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강해

강해 1

푸른 섬 2009. 12. 27. 15:05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요나 1장1-3

몇 일 전에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중이었습니다.

식사가 다 끝나갈 무릅 어떤 사람이 들어 왔습니다.

거지입니다.


그런데 이 거지는 정말 뻔뻔한 거지입니다.

술이 취해가지고 돈을 달라는 것인데 식당 카운트 안 까지 들어가서 돈을 달라고 합니다.


손님이 여러명 앉아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낯익었던 모양입니다.

너 술먹지 말고 도와 달라고 해야지라고 타일렀지만 막무가네.


결국 돈을 좀 주었습니다.

그러자 돈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루 일당 이상을 주었는데도 더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옆 좌석에서 푼돈을 좀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돈으로 똥이나 딱으시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화가 났지만 상종할 가치가 없어서인지 상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거지를 익숙히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수년 전부터 보아온 사람이지요.


빌어 먹는데 이젠 도가 튼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겁나는 것도 없고, 친구의 죽음을 이용해 동냥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푼 돈에 대해서 우습게 여기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대단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0년 동안 한 우물을 파니 이렇게 동냥의 도인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년 동안 무엇을 하든지 해 보면 전문가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새벽기도가 남들이 보기엔  어려워 보일지 모르지만 몇 년 아니 몇주만 하면 익숙해 지고,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설교도 처음하는 것이 어렵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얼마나 익숙해 지는가?

요즘은 인터넷이 좋아서 설교를 그대로 가져다 설교해도 별 문제가 없다.


교인들 다루는 것도 그렇다.

교인 다루는 것도 10년정도 해 보면 전문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떻게 교회에서 살아 남는가?

어떻게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가?


어떻게 위기가 왔을때 그 위기를 벗어 나는가?


사람들과 대화를 할때 어떻게 해야 상대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는가?

교인들과 대화할 때 어떻게 말해야 저들을 내 편으로 끌어 당길수 있는가?


뭐 오만가지들이 첩첩히 쌓여 전문가가 되고 도인이 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런데 제가 그 동냥하는 거지를 보면서 오늘날 교회 목사들이 떠 올랐습니다.

그래. 

목회를 저렇게 하는구나.


아주 무식하게 협박하여 무안할 정도로 만들어서 주머니를 털게 하는 저 수법.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 입장에서만 말하고 행동하는 것.


때론 불쌍해서 동냥 받고, 때론 무안해서 동냥하게 만드는 수법.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교회는 이런 모습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은 부동산과 동산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진작에 알아 차린 목사들이 술취한 거지 처럼 교회에서 깡패짓을 하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 남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십자가든 무엇이든지 이용할만하면 다 이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한적이 없었던 사람 처럼 설교하고 행동합니다.

정말 십자가지신 예수님과 무관하게 말씀을 다루고 사람들을 다룹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2절을 봅시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당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니느웨는 엄청 큰 성인 모양입니다.

앗수르의 수도이니 그렇겠죠.


요나에게 임하신 여호와의 말씀은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는 일입니다.

니느웨의 악독으로 인해 니느웨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외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어떻게 합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하려 합니다.

마침 또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납니다.


뭔가 요나의 의도대로 되어지고 있습니다.

뱃값을 주고 배에 올라 탔습니다.


여러분 이 본문을 읽어보니 무슨 생각이 듭니까?

요나 참 대단하다.

배짱도 좋다.


감히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다니.


이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우린 워낙 믿음이 좋아서 우리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면 당장 들을 텐데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늘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죽어도 주님 말씀을 듣지 않고 몸이 편한 대로 하지 않습니까?

요나 이야기가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요나가 왜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하려 합니까?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기 싫다는 말입니다.


니느웨 같은 나라는 꼭 망해야 하는데 내가 가서 외치면 회개해서 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4장1-2절을 봅시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이신줄을 내가 알았음이니니다”


요나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너무나 잘 알 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가려 한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니느웨는 꼭 망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적국이니 그렇겠죠.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을 때 요나는 속으로 통쾌했을 것입니다.

그래 저런 성은 망해야 돼. 더구나 단순히 적국의 문제가 아니라 악한 짓을 극에 달하도록 행하는 자들 아닙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찌 그리 우리 마음을 잘 아시고 요나같은 선지자를 딱 뽑아서 성경에 기록해 두셨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에 내가 가서 외치면 어쩌면 회개하는 자들이 일어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니느웨가 멸망당하지 않을 수 있으니 그래 튀자.


여호와의 낯을 피해 도망하자.

가급적이면 니느웨와 멀리 떨어진 곳, 갈수 있는 먼 곳 까지 튀자는 것이 요나의 생각이었습니다.


참 단순하죠.


말씀이라는 것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다면 요나가 이런 행동을 했겠습니까?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함으로 그의 마음이 들통 났습니다.

나쁜 놈들은 멸망당해야 돼.


이것이 요나의 생각이죠.

그리고 저들에겐 절대로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안 돼.

이것이 요나의 생각이며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그렇게 예수님이 미웠는지 아시죠.

세리와 창기들과 자신들의 삶을 비교해보세요.


비교가 안 됩니다.

세리와 창기가 천국가면 그런 천국은 가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먼저 천국 간다. 오히려 너희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듣기에 돌아 버릴 말씀 아닙니까?


제가 서론에서 거지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런 놈은 딱 지옥이죠.


그리고 목사 이야기 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이용하는 자들.


우리들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갖습니까?

그래 저런 놈은 지옥 가야해.


내가 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해.

저들을 듣지 않을 꺼야.


그러니 우리끼리 아니 나 혼자 조용히 살고 싶어.

어차피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하실 것 아니냐.


천국 보낼 사람 천국 보낼 것이고, 지옥 보낼 사람 지옥 보낼 것이고.

내가 할 일이 뭐가 있어.


그래 말씀을 피하자.

가급적 말씀과 상관없이 살자.


어차피 말씀과 부딪히면 피곤하게 된다.

귀찮아 진다. 


도망가자, 가급적 멀리. 말씀과 상관없는 곳으로.

그래 주일 예배 가지 말자. 그래 성경 보지 말자. 그래 기도하지 말자. 그래 말씀의 어떤 것도 순종치 말자.  어차피 주님이 알아서 하실 테니.


나 주님 마음 잘 압니다. 성경 말씀 잘 압니다. 그러니 제발 절 귀찮게 하지 마세요.


백날 이렇게 해 봐도 십자가 지신 주님은 자기 백성 앞에 떡하니 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16장14-1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 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믿음 없는 자며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꾸짖으시며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자들에게 무엇을 명하십니까?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을 잡는데 전문가 아닙니까?

예수님 핍박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 사울은 사도 바울이 되어서 오히려 자신이 핍박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이 전하시면 우리가 백날 피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지옥가야 될 자들이라 여겨도 주님이 구원하시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렇게 주님의 일하심에 질질 끌려 다니는 행복한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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