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강해

강해 4

푸른 섬 2010. 1. 17. 13:57

뜻을 돌이키사

요나3장1-10

예수님께서 아기로 태어 나셨다는 사실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냐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실이 못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신성화해야 좀 속이 시원해집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를 그냥 한 여자에 불과하다면 예수님의 탄생이 실망스러울 따름입니다.


누가복음5장27-33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정말 못 마땅한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적어도 신이 이 땅에 내려 와서 구원을 해 준다면 누구를 구원해야 합니까?

의인을 구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죄가 그래도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구원해야 신답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누구와 놀고 계십니까?


세리와 죄인.


바리새인이 이런 예수님을 볼 때 어떻겠습니까?


예를 한번 들어 볼까요?

어떤 사람은 십일조도 잘하고, 주일예배, 수요 예배,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습니다.

특히 이런 일을 잘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목사들이나 전도사들이죠.

장로도 그럴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이들은 남을 위해 구제도 잘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그냥 돌려 보내지 않습니다.

매달 꼬박꼬박 구제를 합니다.


어려운 이를 만나면 도와줍니다.


텔레비전을 보니 어려운 사람을, 그것도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을 도와 주는 사람들이 나옵디다.


자기 자신도 아닌 다른 사람의 자식을 자신의 자녀와 똑 같이 키웁니다.

교회 생활도 잘하고, 직장 생활도 모범을 보입니다. 정직하게 정직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일을 합니다.


누가 봐도 천국 가는 것에 동의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과 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기 치는놈, 살인한 놈, 강도짓 한 놈, 강간한 놈, 몸 파는 여자, 남을 도와 주기는 커녕 자기것만 챙기는 사람, 십일조는 커녕 땡전 한닢 헌금 하지 않는 사람, 주일날 만 되면 자기 일이 바빠 예배에 빠지는 사람과 만나시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분노가 이해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이럴 때 화를 내죠.

자신은 다른 친구들 보다 잘 했는데 왜 자신은 칭찬하지 않고 다른 친구를 선생님이 칭찬하느냐는 것이죠.


자신이 다른 친구보다 보족하면 문제가 없는데 잘하고 있다 생각할 때 칭찬이 다른 친구에게 가 보세요.


아마 이 지구상에 사는 인간들이 이 생각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 나름대로 성실히 살았고, 남에게 나쁜지 하지 않았고, 십일조 하고, 봉사하고, 가난한 자 도와 준 나는 무시하고 나보다 찌찔이도 못난 자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을 보면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느끼는 느낌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비방합니다. 제자들을 비방했다는 말은 예수님을 비방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선생이 개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제자도 저 모양 저꼬라지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말하는 저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렇게 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그래, 그래도 저 예수가 우릴 건강한 자로 인정은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면서 자신들이 예수님의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당신의 제자들도 우리 편에 들어오게 하시오라는 뜻이지요.


당신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건강한 자에겐 의원이 쓸데 없다는 말을 듣고나서 말입니다.


이들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땅에 어느 누구도 건강한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듣는 자신들은 아주 건강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헌금 잘하죠 십일조 잘하죠 교회 봉사, 사회 봉사, 구제 잘하죠 뭐 험잡을 때 없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들이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은 건강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들이 저들의 함정에 빠져 버리도록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 너거들은 건강한 자라고 스스로 생각해서 너거들 건강하게 살아라는 말씀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병든 자에게 필요한 의원으로 오신 것입니다.


자칭 타칭 의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런 자들은 버려 두시고 오히려 죄인을 불러 회개 시켜 구원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그야 당신 설교가 맞죠.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질 않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십일조 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구제하는 것이 뭐가 나쁘다 말이요.


그러니 당신의 설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설교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 보지 않아서 아마 이런 생각이 안 들지 모르겠습니다 마는 주님을 위해 열심을 낸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저에게 이런 식으로 반박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 하는 것인데 그게 뭐 나쁜 것이요.

수 천 억원 어치의 예배당 짓는 것도 다 주님을 위한 것이요. 여기서도 잘아는 사랑의 교회가 수천 몇백 억원의 예배당 짓는다고 하는데.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데 뭐가 문제가 되겠소.


그것도 죄란 말이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바리새인과 똑같이 듣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이제 건강한 자들이다. 의인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일은 다 의롭다.

그러니 예수 당신도 우리의 하는 일에 지지하시고 우리가 하는 일에 함께 동참하시오.


내가 헌금하면 옳다 하시고 내가 수천억 예배당 지으면 지지 하시고,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예수님을 믿고 하니 다 지지해 주시오.

이것은 죄짓는 일이 아니라 의로운 일이요.


이게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충성봉사한 사람들은 자신을 절대로 죄인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지난 과거일 뿐입니다.

이젠 의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누가복음 5장에서 말씀하시는 말씀은 저와 상관이 없는 말씀아닙니까?

바리새인같은 자들이 들어야 되는 말씀 맞죠?


저희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고자하신 일, 즉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한 자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지금 우리들은 회개한 의인이 아닙니까?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죠.

회개한 의인.


그러니 우린 늘상 예수님 편에 서 있으니 무슨 일을 해도 의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누구의 생각입니까?

바리새인들의 생각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까?

믿었습니다. 

세례요한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뭘 인정못하겠다는 말입니까?

우리와 놀지 않는 예수는 인정치 않겠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의 놀이 문화에 함께 동참하지 않는 예수는 싫다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요 목사들, 장로들, 교인들의 모습아닙니까?


이들에게 당신이 바리새인과 같은 죄인이요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이 예수님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이려는 그런 악한 죄인이요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절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전 주님편인데요. 전 예수님 편인데요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의인들이죠.

지옥 갈 의인들.


놀랍지 않습니까?

지옥 갈 의인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요나서 3장을 보게 되면 너무 이상한 일이 일어나 버렸습니다.

요나의 선포를 듣고 백성부터 왕까지, 그리고 모든 짐승까지 회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요나가 상상했던 일일까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과 그 왕을 회개케 하여 멸망시키지 않으시느냔 말입니다.


그들을 그냥 강퍅케 두어 본보기로 삼아야 할 터인데 왜 뜻을 돌이키시느냐 말입니다.


이게 바리새인들의 마음 아닙니까?

세리와 죄인들과 놀면 안되요. 우린 그들과 안 놀아요. 우린 고귀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예수 당신도 우리편에 와서 놀아요. 어떻게 지옥갈 자들과 함께 놀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니느웨편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좀 심판 표현을 했죠.


그런데 지금 요나가 보기엔 그런 것이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늘상 이런 식입니다.

즉 인간들을 아주 기분나쁘게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상식, 기대, 지혜를 무참히 짓밟아 버리시면서 일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꾸 예수님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어서 자신들의 놀이문화 안에 놀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죄를 십자가로 고발해 버립니다.

너희들의 그런 놀아 문화 때문에 내가 죽었다.


마치 요나가 멸망을 니느웨성에 고하듯이.


이런 상황에서 회개하는 자들과 강퍅한 자들이 갈라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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