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강해 5

푸른 섬 2010. 9. 5. 16:16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스바냐3장9-17

마태복음25장 1-13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은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보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니느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할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시니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쉽게 대합니다.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Sidney Greidanus 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교하는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말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 해 놓고 성경 해석을 예수님 쪽에서 성경본문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본문해석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이성에 근거하여 성경해석을 합니다.


물론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성경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말하는 것 같죠.


그런데 이 사람은 철저하게 사람 중심적입니다.

본문해석이든 뭐든지 철저하게 성경말씀 중심으로 해석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에서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까지 유추해 냅니다.


유추는 보통 글을 해석할 때 다 하는 것이니 유추까지는 해석을 할 때 인정합니다.


그런데 강해 설교의 모델을 끝 부분에 제시했는데 그것을 한번 보면 이 사람이 왜 구약의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쓴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말입니다.


설교본론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설교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결론에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결론은 간단명료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이슈를 도입하지 말라, 초점을 좁히고, 확대하지 말라, 셋째 설교 목표를 떠나지 말라 넷째 결론은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설교된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청중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당신은 보다 구체적인 제안들을 제공할 수 있는가?


이렇게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알아듣는 말로 설교하라는 말입니다. 즉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설교를 듣고 청중들이  무엇을 할 수 있도록 설교하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이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 해 놓고 설교 결론은 적용으로 끝마칩니다.


이렇게 되면 제가 설교 처음에 읽었던 본문 마태복음25장 1절에서 13절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깨어 있자라는 반응이 나오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란 우리 인간이 얼마든지 이해하고 수용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이 본문을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설교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깨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말이 되죠.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 모두가 졸며 잤잖아요.

그러니 깨어 있어서 신랑을 맞이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니지요?

기름을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충분히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마치셨으면 그렇게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핵심은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고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천지를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말씀하시니 만들어 졌습니다.


요한복음1장으로 가보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지어졌음을 말씀하십니다.


사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능력으로 말씀하시니 어느 하나도 말씀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아시겠지요.

성경 말씀은 우리 인간의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이 학문적으로 연구한다고 해서 말씀이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역사적, 문예적, 통시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말씀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해석이야 해 내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해석해 보아야 육적해석입니다.

즉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죽이는 해석입니다. 지옥 보내는 해석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애써도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는데 거듭난 척 하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성령으로 거듭나겠다고 덤비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말씀이지요.


주님께서 성령을 주실 때에만이 주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태복음25장에 나오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육으로 난 사람은 알아먹을 수 가 없어요.

기껏해야 육적으로 알아들을 것입니다.


다시 마태복음25장으로 가서 열 처녀 비유를 보면 예수님의 비유가 좀 맞지 않아요.


기름을 준비 못한 미련한 처녀의 문제점을 다루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것을 말씀하셨다면 깨어 있으라고 비유 결론을 맺으시면 곤란하지 않습니다.


문법적으로 맞지 않잖아요.

앞뒤가 맞아야 되는 것이 상식이요 기본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사용하는 기본적인 문법도 이해 못한 무식한 분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인간들이  연구하여 갖게 된 글의 해석능력을 갖고 성경을 해석한다면 열 처녀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쪼다가 되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하셨으면 슬기로운 처녀는 깨어 있어서 신랑을 맞았고 미련한 처녀는 졸거나 잤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를 해야지요.


예수님께서는 분명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 비유 등을 다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사용하심으로 말미암아 육으로 난 것은 육임을 분명히 해 버리시고 성령으로 난 자들만을 쏙 뽑아 내 버리십니다.


그러니 열 처녀 비유의 핵심은 말씀하시는 주님 되신 예수님에 있습니다.


신랑 되는 분은 처음부터 기름을 넉넉히 준비한 처녀들만 혼인잔치에 참석시킬 것을 의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이 없을 때 신랑이 온 것입니다.


우린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신랑이 기름을 준비하러 간 여인들을 만나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왜 하필 예수님께서는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만이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하셨을까요?

여기에 예수님의 함정이 있습니다.


지옥가야 할 자들은 지옥가야 하기 때문에 말씀 속에서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육적인 인간들은 반드시 준비하자는 쪽으로 덤비도록 만들이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라는 말씀 속에 우리는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의 능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라는 말씀이 성도에겐 깨어 있으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성도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다 졸며 자지만 주님이 깨어 있으시기에 졸며 자도 상관없이 신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자들은 참여 시킨다는 말씀입니다.


우린 성경을 해석할 때 자꾸 인간이 구원받는 쪽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철저하게 갈라내는 작업을 하시는 말씀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다우심이 드러날 것 아닙니까?


복음이 전파되면 항상 갈라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를 갈든지 아니면 어찌할꼬라고 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목사들의 설교는 중립지대를 말합니다.

그래서 마치 인간들이 그 중립지대에서 무언가 결정을 하면 마음대로 천국 갈수 있듯이 설교합니다.


이게 마태복음25장에서 주님께서 내리시는 함정입니다.

지옥가야 할 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옥가야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너무 많이 둘러 왔습니다.


9,10절을 봅시다.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드릴지라”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소멸된 이후에 있게 되는 일입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는 말씀입니다.


 11절 말씀을 봅시다.

“그날에 네가 내게 죄를 범한 모든 행위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마치 교만한 자만 제거했기 때문에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을 비춰집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12절부터 봅시다.

“내가 곤고하여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 지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이런 인간 없습니다.

그러니 교만한 자의 제거란 교만한 자만 제거했다는 것이 아니라 새 이스라엘을 주님께서 창조해 내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하시는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의 교만을 제하여 버리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누구만 자랑하는고 하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만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15절을 보세요.

“여호와가 너희 형벌을  제하였고 너희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희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요한복음1장47-5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향해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어떻게 부릅니까?

49절입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임금,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님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왕 여호와, 곧 이스라엘왕 예수님이 너희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38,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이유는 34,35절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정죄라는 말이 나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라는 말은 성도가 늘 정죄를 당할 위치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죄할 것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정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왕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어떤 것도 성도를 정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겐 화를 당할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에서의 화란 포로로 잡혀가거나 죽음을 당하거나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화는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같은 것은 화 축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화란 지옥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 능력과 상관없는 것이 화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이런 두려움이 없겠지요.


17절을 봅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께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3장17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사실 하나님 여호와가 기뻐하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스바냐 3장17절을  보면서 우리 인간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입에선, 삶 속에선 늘 주님의 피공로가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주님의 영이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2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개인이란 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몸만 움직이고 활동합니다.

그래서 온 땅에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을 전합니다.


이런 복을 받은 자가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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