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강해

강해5

푸른 섬 2010. 2. 24. 20:55

요나서4장1-11

요나의 초막

인간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행동을 이끌어 갑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 없이 행동에 나서는 인간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중요한 일을 앞둔 상황에서는 더욱더 치밀해지고 분명합니다.


왜 사람들이 로또를 구입합니까?


미래에 대한 기대입니다.


로또 1등당첨에 대한 기대.


아담이 왜 선악과를 따먹습니까?

기대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기대.


이런 큰 기대가  있었기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첫째 아담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무슨 행동을 해도 무엇을 기대하는 가운데 행동에 나서는 것입니다.


물론 그 궁극은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꿈이 있기에 인간들은 쉴새 없이 행동에 나서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말씀하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접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서 곧장 행동에 나섭니다.

행동에 나서는 이유를 보게 되면 역시나 자신이 하나님처럼되겠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창세기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태어납니다.

가인은 농사꾼이요 아벨은 양치는 자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7절


이 말씀으로 인해 결국 가인은 아벨을 쳐 죽여버립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대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


아벨없으면 비교대상이 없어지잖아요.

너무 싱겁습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싱겁게 보이지만 아벨의 제거야 말로 자신의 분함을 제거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촉매가 되어 가인은 아벨을 죽여버립니다.

환경을 바꾸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꾸어 자신이 하나님행세를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요나 선지자의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심히 싫어하고 노합니다.  뿐만 아니라 죽여달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고 합니다.

망하는 꼴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것이지요.


그런 중 박넝쿨이 자라 요나의 더위를 가시게 합니다.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박넝쿨이 죽어버리자 또 성이 났습니다.

죽기를 구합니다.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다고 합니다.


아마 목사중에 이런 목사가 있었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야. 완전히 지멋대로네.

선지자. 선지자 좋아하네.


네가 선지자면 나는 선지지 할아버지다라고 하지않겠습니까?


아니 여호와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면 선지자된 입장에서 박수를 쳐야 하지 않을까요?

선지자의 외침으로 회개가 일어났으면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끝까지 그 멸망을 지켜 보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박넝쿨로 인해 짜증내는 것 한번 보세요.


이게 선지자의 모습입니까?

지 몸 괴로운 것은 참지 못합니다.

박넝쿨 하나로 인해 죽고싶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니느웨성의 십이만명은 죽어도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이게 선지자의 모습입니까?


오늘날 이런 목사가 있으면 사람들이 이런 목사의 설교를 들으려고 하겠습니까?

아마 백이면 백명이 다 안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기본도 없지 않습니까?

요나선지자의 모습을 보면  정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의 극치같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이 무슨 선지자냐. 무슨 목사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왜 요나가 이렇게 당당하게 여호와하나님께 성을 내고 짜증을 내고 죽고 싶다고 말을 할까요?


요나는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물고기 뱃속에서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들으셨듯이 니느웨성도 마찬가지임을 알고 있습니다. 멸망의 대상인 니느웨성도 기도를 하면 여호와께서 들으실 줄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열왕기상8장에 보면 이방인의 기도도 들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니느웨의 멸망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붙들고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 짜증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의 기대와 너무나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신의 입장을 절대 꺾지 않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보아도 옳기 때문이죠.


여기에서 말씀이란 자신의 간절한 바램과 일치하는 말씀이죠.


요나는 자신의 간절함 바램과 일치하는 말씀을 붙들고 니느웨의 멸망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자신을 위해 초막을 지었습니다.


요나 자신을 위해 지은 초막에 여호와께서는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박넝쿨로 인해 시원해지니 기분이 째집니다. 이젠 니느웨성이 멸망당하는 꼴만 보면 되겠구나입니다.


그런데 이튿날 박넝쿨이 말라 죽었습니다. 여호와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젠 박넝쿨 때문에 죽겠다고 합니다.


여호와하나님께서 니느웨성을 멸망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고싶다더니 이젠 아주 하찮은 박넝쿨로 인해 죽겠다고 합니다.


자기 원대로 안되니 꺼집어 내는 것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참 희한하죠. 배에서는 아주 의연한 모습을 보이더니 왜 이렇게 사람이 바뀌었을까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니느웨성이 멸망당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짜증나는 것입니다.


요나서 결론이 없습니다.

요나가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에 동의했다. 아니면 동의하지 않았다. 뭐 이런 것이 있어야 하는데 여호와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밝히시고 끝을 맺어버립니다.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위주로 해석했다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정도 일까요?


하나님도 요나의 기대에 동조해야하는 하나님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유입니다.

마태복음16장21-23절을 봅시다.

“이 때로부터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 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거부합니까?

그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자신의 목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기대로 예수님을 따랐는데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다고 하니 붙들고 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부활이 뭔지도 모르니 당연히 그렇겠죠.

죽음을 모르는데 부활을 알 리가 없죠.


베드로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살기위해서,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도 오직 마음의 중심엔 자기 자신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기대, 희망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기대와 희망을 위해 행동 하나하나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뭐라고 하십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합니다.


사단입니다.


사단의 일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기대와 희망을 갖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십자가가 왜 일어납니까. 왜 자꾸 십자가가 발생합니까?

자신이 미리 만들어 놓은 기대와 희망으로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몇 일 전에 제 친구랑 통화를 하는데 그 친구가 저에게 마귀가 뭔지는 아냐고 물었습니다.


마귀가 뭔지는 알고 마귀의 앞잡이라는 글을 썼냐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기대에 부응 못하는 십자가는 안된다고 행동에 나서는 자가 바로 사단입니다.


요나선지자는 지금 자신이 하나님 편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자신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바램을 충족해 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누가 누구를 핍박하는 꼴이 됩니까?

니느웨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요나와 여호와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우린 어떤 일이 발생할 때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습니다.

이 버릇은 죽을 때 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요나가 우리들이 보기에 별종인 선지자 같지만 절대 별종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별종과 주님의 희생이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우리가 하나님 입장이었다면 요나 선지자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박넝쿨까지 준비해 주겠습니까?


끝까지 못 알아 차리는 요나에게 박넝쿨을 말라 죽게까지 하여 요나선지자를 찾아오신 주님의 희생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아버지의 일을 하실 뿐입니다.

우린 나름대로 무언가 기대하는 바대로 행동에 나섭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희생이 발생합니다.

십자가가 일어납니다.


성도는 이런 만남을 가지는 자입니다.


그러나 성도 아닌 자는 이런 만남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는 십자가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만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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