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강해 1

푸른 섬 2010. 8. 9. 09:55

말씀이 임한 사람

스바냐 1장1-6

사람은 태어 나면서부터 만남을 갖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상관없는 만남을 갖습니다.

엄마와 만나보기를 학수 고대한 아이는 없습니다.

 

아니면 의사나 간호사를 태어날 때 처음으로 만나 보고

싶었던 아이는 없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의해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부분적으론 자신의 의도가 개입되기도 합니다마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있는 만남 또한 자신이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지요.

문제는 사람과의 만남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만남을 소중히 하게 됩니다.

 

자신의 환경이라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집과 같습니다.

그 환경이 깨어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 적어도 자신이 주어진 환경을

 깨어버리려고 그 만남을 이끌고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상 주어진 안정된 환경을 깨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좀 살만하면 깨어버리고, 좀 정들었다 싶으면 부수어 버립니다.

뭔가 정이 좀 들었다 싶으면 정을 떼게 만듭니다.

 

창세기11장에 보면 노아 집안이 나옵니다.

18-29절을 봅시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업을 시작

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 오십세에 죽었더라"

 

이들 가족이 엄청나게 큰 경험을 했습니다.

홍수 심판을 온 몸으로 경험한 가족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다음은 가족끼리 행복하게 살았더라가 보통 이야기 결론이 아닙니까?

그런데 노아가 포도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담갔던 모양입니다.

 

술에 취해 옷을 벌렁 벗고 누웠습니다.

이 모습을 가나안의 아비 함이 보았어요.

함이 두 형제에게 아비의 이런 모습을 보라고 비웃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두 형제 셈과 야벳은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가려줍니다.

 

술에 깬 노아가 이 사실을 알고 가나안에겐 저주를 셈과 야벳에겐 축복을 퍼붓습니다.

그야 말로 퍼붓죠.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아버지가 자식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

우리가 볼 때 노아가 잘못한 것 분명하잖아요.

왜 포도주 마시고 취해서 옷을 벗고 누웠냐 말입니다.

 

이게 우리의 상식 아닙니까?

그런데 노아가 자신이 술취해 누웠을때 자식들이 한

행동을 보고 가나안에겐 저주를 셈, 야벳에겐 축복을 내렸다 말입니다.

무슨 이런 불합리한 일이 있습니까?

 

성경말씀은 죄인들이 보기에 불합리한 일들도 가득차 있습니다.

아니 성경 전체가 불합리합니다.

그런데 이 죄인들은 성경을 합리적으로 바꾸어 보려고 발부둥 칩니다.

자신들, 죄인들의 이성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성경을 해석해 내려고 별별짓을 다 합니다.

노아가 하는 행동과 말이 이해가 됩니까?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고 다시 보아도 죄인

들은 이해 할수 없는 대목입니다.

크나큰 홍수심판을 함께 지나온 가족들 아닙니까?

남도 아니고 가족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가장의 책임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 가장, 노아가 가정을 박살내 버립니다.

초상집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무슨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까?

그런데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8장20절을 봅시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노아는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가 어떻게 홍수 심판을 견디어

 냈는지를 알수 있는 말씀입니다.

정결한 짐승, 정결한 새의 번제로 인해, 즉 대신 죽은

정결한 짐승, 정결한 새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지나 왔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자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 벗고 누워 있어도 괜찮아요.

그는 이미 은혜 속에 있어요.

 

그러면 또 저에게 반문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술취해도 됩니까?

술 취하세요. 노아처럼 하실 수 있다면 말입니다.

노아는 술취해도 은혜의 세계속에 산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일체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아비 함은 어디에 관심있습니까?

은혜를 입은 아버지 노아의 행동에 관심이 있습니다.

 

술취해 벌거벗고 누운 아비의 행동이 과연 은혜를

입은자의 행동이냐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자의 행위가 맞습니까 아닙니까?

머뭇거릴 필요없죠.

 

우리 인간들 상식은 절대 노아와 같은 자는

은혜를 입은 자가 될 수 없죠.

더더욱 술에서 깬 뒤 함과 가나안을 저주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모습 아닙니까?

그래서 함과 가나안은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함은 홍수심판을 지나 왔지만 함의 생각은 홍수심판이

무언가 자신들의 행위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예를 들면 묵묵히 120년동안 배를 짓는 노아의

행위를 보고 자신들은 충분히 구원받을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 덮혀져서 발생한 것이지요.

 

자신들의 죄악을 덮어주신 그 용서의 은혜를 모르는

 함은 저주를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은혜 속에 사는 노아는 단란한 가족,

행복한 가족이 문제가 될수 없습니다.

은혜을 입은 자로 살기에 은혜를 모르는 자는

저주해 버려야 당연합니다.

 

그래서 가족을 다 깨어 버리더라도,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셈과 야벳이 복을 받은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들의 삶은 그들의 행위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그 은혜에만 관심이 있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사람들이

보기에 도무지 비합리적인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정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죠.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스바냐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면 얼마나 좋을까를 꿈꾸는

자들이 이 땅에 어디 한 둘입니까?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들려지기를

소원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자신들은 결코 자신들의 욕망이라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스바냐 선지자가

받았던 이런 말씀을 받기를 간절히 원할까요?

 

결코 이런 말씀이 임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또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다면 받아야죠.

 

어쩔 수 없이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나지만

그들의 내심을 그렇지 않습니다.

내심도 그러하다면 자신의 바램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죄인 것을 알겠죠.

2절을 보면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그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그 첫마디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해야 합니까?

자신이 속한 가족, 이웃, 자신이 속한 국가등 자신과

관련된 모든 자들에게 선포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면하시겠다는 말씀을 자신이

속한 가족이나 이웃, 민족이나 국가가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외치는 모습입니다.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냥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잘 살아가는 자들에게

 외치는 말이 진멸과 멸절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들이 우상을 섬기니 그렇지.

 

바알과 우상숭배를 주도했던 제사장들,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밀곰, 몰록이라 불린다. 암몬족속의 신)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를 멸절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왜 바알을 섬기고 일월성신께

경배하고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참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들의 편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노아를 통해 보았듯이 참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편이십니다.

즉 언약대로 하시는 분이시죠.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이 싫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우상이 좋을 수 밖에 없죠.

 

여러분 , 우리의 환경을 더욱더 견고히 해 주는 하나님이 좋지 않습니까?

우리의 환경을 깨어 버리는 하나님은 싫지요.

 

보세요. 지금도 당장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나름대로

 잘 살아가는 자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시니 이런

하나님이 좋은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은혜를 입은 사람 빼고요.

 

바알신이 어떤 신입니까?

풍요의 신입니다.

가나안 땅에 있던 농경, 가죽, 다산을 주관하는 신입니다.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는 자들에겐 꼭 필요한 신 아닙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사업 성공하게 하는 하나님,

건강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 자녀를 공부잘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가정에 화목을 가져오시는 하나님,

가정에 행복을 가져오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마태복음3장을 보면 세례요한이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전할 때 어떻게 전합니까?

10절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12절에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사람들이 기대하는 예수님이 이런 예수님입니까?

 

물론 이런 예수님이라고 할 것입니다. 자신은 늘상

 좋은 열매 맺는 쪽, 알곡 쪽에 놓아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좋은 열매 맺고 누가 알곡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도끼를 들고 있는 분, 손에 키를 들고 있는 분이

알곡과 가라지를 나눈다는 사실입니다.

 

 

알곡과 가라지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의해 나누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복음으로 인해 기존에 탄탄하게 세워져 있던 환경들은 허물어집니다.

가정이고 뭐고 상관이 없습니다.

 

오랜 친구고 뭐고 상관이 없습니다.

이 십자가 복음 때문에 모든 관계가 깨어지고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은 절대로 사람 중심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시고 여러분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데 노아처럼, 스바냐 처럼 마음껏

사용되어지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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