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강해35

푸른 섬 2009. 11. 29. 17:18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

사무엘하24장1-25

한국 텔레비전에 보면 일박이일이라는 오락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곳에 나오는 엠씨들이 즐거하는 게임 중에 복불복 게임이 있습니다.


게임을 해서 게임에 지면 벌칙을 받게 되고 게임에 이기면 벌칙을 면하는 것을 두고 복불복이라고 합니다.


복을 받느냐 복을 받지 못하느냐는 그날 게임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만 아니면 된다고 외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1절이죠.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ㄹ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무슨 이런 말씀이 다 있습니까?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기 위해 다윗을 감동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9장1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 시켜서 약속의 땅에 집어 넣으려고 하시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9가지 재앙을 내려도 바로왕은 마음이 바뀌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바로 왕이 강퍅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다가 방금 읽은 본문에 와서는 여호와께서 바로왕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가장 거북스럽고 기분 나쁘게 하는 말씀이 이런 말씀입니다.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상황.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 결정권이 자신의 손안에 있어야 합니다.

저주든 복이든 내 뜻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 져야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왕이 모든 주도권을 잡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바로왕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후를 보니 어떻습니까?


바로 왕이 주도권을 행사 했습니까?

아니죠?


바로왕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 자신이 느끼는 대로 보이는데 마음가는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마치 모든 것을 자기 뜻과 의지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런 것이 아니었죠?


이 땅에 사는 사람 모두가 이렇게 살아갑니다.

바로 처럼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자기 손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복과 저주가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정말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 볼수록 당황스럽습니다.


인간이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입니다.


왕이라면 당연히 자기 백성수를 세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백성 수를 세는 것이 뭐가 그리 큰 문제입니까?


왕이라면 당연히 백성수를 세어 보면서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이라고 별거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요압장군이 한마디 합니다.

3절을 보세요.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이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 하시나이까 하되”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 왕이 할 말을 요압이 하고 있고 요압이 해야 할 말을 다윗 왕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된 이유를 이미 1절에서 설명해 놓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해 다윗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세요.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 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참 희한하죠.

인구 조사가 끝나니 마음에 자책했습니다.


요압장군이 말할 때에는 듣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너무나 지극히 인간적이죠.

첫째 아담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모습이죠.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이 이런 모습 아닙니까?


주님 사랑하는 일이 아닌 줄 아면서 그냥 그 앎이 내 마음과 행동을 정지 시키지 않죠. 그러고는 꼭 그 일을 행한 후에는 마음에 자책합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12,13절입니다.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 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다윗이 뭐라고 답합니까?

14절을 한번 봅시다.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게 무슨 말씀인줄 알겠습니까?


다윗이 지금 무엇을 고백합니까?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아시겠습니까?


사람의 손에 빠진다는 말은 갓을 통해 세 가지를 말씀하신 재앙 중 두 가지는 사람의 손에 빠질 수 있는 재앙이라는 말입니다.

칠년 기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준비하든지 해결하려고 하겠죠.

석달 동안 대적에게 쫓겨 도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을 도저해 댈 수 없는 재앙, 즉 삼일 동안에 온역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당하기만 해야 합니다.

그냥 닥치는 대로 온 몸을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지금 이런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해 다윗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7절을 보세요.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 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할 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정반대이죠.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명한 다윗이 지금은 자신의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죽음의 자리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을 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곧 자신이 죽어야 될 당사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할 때와 온역이 자신이 인구 조사한 땅에 임했을 때에는 완전히 바뀐 다윗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갓을 통해 다윗에게 행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참 희한하죠. 왜 하필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일까요?

왜 이방인이었던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일까요?


아라우나의 태도를 보세요.

20-21절을 봅시다.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 신복들이 자기를 햐앟여 옴을 보고 나가서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그러자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뭐라고 합니까?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소의 멍에는 아시겠죠. 소를 부릴 때 머리나 목에 얹어 짐을 끌도록 하는 나무 막대 또는 나무 틀을 말합니다. 제구는 탈곡기입니다.


지금 아라우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전재산 다 내 놓겠다는 말입니다.

자기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단을 쌓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데 다 드려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하는 마음과 다른 마음입니까?

누가 말입니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

이방인이었던 아라우나.

진멸당해야 했던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


결국 다윗은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여부스 사람의 것이 다윗 왕 자신의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감동시키신 이유를 이제 알겠습니까?


왕이란 죽음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자입니다.

희생의 자리가 왕의 자리입니다.

희생을 통해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는 자리가 왕의 자리입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을 통해 참 왕되신 예수님이 하실 일을 다윗 왕이 제대로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번제물이 되시고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자기백성 즉 참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제거 되었습니다.


저주가 제거 되었습니다.


우리의 손에, 인간의 손에 복과 저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께 복과 저주가 있습니다.

로마서3장25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런데 인간들은 늘 우깁니다.

복과 저주에 대한 주도권이 나한 테 있지 예수님께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어제 시장에 갔습니다.

어느 상점에 들어가니 그곳에 재물신이 떡 버티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값비싼 것입니다.


왜 그 우상을 상점에 두었겠습니까?

복 받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땀 흘려 번 돈을 투자해서 신을 모셔 두었으면 우리 집에 복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의도지요.


이런 사람은 무엇을 모릅니까? 복과 저주가 뭔지도 모릅니다.

다윗이 정권을 안정시킨 것이 복입니까?

힘을 가진 것이 복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이 죽음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복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임을 아는 자가 복 받은 자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심을 전하는 자가 복 받은 자입니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 처럼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다 드리는 자, 이런 자가 바로 예수님이 주님되심을 제대로 전하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 처럼 모든 것을 다 드려서라도 예수님의 피로 인해 재앙이 끝났음을 담대히 전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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