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강해31

푸른 섬 2009. 11. 1. 15:25

죽였고

사무엘하21장15-22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해서 우리들은 가끔 생각합니다.

물론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야 그러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시간이 좀 지나 버리면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살기 바쁘지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살아계시기나 하나. 이것이 문제인데 무슨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어지니 무슨 예수님이 다시 오심에 대해 생각하겠습니까?


어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우린 무엇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자격이 없다. 단지 자신의 믿음대로 살면 된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듣기에 어떻습니까?

참으로 듣기 편하죠 예.


부담 없는 말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이런 부담 없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생각지 말자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면 반드시 심판이라는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심판이라는 것은 그냥 놀이가 아닙니다.


지옥이라는 곳에 집어넣을 자들은 지옥에 집어넣으시고 천국에 들어갈 자들을 천국으로 집어넣으십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굉장히 거북스럽게 합니다.


이 이야기를 현실로 끌어당기면 반드시 이 땅에는 둘로 갈라지는 일이 일어나야합니다.

한쪽은 지옥 가는 쪽 다른 한 쪽은 천국 가는 쪽.


그런데 지옥 가는 쪽 천국 가는 쪽을 우리 인간이 가른다는 것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성경말씀을 인용한다고 하지만 인간이 이런 자는 천국가고 이런 자는 지옥 간다는 말을 하는 것은 좀 건방지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천국과 지옥은 죽어봐야 하는 일이 아닙니까?

죽어 지옥, 천국에 가보지도 않은 놈이 천국 어쩌고 저쩌고 말하는 것이 건방지지 않습니까?


또한 자기가 하나님도 아닌 놈이 어떻게 천국 지옥이야기를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있다 말입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합니다.

물론 이런 것도 있습니다.


하도 엉터리 같은 인간들, 거짓 선지자들, 자신에 탐욕에 미친 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꺼집어 내어 사람들을 유혹한 이유도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오심을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것으로 이용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천국과 지옥, 심판을 이야기 하는 것은 마치 이단들이나 사이비 집단들이 하는 말처럼 들리는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다시 오심, 지옥, 천국, 심판을 말하는 것은 마치 정신 나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애씁니다.

누구 이야기 같죠.

여러분 누군지 아세요.

전직 대통령이 만든 사이버 세상 아닙니까?


사람 사는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사람 사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이 없는 교회는 교회 같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만 있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교회, 말씀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교회로 만들어 줄때 제대로 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어떤 세상으로 만드는고 하면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사들이나 성도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무엇에 애을 씁니까?

바로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교회, 사람들이 오래 머물 수 있는 곳, 쉴 수 있고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드려고 합니다.


교회에는 분쟁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겁주는 지옥이야기는 사라져야 합니다.

심판도 사라져야 합니다.


이런 것이 있으면 항상 판단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구별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언제나 긴장 속에 살아야 합니다.

피곤한 생활이 됩니다.


누가 이런 교회를 다니려고 하겠습니까?

아무도 다니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 나가는데 그곳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누가 그런 곳에 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일주일 내내 전쟁터에서 살아왔는데 주일 말씀조차 싸움이야기를 들어야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교회는 당연히 사람들의 거부 대상이 됩니다.


사람 사는 세상,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곳, 인정이 있는 곳, 인정머리가 있는 그런 교회가 편하고 좋습니다.


그래서 설교에서 지옥이고 심판이고 갈라내는 것 같은 것은 없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해야만 헌금도 좀 많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왜 갑자기 헌금이야기냐고요.


사람 사람 세상이야기를 하면 그곳이 자신의 낙원이 되는데 낙원 만드는데 돈을 아까워 하겠습니까?

이와 반대로 심판을 말하고 지옥을 말하고 저주를 말하고 천국을 말하면 돈 안냅니다.


물론 이 말도 인간의 탐욕대로 제공해 주면 전 제산을 바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복음을 전하면 돈을 잘 안내지요.


왜냐하면 제대로 된 설교 속에서는 모든 일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 홀로 하심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천국도 그러하고 지옥도 그러하고 저주도 그러하고 심판도 그러하고 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 홀로 다 하십니다. 자신이 할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팔짱끼고 구경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사람 사람 세상이 되어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시는데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서와 같이 그 대적들을 죽이심으로 구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미치게 하는 말씀입니다.


왜 구원하시는데 꼭 대적을 죽여야 합니까?

죽이지 않고 구원하시면 안 됩니까?


이것이 우리를 미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것은 천국이라는 것은 반드시 죽이시는 일을, 심판하시는 일을 동반합니다.


요한계시록20장7-15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과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다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리라”


이 본문을 두고 많은 이단들이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 나오는 천년이 차고 난후 사단이 그 옥에서 놓인다는 이 말씀을 근거하여 별의별 이야기를 다하는데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간단합니다.

사단이 자기 편을 다 모아 성도와 대적하려고 하죠. 그러나 시작하려고 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합니다. 저희를 다 불과 유황 못에 던져버립니다.


즉 천년이 차면 사단이 자기편들을 완벽하게 하나로 모아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른다는 것입니다.


단체관광을 딱 보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는 시기가 천년이 차는 시기입니다.

단체관광을 어디로 갑니까? 유황불, 지옥 불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되신 이후론 천년왕국입니다. 성도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5절 6절에 나오지요.

이들은 둘째 사망이 없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둘째 사망 즉 유황불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둘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첫째 부활이라는 말이 있고 둘째 부활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또한 첫째 사망이라는 말이 없고 둘째 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정교하게 말씀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의미가 확 오도록 해 놓았지요.


문제는 누가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누가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가입니다.

그야 간단합니다.


한쪽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요 다른 한쪽은 행위 책에 기록된 자입니다.

답이 나왔지요.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어디에 관심 있겠습니까?

생명에 관심 있습니다.

생명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오직 예수님께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행위 책에 기록된 자는 어디에 관심 있을까요?

그야 당연히 행위에 관심이 있습니다.

항상 행위에 관심을 둡니다.


행위는 누가 만들어 냅니까?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 이런 자들입니다.

이들이 내 뱉을 수 있는 것은 행위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사람 사는 세상이 안 되겠습니까?

천 날 만날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해 보세요.

사람 사는 세상이 되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사는 세상 아닙니까?


마치 뭐라고 할까요. 사람 없는 세상. 아무것도 없는 세상. 좋은 말로 하면 말씀만 있는 세상.

살아계신 주님 되신 예수님만 있는 세상입니다.


이것을 사람 사는 세상이 보면 뭐라고 할까요?

귀신 사는 세상에 사는 인간들이구만.


저들은 인정머리도 없는 놈들이야. 사람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아.

어디 감히 심판을 말해, 어디 감히 유황 불을 말해. 어디 감히 불 못을 말해, 둘째 사망을 어떻게 감히 말해.


그래서 이들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유황불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불 못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것도 잠시가 아니라 세세토록.

영원토록. 


이것이 생명 되신 예수님이 생명이심을 제대로 보여 주시는 방편입니다.


여러분 죽어야 하는 자들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단지 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 끝인 것 같이 나오죠.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죽는 처음 죽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고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제발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처럼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오늘 같은 말씀을 보면서

생명책과 행위 책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성도는 유황불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그러면서 성도는 죽으나 사나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생각하는 자입니다.

이런 마음이 드십니다.


그러면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행위 책에 기록된 자는 예수님을 생각해도 행위를 생각하고, 십자가를 생각해도 행위를 생각하고 성령을 생각해도 행위를 생각하고 늘 상 행위만 생각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에겐 둘째 사망 유황불이 아가리를 쫙 벌리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사무엘 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해32  (0) 2009.11.15
강해32  (0) 2009.11.08
강해30  (0) 2009.10.25
강해29  (0) 2009.10.18
강해28  (0) 2009.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