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강해 5

푸른 섬 2010. 9. 12. 21:57

 

칭찬과 명성         스바냐3장18-20

스바냐1장에 보면 요시아라는 이름과 히스기야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스바냐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누굽니까?

히스기야왕입니다.


히스기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열왕기 18장3-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사람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히스기야 왕을 평가하시는 대목입니다.

여러 산당이나 주상, 아세라 목상, 모세가 만든 놋뱀의

 단을 깨뜨리고 부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과 만나는 장소에는 항상 어떤 자들이 함께 할까요?

권력자들입니다.


힘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과 일반 백성들이 함께 공존하는 장소가 산당 같은 곳 아닙니까?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이런 것들을 다 깨뜨리고 부

수었다는 것은 힘을 의지 하지 않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7-9절을 보면 이상한 내용이 나옵니다.


7절에 보면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않았다는

 말씀 속에서 그가 무엇을 믿고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힘을 의지 하지 않은 그가

오히려 블레셋 사람을 쳤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18장13절 이하를 보면 앗수르왕 산헤립이

 올라와 이스라엘의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취해버렸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면서 항복해 버렸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왕이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을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의뢰하는 왕, 

 다윗왕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는데, 앗수르 왕을 의지하지 않고 블레셋 사람도

 쳤다는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우리 같으면 펄쩍 뛰겠지요.


산당도 제하고 하나님께 할 도리를 다 했는데 앗스르

 왕 산헤립에 의해 쫄딱 망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싹 다 끌어 가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스기야왕이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앗수르 왕께 복종하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뢰합니다.


그래서 앗수르 왕이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로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히스기야 왕을 치게 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군사도, 무기도,

 어떠한 능력도 갖지 않았습니다.

앗수르 왕이 싹 다 끌어 가버렸는데 남은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앗수르 군대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너희가 의뢰할 만한 것이 뭐가 있느냐?


이들도 히스기야 왕이 의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웃습니다.


19절부터 보겠습니다.

“랍사게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고하라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의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 네가 싸울 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 하였느냐 이제 네게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지 못하면 그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 왕 바로는 무릇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너희가 혹시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 마는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산당과 제단을  제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명하기를  예루살렘 이 단 앞에서만 

숭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나니 이제 너는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네가 만일 그 말 탄

사람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네게  말 이천 필을

주리라 네가 어찌 내 주의 신복 중 지극히 작은

 장관 하나인들 물리치며 내굽을 의뢰하고

그 병기와 기병을 얻을 듯 하냐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 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


랍사게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할 뿐입니다.


얼마나 제대로 말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뜻에 의해 지금 유다를 멸하러 올라 왔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선지자들의 외침을 알았을까요?


알고 있었겠죠.


그런데 이들이 선지자들의 외침을 해석하는 입장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입장에서의 해석입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대로 해석해냅니다.


아마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랍사게가 말하는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뭐 있어야 말을 하지요.


군사가 있습니까?

핵무기가 있습니까?


아니면 도와줄 원병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어리석은 짓입니다.


예를 들면 돈도 없고, 병이 들었고,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혼자만 있습니까?


그런데 난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미친놈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조롱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이 다 이런 조롱을 당했습니다.


사도바울만 보더라도 그의 손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큰 소리 뻥뻥 칩니다.


사도요한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면 어찌 그리 큰 소리 칩니까?


물론 증인으로서 큰소리입니다 마는.


다른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유배지에 너무 오래 있어서 정신병 걸려서

쓴 글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의 비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감각박탈이라는 제목에서 두 가지 실험이 나옵니다.


한 실험은 전혀 만질 물건이 없는 방음 장치가 된 컴컴한

방에 36시간동안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29명중 25명이 환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복잡한 광경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은 자기 동일성 감각도 잃어버렸답니다.

 

아마 이런 논리에 의하면 사도바울이나 사도요한이 혼자 너무

외롭다 보니 정신병 걸려 그렇게 외치고 다니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조롱할 것입니다.


히스기야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히스기야 왕이 미쳤습니까 아니면 랍사게가 문제입니까?


히스기야 왕이 미친 것입니다. 제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왕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난 모양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말하는 상식적인 사람들이라면 다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이 어떻게 돌아갑니까?

여호와께서 앗수르 군대를 처리해 버립니다.


19장7절을 보면  “내가 한 영을 저희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앗수르 군대는 스스로 물러가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교만하던 앗수르 왕도 반역자의 칼에 죽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히스기야왕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18장 3절입니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라고 평가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한 히스기야의 삶은 그야 말로

극과 극을 경험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린 경험에서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승리를 얻은 경험.


이 중심에 히스기야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삶이 있습니다.


20장에서는 히스기야왕이 병들어 죽게 된 상황도 나와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게 된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여

15년을 더 살게 된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그 징조로 해가 십도를 물러가게 하는 것을 히스기야 왕이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징조를 보여 주셨지요.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15년을 더 살게 됩니다.


그때 바벨론 왕 브로닥 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히스기야 왕에게 보냅니다.


20장13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사자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에게

 보였는데 무릇 황궁과 그 나라 안에 있는 것을 저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라”


결정적으로 히스기야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이 보인 모든 것들을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않게 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살려주시는 은혜로 살아간 히스기야가 아니라 다시 15년을

더 산다는 기쁨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자랑스럽게

바벨론 사자에게 보여 준 것이지요.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히스기야 왕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요시야 왕을 살펴봅시다.

요시아 왕은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왕의 뒤를

이은 왕이 바로 요시아 왕입니다.


스바냐는 이 시대에 써졌습니다.

열왕기 하 22장 2절을 봅시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25절에 보면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이러한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질투의 불로 심판하심과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사사시대부터 시작하여 이렇게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요시야 왕시대에 이런 말씀을 하시느냐 말입니다.


열왕기 하23장26,7절을 봅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가장 여호와의 말씀을 잘 듣는 요시야 왕 시대에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 과거 왕들이 아무리 잘못 했어도 요시야 왕이

철저하게 말씀으로 돌아갔지 않습니까?

그러면 심판을 돌이키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특히 히스기야왕이 뭐가 그리 잘못했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나서 잠시 기분이 너무 좋아 왕이 가진

 모든 것을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 주었을 뿐이지 않습니다.


이런 것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은 좀 너무 한 처사가

아닙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히스기야왕이 우리의 기대와

달리 너무 허무하게 죽어버립니다.

애굽왕에게  므깃도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렇게 율법대로 살았다면 왜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이제 스바냐로 돌아 가봅시다.

왜 심판하신다고 합니까?

우상숭배와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것 때문에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요시야 왕이 말씀중심으로 돌아가자고 하고 백성들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린 스바냐 선지자의 외침은 아마

요시야 왕이 율법 책을 발견하기 전,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기 전이라서 그럴까요?


물론 주석을 보면 아마 스바냐 선지자의 예언은

요시야 왕이 본격적으로 말씀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하기 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바냐 선지자 말씀을 보면 스바냐 선지자

 말씀대로 이루어져 버립니다.

요시야 왕이 말씀중심으로 돌아가자고 이끌어도

 결국은 심판을 당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말씀처럼 되었지요.


히스기야 왕이나 요시야 왕, 가장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들이 있다 할지라도 우상숭배와 힘을

 의지하는 인간의 죄를 막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요시야 왕이 그렇게 말씀대로 행하자고 외쳐 보았자

 그것은 요시야 왕 혼자만의 외침일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백성들은 그냥 마지못해 그렇게 한 것뿐이겠지요.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습니다.

힘만 의지하는데, 믿을 것은 힘, 돈 밖에 없는데

무슨 말씀으로 돌아 가자가 의미 있습니까?


왕이 그러자 하니 마지못해 따라 갔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래도 힘이

최고야. 말씀 좋아하고 있네.


요시야 왕이 허무하게 죽잖아요. 그럴 때

저들이 뭐라 했을까요?

별것 없다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칭찬과 명성입니다.

 

사로잡힘을 돌이키실 때에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신답니다.


도대체 이 일이 언제 이루어집니까?


한번 보세요. 요시야 왕이나 히스기야 왕이 뭐 특별한 게 있습니까?

다른 악한 왕들과 같이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여호와 보시기에는 칭찬과 명성을 얻었습니다.


수욕 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게 중요하죠.


사람들은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신다고 하니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명성을 얻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이 어떤 대우를 받으셨습니까?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죄에서 구원하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은 힘을 자랑하는 바벨론, 앗수르 , 애굽과 같은 상황입니다.


죄의 종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이 땅은 철저하게 강력한 힘의 의지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힘을 믿는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칭찬 명성 없습니다. 온 세상으로부터 없습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세상으로부터는 오로지 미움밖에 받는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힘을 의지하는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명성을 얻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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