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강해

강해2

푸른 섬 2010. 1. 3. 21:04

큰 두려움

요나서1장4-16


오늘 본문을 보면 아주 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위에 내리셨습니다.

여러분 바다에서 큰 바람이 이는 것이 여사일 아닙니까?


그런데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위에 내리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릅니다.

신을 부른다는 것은 구원해 달라는 것 아닙니까?


신의 도움을 구하면서 자신들이 할 일을 행합니다.

바로 배를 가볍게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면 배가 큰 파도를 조금이라도 잘 견딜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찌되었든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신의 도움이 필요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요나는 뭘 합니까?

배 밑층에서 깊이 잠 들었습니다.


참 대조적입니다.


한 사람은 깊은 잠에 빠져 쿨쿨 잠을 자는데 다른 모든 사람들은 지금 죽음에 직면하여 신을 부르고 자신들이 할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아 봅니다.


이때 선장이 요나에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고 합니다.


선장의 말은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를 믿어서 하나님께 구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아주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그 상황으로 들어가 보면 그런 것이 아니지요.


다른 성경 번역서를 보면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선장이 와서 보고 야단쳤다. "이런 판국에 잠을 자다니! 너도 일어나 너의 신에게 부르짖어 보아라. 너의 신이 우리를 생각해서 행여나 살려 주실지 아느냐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죠.

하나님이라고 번역해 놓으니 사람들이 헷갈립니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다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장은 지금 다급하니 잠자지 말고 너의 신에게 부르짖어라는 것이지요.


배에 탄 사람 모두가 힘을 모아 한 마음으로 각자의 신께 기도하면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게 그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최후의 방법을 내세웁니다.


7절을 봅시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참 제미 있지 않습니까?

제비뽑기.


아마 그 당시 뱃 사람들이 종종 이런 방법을 사용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파선의 위기에 처한 자들, 죽음 앞에 선 자들이 제비뽑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을 제물로 드리면 신의 노여움이 가라앉지 않겠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죽음에 직면한 이유는 배에 탄 사람 중 하나가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흰한하게도 누가 뽑힙니까?

바로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요나에게 재앙이 무슨 연고로 왔는지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나를 물었습니다.


이게 뱃사람들이 제비 뽑힌 자들에게 기본적으로 묻는 물음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희한하지 않습니까?


저들이 하나님이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하나님께서 물으실 물음이 이들이 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대답합니다.

9-10절을 봅시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 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쪽팔려서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텐데 그런 와중에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뭐라고 합니까?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래 놓고 하는 말이 그렇게 경외하는 자가 여호와의 낯을 피해 도망하는 중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어떻게 합니까?

두려워하여 요나를 원망하죠.


뱃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죽음이 두려운 것이죠.


이제 바다가 더욱더 사납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요나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이에 요나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자신을 바다에 던져 죽여라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른 뱃 사람들은 다 자신들이 살려고 발부둥 치는데 요나 선지자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자신만 배에서 없어지면 나머지 배에 탄 사람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이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갈 때까지 가보자고 합니다.


그런데 바다가 그들을 향해 점점 더 흉용해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항복합니다.

14절입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자신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것을 두고 죄를 묻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 요나를 바다에 던지면서 하는 말이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어찌 여기 앉아 있는 우리와 똑 같은 말을 합니까?

주의 뜻이기에 우리들이 어쩔 수 없어서 요나를 바다에 던져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말을 주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서 행동합니다라고 하면서 실은 자신이 살고 싶어 환장해서 요나를 죽여버립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바다가 잠잠해 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갖죠.

그래 배에 탄 사람들이 틀리지 않았구나.


자신들이 살기 위해 요나를 바다에 던진 것이 정말 하나님 뜻에 맞는 행동이었구나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성경을 읽어 보면 그렇게 보이지요.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 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이전에 두려워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큰 파도입니다.

죽음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심지어 주 하나님 여호와의 뜻을 따라 요나를 바다에 던져 죽였습니다.


그러자 바다가 잠잠해 졌습니다.


그런데 배에 탄 사람들이 다른 큰  두려움을 만납니다.

큰 풍랑과 차원이 다른 두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바로 참되신 여호와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되신 여호와를 알게 되면 이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혔습니다.


파도가 주는 두려움과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요나의 죽음과 파도의 잠잠함을 목격한 그들은 어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을까요?

우리가 두려워한 큰 파도, 우리가 두려워한 죽음, 이런 것들은 여호와 앞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절대 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한 것입니다.  여호와만을 섬기기로 서원한 것이지요.


이들은 지금껏 무엇을 섬기는 자들입니까. 우상 아닙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들을 섬기는 자들이었죠.


그러니 두려움은 늘 상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두려움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파도가 잠잠해지는 것을 본 이들은  진정 두려워할 대상이 죽음을 지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거친 파도나 죽음은  별거 아닌게 됩니다.


저들이 드린 제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요나입니다.


이들은 요나의 죽음을 통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요나의 죽음을 통해 이들은 죽음이 두려운 자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두려우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2장14-18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 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능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인간들은 무엇을 두려워 합니까?

죽음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혈육에 속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주가 되셔서 사망의 세력에서 놓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11장을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신의 오빠 나사라가 죽으니 어떻게 예수님을 대했습니까?

울고불고 난리 아닙니까?


25-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 합니까?

진정 누구를 경외합니까?


죽음입니까?

아니면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되신 예수님입니까?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두려운 자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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