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삶
사무엘 상1장19-28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무언가 종교적으로 특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특별한 것 중에 하나가 기도나 아니면 헌금이나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는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온다 아니면 교회 모임마다 열심히면 신앙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간주합니다.
또한 이렇게 못하더라도 헌금이라도 꼬박꼬박 제대로 낸다면 이 사람도 나름대로 인정받는 신앙인이 됩니다. 물론 주님으로부터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자라에 앉아 있는 목사나 아니면 성도들로부터 인정을 받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두 사람을 보게 되면 누가 더 종교적인가 누가 더 열심을 내었는가, 누가 더 정성이 많았는가로 참신앙과 거짓 신앙이 갈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처음부터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본능을 따라 참신앙의 기준을 정하여 그렇게 행하면 믿음 좋은 자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인정해 줍니다.
창세기 4장 3-5절을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였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이곳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무엇을 드려라라는 명령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벨의 종교적 행위가 나아서 하나님께 제물이 열납되었다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벨이 더 정성을 다했더니 하나님께서 받으셨다 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중에 히브리서에서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보다 나은 제물을 드리지 않았습니까라고 반박 하실 것입니다. 지금 제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인간의 솔선수범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의 결과물로 믿음이라는 것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행위가 더 낫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일은 성경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습니까?
인간으로부터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벨처럼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믿음 자체게 우리에게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처럼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을 보게 되면 한나가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얻게 되지요.
그 당에서 아들 없는 여인이 한나 한 여인밖에 없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나처럼 서원한 여인이 다른 한명도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을 보아도 쉽게 서원하는 자들을 볼수 있는데 그 당시 종교적 삶 속에 사는 자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아마 수많은 여인이 한나처럼 아들이 없었을 것이고, 한나처럼 서러움을 당했을 것이고, 기도하며 서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첨된 자는 한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한나 처럼 똑같은 코스를 따라 억울함을 당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가운데 살고 있는 한나를 사용하셔서 그 당시 시대적 죄들을 고발하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펼쳐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특별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를 통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적 상황에서 그냥 별 다를 바 없는 자를 사용하셔서 그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예를 들었던 아벨과 별 차이가 없지요.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고 하면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어떤 생각을 합니까?
항상 무언가 특별한 종교적인 것을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한나가 아들을 낳았을 때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짓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오늘날도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은 아이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여러분 들어 본적 없습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다 사무엘입니까?
한나 당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해서 낳은 아들이라 해서 다 사무엘이 될 수없습니다.
한나는 그 시대에 아주 평범한 가정의 한 여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한나를 주님께서 부르셔서 그 시대의 죄를 고발하시는 자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한나는 그 시대 선지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어떤 종교적 열성을 지녔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무언가 특별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무언가 특별한 삶이 자신을 기다린다고 여깁니다.
그 삶이 무엇입니까? 종교적인 것입니다. 헛것들이지요.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무언가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똑 같이 평범한 삶을 사는 가운데 한나처럼 자신의 삶의 모습 속에서 죄를 고발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열받는 인간들이 많겠지요.
종교적 삶은 다 헛짓이냐?
종교적 삶이 다 헛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다 헛짓이지요.
브닌나의 종교적 살이 한나의 삶과 달랐습니까?
똑 같습니다.
오히려 한나가 사무엘 때문에 젓 땔 때까지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가지 않습니다.
희한하지요.
우리 같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은혜를 모르는 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들의 기준은 항상 종교적 활동입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이런 본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벗어나는 자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한나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종교적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한나는 믿음을 따라 살았기에 오히려 아들을 낳았지만 아들 없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한나가 믿음을 따라 살지 않았다면 아들을 낳았을 때 어떻게 했을까요?
아들 자랑만 하고 살지 않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니 이렇게 아들을 주셨다. 그러니 너희들 까불지 마라.
이게 오늘날 종교적 삶을 사는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선지자의 삶을 사는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