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강해 2

푸른 섬 2010. 8. 16. 09:49

지옥 보내시는 하나님

스바냐1장7-18

은과 금이라는 것은 이 땅을 살면서 없어서는

안 될 물건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돈이지요.

 

 

그저께 길에서 차를 기다리는 중 노란 종이가

차도에서 바람에 날려 다녔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돈. 죽어서도 돈을 쥐어 주어야 하는구나.

 

죽은 사람을 위해 노자 돈 하라고 진짜 돈은 길에다

뿌리지 않고 노란 종이를 길에 막 뿌려 댑니다.

 

돈이라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려면 없어서는 안 될 물건입니다.

 

땅의 백성들은 철저하게 이것을 인정하며, 이것을 믿고 살아갑니다.

 

돈이란 것이 없어지면 곧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돈 많은 인간들은 돈을 생각할 때 다른 라이벌,

다른 재벌과의 경쟁으로 돈을 번다고 합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살아가야 될 이유를

 돈 버는 것에 두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8절을 봅시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 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은과 금이라는 것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는

아무 효력,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심판이 임할 때 돈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마치 죽은 자에게 돈이 필요 없어 값싼

노란 종이를 막 뿌려 대듯이 말입니다.

 

죽은 자에게 돈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황금을 가득 넣어 줘 보세요.

도굴꾼들만 좋아라 하겠지요.

 

천년 먹은 여우가 좋아라 그 무덤을 파는게 아닙니다.

 

그러니 은과 금 즉 돈이라는 것이 주님이

 심판하실 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과거 노아 홍수 심판 때 돈 가진 자들, 은금을

가진 자들이 살아남았습니까?

 

얼마 전 어떤 영화를 보니 돈 가진 자들이나

권세 가진 자들, 똑똑한 자들만이 살아남는

것을 보았습니다마는 그것은 인간들이 만든 영화일 뿐이지요.

 

인간들의 욕망일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심판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당당히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 때 힘 있다고, 돈 있다고,

금있다고 심판을 견디었습니까?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로써 심판하기 위해 잠시 간수하는 중입니다.

이 말씀은 곧 불로써 심판하신다는 것이지요.

 

불로써 심판하시는데 거기에 은, 금, 돈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권세, 능력, 재능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좋은 관계 아무런 소용없습니다.

 

대통령의 친구가 되어도 소용없습니다.

 

창세기 1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소돔과

고모라가 왜 불로써 심판 당해야 하는지를 확인하신

후 이곳을 불로써 심판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누가 건짐을 받았습니까?

아브라함 때문에 롯이 구원받았지요.

물론 롯에게 속한 가족들도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라고 다 구원되는 것은 아니지요.

농담으로 여긴 사위들은 그냥 불 심판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을 빠져 나오던 롯의 아내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말씀에 순종치 않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금이나 은이나

관계가 아무런 효력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이런 말씀이 우리 귀에 어떻게 들리는가 말입니다.

이런 말씀이 여러분 귀에 어떻게 들리나요.

목사님 참 농담도 잘하시네요.

 

이런 첨단 과학시대를 사는 우리가 무슨

그런 말되 되지 않는 말씀을 믿겠습니까?

라고 할 사람은 별로 없겠지요.

 

아마 아무도 없을 줄 압니다.

그런데 대신 이런 말씀을 하시겠지요.

 

목사님 우리도 다 압니다. 돈이, 은과 금이

우리를 심판에서 건져주지 못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은과 금이 없으면, 돈이 없으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나요?

굶어 죽어야 하나요?

 

우린 늘 이렇게 반문을 합니다.

 

마태복음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6,27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죠.

그런데 우린 이 말씀에 콧방귀를 낍니다.

웃기고 있네.

 

공중의 새는 그렇지. 그런데 우린 아니잖아.

 

이렇게 말하는 자들을 예상하셔서 주님께서 키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도 너무 말도 안 되는 비유를 드시는 것이죠?

그렇지 않나요.

 

키를 마음대로 크게 할 수 있나요.

나 5미터 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되나요.

 

우리가 크고 싶은 만큼 키가 커지는 것이 아니지요.

내 바램과 상관없는 것이 키크기 아닙니까.

 

이것을 우리들이 항상 염려하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에 갖다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약 올리시는 것입니까?

여러분 약 오르지 않습니까?

 

도무지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우리 인간의 입장을 조금도 이해해 주시지 않습니다.

유다나라가 왜 은과 금을 의지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몰랐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몰랐겠습니까?

 

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몸이 무엇을 자꾸 당깁니까? 몸이 무엇을 당깁니까?

 

현실입니다.

은과 금입니다.

 

돈 되는 일이라면 우상숭배도, 정치적 흉내도,

어떤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런 짓을 통해 부자가 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고. 하면 말씀의 하나님은

너무나 멀리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기에 너무 멀리 계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10장6-7절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인간의 본성이 이렇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말씀을 믿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잡으려고 하죠. 그래서 하늘까지,

지옥까지 한번 가서 체험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정신병자가 죽어서 천국보고 왔다고

쓴 글이 사람들로부터 굉장히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당연하죠.

인간들, 모든 인간들의 본성이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볼 것입니다.

 

로마서10장8절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인간들이 이 믿음의 말씀을 들을 리가 있겠습니까?

 

모세를 통해 전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은 현실을 전혀 고려치 않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땅을 밟고 생활하는 우리에겐 말씀이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신들이 안성맞춤입니다.

 

꼭 맞춰 입은 양복 같습니다.

 

너무 너무 마음에 듭니다.

 

어찌 그리 내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대변해 주는지,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남 유다가 금과 은을 섬기는 것입니다.

 

특히 여호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스바냐1장12절입니다.

“그때에 내가 내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

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너무나 우리의 심중에 와 닿는 말씀 아닙니까?

 

모든 복과 저주는 내하기 나름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가 그렇죠.

모든 복과 저주는 누구하기 나름입니까?

 

내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복과 저주라고 하니 무식하게 돈 잘 벌고 못 벌고만

 생각하실 수 있는데 이것도 맞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천국과 지옥도 인간이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천국백성되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것이 말씀대로 살자는 구호입니다.

기복신앙을 버리고 제발 십자가 지신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살아가자. 내가 죽자라고 가르치죠.

 

이것도 심중에 여호와는 복도 화도 내리지 않는

분이라는 스바냐 시대의 유대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말씀중심으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결정된 상황에서 무슨 예수님

흉내 내기 대회하는 것도 아니고, 주님을 이렇게 무시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이들은 처음부터 복과 화는 인간 손에

달렸다고 단정하고 예수님을 믿는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 좀 더 설명 드리겠습니다.

예수님 홀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시는 것을

두고 예수님이 주님이시라고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 때문에 까불다가 죽음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물론 그 죽음을 만든 자는 다름 아닌 그의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자신을 죽인 자들을 오히려

죽임당한 요셉이 살린다는 것입니다.

 

창세기45장8절을 보면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 자를 삼으셨나이다”

 

바로의 아비요 그 온 집의 주라는 것은 지금 흉년이

 든 상태에 있는 요셉의 형제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주가 되는 꿈은

요셉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결국 요셉은 사라지고 말씀을 주신, 꿈을 주신

하나님만 그의 인생여정속에 남아 있습니다.

 

주님의 뜻은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예수님을 죽인 당사자요,

오히려 죽음당한 그분의 피로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자가 끝까지 믿는 자로만 남아야 되는데

왜 예수님을 닮는 자로 남으려고 합니까?

 

주님을 무시해도 이만저만 무시하는 것이 아니지요.

요셉에게 형제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흉년이 들어 우리가 애굽까지 찾아 온 것은 우리의 공으로 돌려 달라’는 것이지요.

애굽까지 찾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요셉이 꿈꾼 것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거꾸로 해석해야합니다.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기근이 들게 하시고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신 것이지요.

 

그러니 그들의 행동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말씀

즉 요셉이 주라는 것을 전하는 도구의 삶이지요.

이게 성도의 제대로 된 모습입니다.

 

복과 화를 내리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참으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일치하는 모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시지 않고, 모든 일은 내가 앞장서서

 다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스바냐 시대가 겹쳐집니다.

 

주님은 살아계시지 않으니 복과 화는 내 손에 달렸소이다.

여러분.

성도는 오히려 여호와의 날을 믿는 자입니다.

 

즉 십자가의 피 공로 아니면 지옥불에 들어 간다는 사실을 믿는 자가 참 성도입니다.

 

꼭 이렇게 부정적으로 설교해야 하나요.

스바냐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피가 복과 저주를 가릅니다.

믿으십니다.

우리의 행위와 관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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