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강해32

푸른 섬 2009. 11. 8. 17:43

찬양하는 자

사무엘하22장1-27

교회 다니는 사람 집이나 사무실이나 상점에 가면 오늘 우리가 앞서 읽은 말씀이 많이 걸려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불이시오 나의 높은 망대시오 나의 피란처시오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1-4)


여러분 천천히 한번 읽어 보시며 생각해 보세요.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위로가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위로가 되죠.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볼때에 어떨까요?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도 이런 말씀은 참으로 좋은 말씀이죠.


여호와가 누군지 모르지만 어찌되었든지 항상 나의 편이라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람들은 안달나 있습니다.

무엇에 안달나 있는고 하면 하나님을 자신 편으로 만들고 싶어 안달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편 만들고 싶어 안달 났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골라냅니다.

골라먹는 재미라고 할까요.


자신편 만들기에 좋은 말씀만 골라 하나님과 예수님을 철저하게 자기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교회다니는 사람들 가게같은 곳에 가면 하나님이 철저하게 자기 편이라는 성구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4절에 원수들이 나옵니다.

이 원수들이 자기라고는 죽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다윗편이요 예수님 편이요 하나님편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이 땅에 있는 어떤 인간도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다는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런데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성경 말씀입니다.

로마서3장9절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도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실 때 왜 사도바울은 제외, 과거 아브라함은 제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렇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사도바울이나 아브라함도 죄 아래 있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들이 의인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의인이 되었지만 사도바울이나 아브라함은 여전히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의인이지요.

그래서 이들이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 말이 되지 않습니까?


사실 다윗의 찬양속의 하나님의 원수는 다윗을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인간들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사무엘 하11-12장에서 다윗이 여호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찬양은 어떻게 보면 너무 뻔뻔한 찬양이 됩니다.

아니 말도 되지 않는 찬양이지요.


그런데 다윗은 뻔뻔하게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며 자신의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라고 합니다.


좀 심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한 짓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뻔뻔스럽게 감히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냥 성경을 읽어보세요.

다윗 별거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윗이 지금 사용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을 전하는 자로 철저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에서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는 자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19-2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그런데 21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나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를 내 앞에 두고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  그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 목전에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이런 말을 하는 다윗을 보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라고, 네가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다고 웃끼지 마라.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다 다윗이 한 짓을 아는데 무슨 완전하다는 말을 하느냐 말입니다.

갈라디아서3장10절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말씀이 다윗시대에는 해당사항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다윗 시대에도 똑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윗이 이렇게 거만하고 당당하게 말을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여러분은 아시지요.


바로 다윗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땅의 세계가 아니라 하늘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은혜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렇게 뻔뻔하고 거만하고 교만스럽게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편인 것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늘 자신을 위해 일하심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눈에게 그렇게 보이죠.

마치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신의 원수로부터 구원하시고 그들을 멸하신 것을 찬양하는 것 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다윗은 지금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을 보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용하여 여호와의 원수를 어떻게 파하셨는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의가 무엇인지 그 의의 위력이 어떠한지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26-27절을 보세요.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다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다윗이 자비합니까?


원수를 가차없이 죽이는 자가 무슨 자비한 것입니까?

그러니 자비의 기준이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자비입니다.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긍휼입니다.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신다고 하셨는데 누가 완전하다는 말입니까?

주의 완전함이 덮쳐진자 다윗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준이 완전히 다르죠. 우리가 아무리 다윗을 연구해도 다윗은 절대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꺾으신 뼈,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깨끗함을 받았기에 완전하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그의 찬양을 통해 끊임없이 주님의 어린양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자신이 그 피 속에 푹 잠겨 있음을 그 삶 전체를 통해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찬양을 이용해 하나님을 자기 편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마귀적인 생각입니다.


요한계시록4장10-11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심이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잘했다고 받은 면류관을 왜 다시 보좌 앞에 던집니까?

요즘 교회에서는 이 면류관 받으려고 발악하는 자들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런 자들에겐 면류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 물론 그런 일도 없겠지만 이들이 면류관을 받는다면 다시 보좌앞에 면류관을 던지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이 면류관을 어떻게 해서 받은 것인데 내가 보좌 앞에 던지겠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계시록 5장11-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니라”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모든 것이 예수님의 공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라는 말은 일부분의 공로가 아니라 다 주님되신 예수님 홀로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받은 면류관도 다시 돌려 드리며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는 탐욕자들만 가득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희생을, 죽임당한 어린양을 이용만 할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삶이 자신의 삶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이 자기 안에 산다는 것을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다윗의 찬양을 조롱합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조롱하지는 않죠.


다윗의 찬양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대로 이용한다는 것이 바로 다윗의 찬양을 조롱하는 것이지요.


참된 성도는 다윗과 같은 찬양을 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겐 죽임당한 어린양이 덮쳐져 있는 자입니다.


성도가 전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하는 것은 죽임당한 어린양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삶 속에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에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덮쳐져 있는 자입니다.

자기의 삶이 있지만 자기의 삶의 없는 자가 성도입니다. 다윗처럼 철저하게 이용되는 자입니다.

찬양하는 다윗에겐 지금 전혀 자신의 삶이 없습니다.


이런 자가 진정으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을 찬양하는 자입니다.











'사무엘 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해34  (0) 2009.11.23
강해32  (0) 2009.11.15
강해31  (0) 2009.11.01
강해30  (0) 2009.10.25
강해29  (0) 2009.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