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강해 3

푸른 섬 2010. 8. 22. 14:10

남은 자

스바냐2장1-15

구약의 소선지서를 보게 되면 참혹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대선지서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마는.

 

지구최후의 날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것 같습니다.

3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언제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까?

2절에 나오지요.

“명령이 시행되지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지 전에 그리할지어다” 라고 하십니다.

 

심판 전에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것이지요.

물론 여호와의 규레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

전제를 뭐로 깔고 있습니까?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과연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여호와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까요?

이들이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들이라는 말입니까?

이들이 여호와를 찾으며 이들이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들일까요?

 

그래서 이들이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는다는 말일까요?

제가 몇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은 어떤

꿈을 갖고 성경을 본다고 말입니다.

그 꿈이 무엇일까요?

자신이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만은 여호와의 심판을 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보면서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그렇지 그렇지. 아무리

여호와께 죄를 범해도 구원 얻을 방법을 마련해 두셨지라고 할 것입니다.

 

그 구원의 방법이 무엇인고 하면 바로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요 겸손하면 됩니다.

여호와의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면 혹시라도

 여호와께서 분노의 날에 구원해 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의 혹시는 반드시라고 해석하죠.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 자체가 우리 인간을

버리기 위해서, 더구나 나 자신을 지옥보내기

위해 기록되어 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나만은 지옥가면 안 돼. 나만은 천국가야 돼.

이런 마음은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 모두가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을 자기 위주로 풀려고 합니다. 해석하려고 하죠.

 

양무리마을 이라는 곳에 가보니까 과거에 신앙 논쟁한 글이 있었습니다.

이근호 목사가 왜 이단인가라는 커다란 카테고리 안에 있었는데..

 

이근호 목사는 십자가 피만 강조한다. 성화는 부정한다.

 무율법주의자다라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상대는 무엇 강조할까요?

십자가 피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즉 피 능력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강조하겠죠.

당연한 것 아닙니까?

 

상대가 비판한 그 비판 반대를 생각해 보면 그런 것이지요.

그러니 성화, 율법을 붙들겠다는 말아닙니까?

 

한 마디로 십자가 피만 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이단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 피의 능력을 인정치 않느냐는 말입니다.

십자가 피 능력을 인정한다면 십자가의 피 능력만

 전해져야 하는데 저들의 논리가 이상하죠.

십자가의 피능력을 인정하자고 하면서 사람의 행위를

내세우니 참 이상한 논리 아닙니까?

 

그들의 주장이 십자가의 피능력을 보여주는

 성도의 삶이라는 그 삶은 곧 십자가의 피를 전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들은 피만 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논리적으로 무식합니까?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6장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면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라이벌로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피를 전하는 것과 피

 능력의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이 라이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은 언제나 둘이 나타나면 한쪽으로 무게 중심이 기울어집니다.

 

피를 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삶이 어떻게 되었던 피만 내뱉습니다.

그런데 피 능력이 삶을 이야기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삶, 즉 행위를 이야기 합니다.

중심 자체가 다르죠.

 

더 나아가서 관심 자체가 다릅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말씀드리면서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고 하면 피 능력의 삶을 , 성화의 삶을

주장하는 인간들은 오늘 본문을 아무리 보아도 해석해 낼 수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해석일 뿐이죠.

비록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지만 진노의 날,

심판의 날의 경고를 들었기에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고 겸손하게 행하자.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자.

그러면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심판을 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여러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심판하시기 전에 십자가의 피를 믿읍시다.

 

그러면 혹시 여호와의 심판을 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반드시 심판을 피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너무 오버했습니까?

아닙니다.

 

관심이 둘 다 똑같죠.

바로 자기 자신, 자기 자신의 구원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에만 관심이 가 있는 사람과

 십자가의 피 능력, 즉 삶에 관심이 가 있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삶에 관심이 가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가 있다는 말입니다. 말로는 주님의

 십자가의 피만 자랑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피 공로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십자가의 피만을 전하는

사람을 반드시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있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가 무슨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이 될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은 처음부터 어느 누구도 여호와의 심판,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분노를 피할 인간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4,5절 보세요.

“가사가 버리우며, 아스글론이 황폐되며 아스돗이

 백주에 쫓겨나며 에그론이 뽑히우리라 해변 거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진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여호와의 말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블레셋에 대해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갑자기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 지라

 그들이 거기서 양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권고하여 그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니라”

 

유다족속도 다 심판하신다고 하셔놓고

남은 자들이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우리를 어렵게 하는 말씀이죠.

 

이건 아마도 신앙생활하면서 해도 해도 의문이 들 말씀입니다.

모두가 다 멸망당해야 하고 심판받아야 하는데

 도대체 누가 남은 자가 되느냐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돌아왔는데 그들이 남은 자입니까?

예레미아31장7-14절을 한번 봅시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여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숙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정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의 진노가 끝나고 나면 이렇게 남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앞으로 쭉 미끄러져 가버립니다.

 

렘31장31-34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호에 내게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은 누가 봐도 십자가로 언약을

 다 이루신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인 줄 알 것입니다.

모세 율법을 마음 밖에 있었습니다.

 

외부에서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은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모두가 다 죄인임을 들추어내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새언약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법을 둔답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새 언약이 이루어지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여호와를 아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일서2장27절을 봅시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죠?

왜냐하면 우리들이 익숙한 것은 가르치고

 배우고 배워서 믿고 사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사도 요한이 말씀을 통해 수도 없이

 가르치면서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앞선 구절구절들을 보면 다 가르치는 내용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육을 입고

있기 때문에 육적인 표현으로 영적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

그래서 한참 가르치다가 쌩뚱 맞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귀있는 자만 들으라는 것이지요.

 

이 말씀이 예레미아31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13장으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11-16절 말씀을 봅시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도고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아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었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이사야 말씀에 의하면 철저하게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말씀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말씀에 의하면 모두가 다 심판의

대상일 뿐임이 선언되어 버립니다.

비유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말씀 하나하나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말씀을 깨닫습니다.

간단하죠.

보게 해 주시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일을 누가 하십니까?

 

바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이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보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당연히 심판의 대상이요 멸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 주님께서 성령을 자기 백성 각자에게 부어주셔서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성도라면 이미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도대체 성도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어떻게 전하게 하십니까?

 

철저하게 죄를 끄집어내셔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이유를 전함으로 그 피흔적을 성도도 가지게

함으로 예수님이 주님으로 친히 활동하고 계심을 전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주님이심이 전파되는 곳곳에서 죄가

드러나고 그 자리에 주님의 피 흘리심이 전파됩니다.

 

마태복음 10장16절을 봅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 말씀의 의미는 사도행전을 찬찬히 살펴보면 명확히 나옵니다.

바울이나 스데반 집사님이나 성도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뱀같이 지혜롭게 했습니까?

 

주저 없이 죄를 들추어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십자가의 피 복음을 끝까지 사수합니다.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사람의 회개와 상관없이 전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을 전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주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오늘 말씀은 십자가의 피 흘리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전

하는 말씀입니다.

 

그 속에는 심판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 속엔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사람의 가르침이 필요 없는 자입니다.

주님의 영이 열심히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은 오직 예수님이 주님이심만을 전합니다. 피를 통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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