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상식
사무엘상2장11-26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양심이 있어서 적어도 이런 짓은 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이런 짓이란 적어도 내 생각의 상식이지요. 물론 그 기준이 다 다릅니다마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개판이라도 이 정도로 개판을 칠 수가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시대로 들어와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인간들이 없겠지.
주님되신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인간들은 없겠지라고 말입니다.
인간들은 희한하게도 성경말씀을 한갓 옛날 이야기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 말씀은 오늘날과 별로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서 항상 골라서 읽어 냅니다.
큐티라는 것을 해도, 아침마다 말씀 묵상을 해도 말씀 앞에서 상한 심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변화될수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런 인간처럼 되어서는 안 되며 더더욱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이런 인간들이 없을 것이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교회 목사님만큼은 이런 짓을 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왜 갑자가 목사 이야기를 하는고 하면 목사들이 주로 이 짓을 주도적으로 행하면서 본을 보이기 때문에 목사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를 연구하여 설교를 해 대니 듣는 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화답하여 그렇게 세상에서 살아갑니까?
12절을 보면 헨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이 말씀을 보면 마치 엘리의 아들들이 여호와를 몰랐다, 믿지 않았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번역이 좀 애매하지요.
그러나 이들이 제사 지내는 일을 담당하는 것을 보면 분명 여호와를 알았고 율법도 알았고 나름대로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알고 율법도 알고, 여호와를 믿는 그 믿음이 다 자기 입맛대로 알고 지키고 믿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는 표현을 이들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제사드리는 것이 장난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들의 밥벌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히려 제사 드리러 오는 자들은 여호와를 공경하는 데 엘리의 두 아들들은 강도처럼 행세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거의 똑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목사들은 자신이 세운 교회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발악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은 오직 교인들을 자신의 종으로 삼기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야 말로 성경말씀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됩니다.
그러면 순진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마음이 악할까?
그렇지 않을 거야. 적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
그리고 가끔은 맞는 설교도 하고 그렇지 않느냐. 저들의 눈물과 기도와 찬양과 설교, 수고와 땀이 모두 거짓이다 말이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양심은 있겠지.
그래도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목사로 사역하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오늘날 일반교인들의 순진한 생각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떻습니까?
17절입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의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제사를 안 드린 것이 아니라 제사를 멸시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당시 민중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제사장은 누가 세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사람들은 다 연약하니까 엘리의 두 아들들과 같은 제사장도 있을 수 있지요.
아마 이것이 그 당시 브닌나로 대표되는 민중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 브닌나가 하는 짓이나 엘리의 두 아들들이 하는 짓이 똑 같은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니 어찌 되었든지 제사장은 제사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민중들이 아닙니까?
심지어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을 합니다.
아버지 엘 리가 꾸짖어도 듣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25절에 나옵니다.
한번 읽어 봅시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저들에겐 우리가 순진하게 생각하는 그런 양심이나 가책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바른 말을 해도 오직 자신의 길만 가는 것이지요.
그래야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죽지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은 죽어도 듣기 싫어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열심인 사람, 기도 많이 하는 사람, 전도 많이 하는 사람, 큰 교회 목회하는 사람을 지옥 보낼 수 있는가?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 기준을 갖고 천국에 갈수 있다는 확신을 합니다.
민수기23장20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축복과 저주는 자신의 행동의 어떠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왕을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스라엘이 복 받을 자격 있어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왕이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에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종교적으로 어떤 행동을 많이 했다고 해서, 선 한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천국가고,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4장7,8절을 보면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
철저하게 왕의 뜻대로 되어지는 죄용서 하심.
이 용서하심을 입은 자만이 천국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용서하심을 받지 못한 자들은 항상 무엇을 끄집어내는고 하면 자신의 행위를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앞서 제가 말씀드린 그런 유, 즉 그렇게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 많이 하고 큰 교회 목회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지옥 갑니까?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야 말로 왕으로부터 죄용서 하심을 받은 경험이 전혀 없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들이 어떻습니까?
이들은 이미 죽이기도 작정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오직 자신의 길을 가는 것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과 율법과 제사 제도와 제사장을 이용해서 철저하게 죄용서 하심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작정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소용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그렇습니다.
저들은 무엇을 모르는 고하면 죄용서 하심 은혜를 모릅니다.
자꾸 인간의 공로를 쌓으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꾸 이 땅에서 먹고 살려고 발부둥 친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말씀을 이용합니다.
이들에게 상한 심령은 없습니다.
오직 강퍅한 마음만 있습니다.
눈물로 강퍅의 결과의 눈물입니다.
기도도 자신을 더욱더 견고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전도도 그렇습니다.
수십 년간의 목회도 철저하게 자신의 우상화를 만들어 내는 목회를 합니다.
그저께입니까?
어떤 가톨릭 신자가 마리아 상을 이용해서 자신이 신처럼 대접받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이 사람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사기극에 매주 수천 명이 몰려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이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주류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운데 한 부분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류사회가 이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역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죄악의 깊이만 더욱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오늘날을 살면서 별로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야만 주의 뜻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우리가 더욱더 놀랄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류들이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의 백성은 주님께서 친히 나게 하셔서 그 가운데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왜 십자가의 복음을 싫어하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복음을 등쳐먹으려는 우리의 죄악을 고스란히 고발하고, 성도에게 상한 심령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싫어합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얼마나 제사제도가 싫겠습니까?
그런데 제사제도를 이용해 배불리지요.
십자가 복음이 얼마나 싫겠습니까?
그런데 십자가 복음으로 배불리는 자들이 세상에 가득가득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성도란 십자가의 복음 속에 사는 자들입니다.
이용하는 자들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