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 1

푸른 섬 2008. 1. 21. 23:49
 

격동당하는 인생

사무엘 상 1장1-18


인간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 한 번도 포기 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신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자들이 가인 이후로 줄곧 세상의 중심에 있습니다. 역사의 주인공들이지요.


 대조영이나, 아니면 담덕이 나오는 태왕사신기가 인기가 아주 많지요.  이런 영웅을 보면서 사람들은 대리 만족을 느낍니다.


세상은 어느 시대를 살던 항상 영웅을 원하고, 힘을 원하고 권력을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일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 속에서도 저들과 전혀 다르지 않는 일들이 똑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아주 당황스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나라가 기독교국가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입니다.

자유롭게 복음도 전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을 합니다 마는 이런 생각은 성경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엘가나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의 두 아내 한나와 브닌나가  나옵니다.


엘가나는 브닌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나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고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습니다.


이 구조를 보면 누가 떠오릅니까?

야곱이 떠오르지요?


야곱이 누구를 사랑합니까? 라헬을 사랑하지요. 그런데 레아는 원하지 않는데 자신의 첫째 부인이 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라엘에게서는 자식이 없고 레아에서서는 자식이 있었습니다.


왜 성경은 이런 비슷한 내용을 반복할까요?


그것은 인간들의 죄악 된 사고방식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말씀이 충만하고 종교적인 것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더 잘 믿을 것이라는 생각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엘가나를 봅시다.

그는 브닌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나를 사랑합니다.


분명 한나도 엘가나의 아내요, 브닌나도 엘가나의 아내입니다.

그렇다면 엘가나가 이 둘을 아내로 취할 때 야곱같이 얼떨결에 브닌나를 얻었을까요?


그런 내용이 성경에 없습니다.

어떻게 얻었는지는 상관없지만 둘 다 엘가나의 아내입니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무슨 이런 놈이 다 있냐고 하실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아내를 둘이나 가지고 있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말로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저들은 자신들이 지킬 수 있는 율법만 지키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삼각관계가 되면 항상 한쪽은 더 사랑받고 한쪽은 덜 사랑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사랑 받는 아내에게서는 자식이 없고, 덜 사랑하는, 사랑하지 않는 아내에게는 자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중간에 있는 남편이 죽을 지경이겠지요.


그래서 남편은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드린 날에 받은 재물의 분깃을 한나에게는 브닌나와 그 자식들에게 주는 것 보다 갑절로 더 주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누가 더 화를 낼까요?


브닌나입니다.

자식 있는 자로서 없는 자를 결코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왜 오히려 자신들에게는 조금밖에 재물의 분깃을 주지 않느냐라고 불만을 내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자식을 못 낳는 한나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식도 못 낳는 주제에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자식을 낳을 수 있으면서도 낳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자식을 갖고 싶은데 자식을 못 낳아 보세요.

그 마음은 아마 그 상황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잘 모를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자식이 상팔자다라는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더 열 받게 하는 말이겠지요.


7,8절을 한번 봅시다.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 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누가 브닌나를 자극해서 열 받게 만듭니까?

엘가나이지요.

엘가나가 한나를 더 사랑하는 표를 재물의 분깃을 갖고 드러내니 브닌나가 열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를 열 받게 합니다.

그러자 엘가나가 방금 읽은 본문처럼 내가 열 아들보다 낫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열 아들 보다 못하지요. 우리들 생각에는


자식을 못 낳는 것은 실상 아브라함 때를 보아도, 야곱 때를 보아도 모든 것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나는 열 받고 있지요.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성태치 못하게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땅에 사는  인간들이 알 수 있을까요?


브닌나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기도를 보게 되면 한나는 단순히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해서 열 받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식 낳지 못하는 심정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나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마음이 괴로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나의 기도를 보게 되면 개인적인 차원이라면 단순이 자식 못 낳는 것에 대한 열 받음이라면 결코 자식을 낳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기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 차원에서의 자식 낳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고발입니다.


실상 이들의 근원을 살펴 보면 하나님의 긍휼로 이루어진 역사 아닙니까?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이들은 결코 지금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한 증거로서 제사를 드리는데, 지금 제사의 의미는 실종되었습니다.


오히려 긍휼이 묻어 나와야 하는 제사의 결과에서 질투가 묻어 나오고, 자기 사랑만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우리들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많고, 기독교적이라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벌이시는고 하면 한나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십니다.

성태치 못하게 하신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안과 밖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성도들을 뭔가 모자라는 자로, 사람들 보기에 멸시받을 만한 자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십니다. 한나 처럼 말입니다.


요한복음 15장19절을 봅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 하느니라”


한나의 미움 받음, 멸시 받음은 바로 하나님의 택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안과 밖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도행전7장을 보면 스데반을 설교가 나옵니다.

그리고 돌에 맞아 죽습니다.

도대체 그의 설교가 무엇을 말하길레 돌에 맞아 죽습니다.


너희들이 의인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여버립니다.


이 땅의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안된다,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가장 싫어합니다.


우리들도 이 땅에 살면서 한나처럼 십자가만 자랑하다가 격동당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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