 욕망대로 확 죽여버리지 않겠습니까?
이런 마음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아비새입니다.
단번에 사울왕을 죽여 버리자고 합니다.
이때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참으로 우리의 욕망과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다윗이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가리치고 압력을 행세합니다.
기회가 오면 제거하고 잡아라고 말입니다.
다윗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들이 다윗을 볼때 롯과 특별히 다른 점이 있습니까?
다른 점이 없습니다.
제가 지난번에도 한번 언급했지만 다윗은 다윗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그가 취한 아내가 벌써 몇 명입니까?
사울왕을 죽이지 않는 것은 잘한 일이지만 아내를 몇 명이나 취했습니까?
다윗과 롯의 동일한 점은 그들은 그들의 욕망대로 살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위에 왕노릇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울왕이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왕노릇하는 은혜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은혜가 있는 인간과 은혜 없는 인간의 차이점은 한가지입니다.
은혜가 있는 인간은 믿는 구석이 따로 있어 주님말씀만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없는 인간은 믿는 구석이 자기 행함밖에 없습니다.
욕망은 자기 자신 속에서 끊임없이 넘쳐 흘러 나오기 때문에 이것을 제어할 능력이 인간에겐 없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이런 욕망을 제어할 능력이 있는가?
롯을 통해 이미 확인했습니다.
제어할 능력 없습니다.
상황이 되면 또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은혜가 이들 위에 왕노릇 한다는 사실이요, 이들은 결코 자신들의 행함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삶의 사건 사건 속에서 은혜가 왕노릇 하는 인생임이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