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강해32

푸른 섬 2009. 11. 15. 21:05

영원한 언약

사무엘하23장1-7

어느 한국 기독교 단체에서 여론 조사를 했답니다.

누구를 대상으로 했는고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답니다.


여러분 여론 조사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 결과는 뻔하겠죠?

저 단체가 왜 여론 조사를 했을까요?


성경어디에 여론 조사가 나옵니까?

복음을 전하는데 여론조사해서 사람들이 기독교를 이렇게 생각하니,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니 하나님 믿는 이스라엘은 이런 행동을 하라.


그래야 이방인들이 믿고 따를 것이 아니냐?


이런 성경말씀이 있습니까?


사람들의 생각은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죄인들은 사람들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여론 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볼까요?


기독인들은 언행일치가 없는 것 때문에 기독교에 부정적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응답을 했답니다.


그리고는 무분별한 선교, 타종교 비방, 기업화현상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답변을 했답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윤리입니다.

쉽게 말하면 행함을 말하고 있죠.


그런데 그 행함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행함이 아니라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발생한 인간적 기준에서의 윤리입니다.


저들은 성경말씀을 쓰레기 취급합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사회에서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탐욕밖에 없습니다.


사실 기독교가 제대로된 기독교라면 여론 조사가 이렇게 나와야 하죠.

십자가 복음 때문에 난 기독교가 싫다라고 말입니다.


사실 십자가 복음은 저들의 반응 자체를 다 부정해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에게 담지된 복음이란 윤리 그 이상이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거짓 복음을 전한 자들의 문제도 있습니다.

이와 함께 십자가 복음을 전해도 자신의 윤리기준으로 깨끗하게 걸러서 인간 윤리의 기독교로 만들어 버리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어느 인간도 이 윤리 즉 옳고 그름에서 벗어날 인간이 없습니다.


항상 인간들은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십자가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낍니다.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는 말이 맞거든요.


성경을 읽어 보니 말이 됩니다.

모든 본문들이 해석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옳은 것을 따라 십자가 복음 속으로 들어 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옳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것은 틀렸고 이것은 옳다가 아니라 저쪽은 사망이고 이쪽은 생명임을 알여 주는 복음입니다.

여기에서 심사가 꼬입니다.


자신은 분명 옳다고 해서 이 길로 들어 왔는데 들어 와 보니 들어 온 인간들이 옳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상식적이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즉 자신이 생각할 때 목사나 성도들이 항상 그렇게 살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그야 당연하죠.

생명안에 산다는 것이 옳고 그름으로 판단되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생명 안에 산다는 것 조차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니 속에서는 늘상 갈등이죠.

십자가 복음이 맞기는 맞는데 왜 이런 문제가 많을까?


이 사람은 십자가 복음을 자신의 선악기준으로 선택한 결과로서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물론 이 복음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지만 문제는 생명안에서가 아니라 선악과 안에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판단할 때 생명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복음을 아는 목사가 저렇게 해서는 되는가?

복음을 아는 성도가 저렇게 해서는 되는가?

복음을 안다는 자가 헌금도 안하고 봉사도 안하고.

복음을 아는 목사가 남에 대한 배려도 없고..


제가 서론에서 말씀드린 믿지 않는 자들과 똑같은 판단 기준으로 십자가 복음을 이해하고 있죠.


그러니 참 웃끼지 않습니까?

생명 안에 있다는 말은 사나 죽으나 내껀 없다는 말입니다.

없다는 말은 없다가 아니라 부정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없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자꾸 오해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데 없다고 하니까 부인 할게 없어져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십자가만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복음 안에 있는 자의 관심은 항상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 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헌금 안하고 봉사 안하고 배려 하지 않는 행동보고 삐질게 아닙니다.


복음만 전하면 되죠.

저들이 어찌 목사소관입니까?


저들이 어찌 내 소관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성령이 임하면 주님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했는데 증인이 되는게 아니라 주인행세하고 왕노릇하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없다라는 말입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 보면 어떻습니까?

마치 바울이 주인 행세하는 것 같이 보이지요?

주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계시라는 것을 받아 들이지 않아요.

성령에 의해 쓰여진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말씀임을 믿지 않아요.


그러니 주님 전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에 차는 것에 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고 하면서 쓴 찬양이 나옵니다.


한번 읽어 볼까요?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이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코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


물론 여기에 문제되는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런 구절이야 그냥 다윗을 자신으로 대체해서 해석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에 선수들이 죄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6-7절이 많이 걸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어 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사르이리로다 하니라”


물론 이 구절도 내가 사악한 자 아니니 라고 해석해 버리면 됩니다.


이게 여론 조사한 자들의 마음아닙니까?

영원한 언약은 다윗과만 세우셨죠.


물론 이 언약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워 놓으시고 다윗을 통해 영원한 언약이 어떤 성격인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본문이 우리 인간들이 가진 상식이나 윤리, 아니면 욕심에 부응할 수 있는 찬양입니까?


그렇지 않죠.

인간들을 상당히 기분나쁘게 하는 말씀입니다.


취미생활하면서 교회 오는 자들에게 돌 팔매질 하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영원한 언약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세우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인간은 뭐가 됩니까?


모든 인간은 다 사악할 뿐임이 선언되는 것입니다.


단 , 십자가 피 공로로 죄용서 함을 받은 자 만이 생명의 세계로 옮겨진 자들입니다.

그 외에는 다 불사름을 당할 대상들입니다.


뭐 인간의 윤리나 기준, 바램 이런 것들은 깡그리 다 무시해 버립니다.


마태복음3장10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까요?


살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는 행동이 도끼에 찍혀 불에 던지워져야 하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좋은 열매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옷 두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 주면 됩니까?


먹을 것을 없은 자에게 나눠 주면 됩니까?

물론 누가복음3장에서 세례요한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게 좋은 열매일까요?

이런 것 쯤은 요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까?


기부천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저들은 도끼 심판을  피할 수 있겠네요.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천국가기 참 쉽죠. 그쵸.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열매는 땅에서 맺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것 같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지실 이유가 없죠.

우리 인간끼리 여론 조사해서 부족한 것 채워나거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좋은 열매 맺는다는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자기 자녀를 만드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할 것이라야 기껏해야 옷 나눠 주고 돈 나눠 주고 밥퍼주는 것 뿐입니다.

그래도 지옥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이 덮치게 되면 생명입니다.

이런 자들은 좋은 열매가 맺혀 지죠.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양선과 절제와 평강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전히 선악기준에 있는 인간들이 또 함정에 빠져 들죠.


바로 십자가를 전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꼴이 어떤 모습이라도 내세울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게 좋은 열매입니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을 때 자기 꼴 안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옆에 달린 강도도 마찬가지죠.


자기 꼬라지 안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예수님만 보입니다.


그래서 참 성도는 주님이 행하신 구원과 불사름을 담대해 찬양하며 전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묻지도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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