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신학의 설교와 십자가 신학의 설교(오늘날 번영주의 신학 비판)라는
제목으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교수인 김영한 교수의 논문을 읽고
번영의 신학은 부자 되기 원하는 성도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제공한다.
우리나라 대형교회들 역시 이 같은 흐름을 피할 수 없이 영향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복음 세속적 지위와 재물의 번영으로 나타난다라고 설교하고 있다.
미국 번영복음주의 자들은 죤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종교를
적극적 사고방식에 의한 심리학적 긍정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청중을
소비자로 구미에 맞는 설교를 들려줘야 설교를 부담없이 듣게 된다.
번영의 복음은 회중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오순절교단은 근면히 일하는 것 좋은 가정 꾸리기를 강조해 왔다. 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한국교회는 가난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어서 빨리
부자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증거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부와 성공을 강조하는 설교는 성경적이지 않고 개혁주의 전통에도 어긋난다
루터 는 영광의 신학 즉 중세 스콜라주의를 이렇게 정의 한다.
신학자가 하나님의 본질을 그의 사역에서 지각해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보는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이란 하나님의 사역으로부터 시도하는
하나님이 인식이다.
루터는 중세스콜라 주의가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십자가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루터는 이 영광의 신학이 인간의 도덕성과 이성을 신뢰하는 도덕주의와
합리주의에 기인한다. 이러한 인간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에게 다가갈수
없다고 선언한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의 보이는 것, 그의 뒷면을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서 보고 지각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위 틈에 두시고
그의 영광이 지나가신 후 모세는 하나님의 뒷면만을 보고 그의
영광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의 뒷면을 보는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 인식의 기준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인간을 고난과 수난으로 부름 받은 자로 이해한다.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인간을 무능화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인간 속에 행하시도록 한다. 인간은 순수히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수용하는 자가 된다. 십자가 신학은 영광의 신학의 기준에 따르면
고난 즉, 악함과 미련함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한다.
십자가는 자연신학과 자연적인 에토스의 자기의식을 깨뜨린다.
십자가는 인간의 성공이나 번영의식을 깨뜨린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우리를 만나신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의 죽음으로 경험한다.
십자가 신학은 청결한 마음을 지난 소수의 청중에게 재난과
어려움과 질병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진실한
설교단에 하나님은 임재해 계신다.
따라서 번영과 성공을 지향하는 영광신학의 사고에서 나눔과 헌신을
지향하는 십자가 신학의 사고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고난을 통해서 신에게 나아간다.
인간은 이기심의 극복, 자기와의 선한 싸움, 고난을 통해서 성화된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자기 희생(고난)이다.
기독교 설교의 핵심은 십자가이며, 십자가 정신이란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내어줌이다.
십자가 신학의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십자가 영성을 함양해야 한다. 십자가 영성이란 하나님
주권적이며, 고난에 동참하며, 불우한 이웃과 나눔과 타자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면서 김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부와 번영, 긍정의 사고방식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믿을 때
그 다음에 찾아오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김영한 교수가 말하는 십자가는 윤리, 도덕 그 이상이 아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 루터로부터도 스스로 공격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아니라 교회에 있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논문에서 교회의 침체의 이유를 번영신학의 번영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그가 주장하는 십자가 신학, 즉 하나님 주권을 인정하며
고난에 동참하며, 불우한 이웃과 나눔과 타자에 대한 사랑을
하는 교회야 말로 참 교회로 본다.
비평
그의 십자가 신학은 양심에 기초한 도덕주의와 합리주의 그 이상도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런 꿈 자체가 죄임을 고발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1장에서 자신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김영한 교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받아 들일 만하고 인정할 만한 이웃 사랑을 전하고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린도전서 1장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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