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강해 4

푸른 섬 2010. 8. 29. 13:05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스바냐3장1-8

1절부터 보이는 말씀이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성읍이 화 있을 진저라고 합니다.

패역하다, 더럽다. 포학하다는 규정을 무엇을 기준으로 하시는 말씀일까요?


사람들은 그 기준을 무엇으로 둘까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이 그 기준점입니다.


예를 들면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성읍이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더럽다. 패역하다. 포학하다는 이해를 갖게 됩니다.


그저께 이런 질문을 보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의 삶, 예를 들면 마케도니아 교인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런 것이 성도에게 지속됩니까 아니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세요.

지속될까요 아니 될까요?


사람들의 관심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 쪽으로 끌어와서 자신이 이해할 수준의 말씀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게 누구의 사고방식입니까?

질투의 불로 소멸될 구약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이해방식입니다.

이들이 성경을 몰라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까요?


이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몰라서 예수님을 죽였나요?

이들이 율법을 몰라서 예수님을 죽였나요?


이들이 제사법을 몰라서 예수님을 죽였나요?

그렇다면 이들이 율법을 무시해서 예수님을 죽였나요?


이들이 제사를 안 드려서  예수님을 죽였나요?

이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 공로를 몰라서 예수님을 죽였나요?


모세오경을 줄줄 외우는 사람들인데,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만 제대로 이해해도 상황파악이 금방 되잖아요.

그러니 저들은 상황파악을 제대로 한 사람들이에요.


왜 자신들이 과거에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했는지 다 알아요.

그것은 말씀을 붙들지 않았기 때문임도 다 알아요.


오늘 2절 말씀에 나오듯이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이런 말씀을 다 알아요.

문제는 말씀이 없어서 망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해석이 예수님의 해석과 너무 다르지 않나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오신 목적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에요.

물론 이 말씀 속에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심판하시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요.


아니 더 적극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를 갈라내 버린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3장에 흔히 말하는 씨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씨가, 복음이 뿌려짐으로 나타나는 땅의 본모습들입니다.


땅이 복음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땅을 규정해 버립니다.

복음이 떨어짐으로 그 복음이 친히 일을 하십니다.


천국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곧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아 버리는 형국이 됩니다.


사실 복음이라는 것을 마귀가 빼앗을 수 없는 노릇 아닙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 부류는 말씀을 기쁨으로 받기는 받아요. 그런데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집니다.


복음이 환난과 핍박을, 말씀이 환난과 핍박을 발생시킵니다.

사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 자체가 이런 사람 속에 들어가 활동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활동으로 인해 환난과 핍박을 초래함으로 말미암아 이 역시 복음과 상관없던 자였음이 드러나죠.


숨길 수 없습니다. 말씀의 활동 앞에서는 말입니다.


그 다음 보면 가시떨기에 뿌려진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한다고 합니다.


말씀과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은 병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염려 속에 사는 인간들, 재리의 유혹, 즉 돈이죠. 이 돈에 미친 인간들을 다 걸러냅니다.


마치 거름종이 같습니다.

말씀이 거름종이입니다.


말씀이라는 것이 이렇게 스스로 일을 하십니다.

물론 주님이시죠.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께서 알아서 자기 백성은 저희 죄에서 구원하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말씀으로 심판의 이유를 확실히 하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23절에 보면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합니까?

열매 맺어라고요.


전도의 열매, 헌금의 열매 등등.


그런데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이 친히 말씀대로 일을 하십니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 같은 사람이죠.

본래 인간이 죄인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인정하든 하지 않던 상관없습니다.


물론 성경전체를 보면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그대로 일치합니다마는 우리의 이해 선에서와 상관없이 말씀의 활동결과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죄인입니다.

말씀이 그 결과물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앞잡이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샘플중의 샘플입니다.


인간이 지옥가야 할 죄인임을 제대로 보여주는 자로서의 사울, 그런 자가 말씀이 일하심으로 열매 맺는 모습.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말씀이 역사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이것을 보여주지 못했죠.

말씀이 스데반을 통해 사울에게 전해졌지만 말씀자체가 누구를 거부합니까?


사울을 거부해 버리죠.


그런데 말씀이 사도바울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되니 열매 맺는 자의 모습이 바울 속에서 드러납니다.


물론 이 열매는 말씀이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에베소서4장7-16절을 봅시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문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기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누가 이 일을 하십니까?

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데까지 이르게 하신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성경을 자기 입장에서 해석해요.

땅의 언어로, 역사적 언어로, 사람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하나님께서 낮아지시어 말씀하셨음을 이해 못해요.


무슨 말이냐고요.

지금 이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 그 말씀을 이루십니까?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이루시잖아요.


말씀을 다 이루신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누가 이룬다는 말씀입니까?

머리되신 예수님이 이루신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러면 우린 무엇으로 드러날까요?

죄인이죠 뭐.


그러면 어떻게 죄인으로 드러납니까?


말씀대로 목사의 은사를 받았다 칩시다.


목사의 은사는 주님이 주셔서 친히 실행하신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목사 짓을 하면서 죄가 드러날 수 있나요.


당연하죠. 성령님은 죄를 늘상 들추어 내시면서 일을 하시니 그렇습니다.

인간을 부인시키면서 일을 하신다 말입니다.


예를 들면 스데반집사님이 죽으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스데반집사님이 훌륭해서 그렇게 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러면 우린 스데반 집사님에 대해 어떻게 봐야 합니까?

스데반 집사님은 죄인을 뿐이야.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부활하신 주님 되신 예수님이 하셨지.


이게 정답 아닙니까?

그러면 간단한 것 아닙니까?


로마서 7장21절 이하를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장으로 넘어갑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능력이  한시라도 없으면 육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거하기 때문에 자신의 본질이 낱낱이 드러나게 됩니다.

핍박과 환난을 자신은 견딜 수 없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뿌리 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친히 열매를 맺으십니다.

이게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실 성령께서 주도하시지요.


로마서 7장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사람들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반드시 탄식하게 만드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죄인 속에 주님이 일하심으로 모든 영광은 오직 주님께만 돌리게 만드십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왜 이렇게 질투의 불에 소멸되는 입장에 처해야 합니까?


3절을 봅시다.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두는 것이 없는 저녁이리요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개판이죠.


그런데 5절을 봅시다.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아침마다 공의를 보이시는데 재판장들, 선지자, 제사장들은 어떻습니까?

딱 반대로 행합니다.


7절을 봅시다.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희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백날 말씀해도 안 듣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제는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재판장, 선지자, 제사장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이들은 말씀 속에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오직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갑니까?


말씀을 위해 살아야 하는 자들이 돈을 위해 삽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들은 돈 외에는 다른 어떤 신도 섬기지 않는 자가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4장14절을 보면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여러분 이런 질투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치사하지 않습니까?


다른 신에게 절했다고 그것을 질투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소멸하는 불로서 심판해 버리신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치사하게 자기만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소멸하는 불로서 심판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참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오늘날로 표현하면 우리가 믿는 주님 되신 예수님이 그러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소멸하는 불로써 심판하십니다. 째째하시잖아요. 분명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게 하는 것도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지 않아서인데, 자신이 그래놓고 질투해서 소멸하는 불로써 지옥보내버리시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재판장, 선지자, 제사장들은 말씀을 백날해도 듣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도대체 누구냐를 드러내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장이 세상입니다.


그러니 백날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는 자들은 듣지 않아야 합니다. 이게 주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이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 또한 주님의 능력입니다.


요한계시록22장11절을 봅시다.

“불의를 하는 자들은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이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까지 빼앗기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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