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마가복음 14장12-21

푸른 섬 2007. 7. 24. 15:51
 

말씀대로 되어짐

마가복음 14장12-21

오늘은 좀더 어려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 어려운 말씀이 되는고 하면 우리 인간들이 각자 신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신이 신 노릇, 즉 하나님 노릇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들이 받아 들이기에 상당히 어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어디로 가서 유월절을 잡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리 그를 따라 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좀 길었는데, 이해가 되십니까?

성내 가면 물 한 동이를 갖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를 따라 가라. 그가 들어가는 곳 집 주인에게 말해라.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있느뇨 라고 물으라.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준비된 큰 다락방을 보일 것이니 그곳에서 유월절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성내에 들어가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했습니다.

신기하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본문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큰 다락방 주인과 예수님이 치밀하게 약속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또다른 말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택할때부터 가롯유다가 자신을 파는 자로 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너무 잘 나와 있습니다.

70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누가 자신을 팔 것인지를 아셨고, 이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다 자신을 버리고 도망 갈 것도 아시고, 베드로가 저주하며 부인하는 것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유월절 준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고 하면 말씀대로 되어 지는 것을 볼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 신성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약에 약속하신대로 예수님께서 이루어지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이  가룟유다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가룟유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의 부름을 받고 심지어 복음도 전하고, 또 능력도 행하고, 또 어떤 일을 했습니까?

12제자의 회개를 맡지 않았습니까?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가룟유다가 돈궤를 맡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가롯유다는 제자들 중에 어떠한 사람일까요?

사람들이 보기엔 아주 믿을 만한 사람이죠. 상당히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돈궤를 맡겼겠지요.


그러면 다른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가롯유다보다 나은 사람들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태복음20장 20-28절을 보게 되면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예수님께 치맛바람을 일으킵니다.

소위 세상적으로 한 자리 달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도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24절 “열 제자가 듣고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지금 주님은 십자가 지시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데 이들은 여전히 세상적으로 한자리 차지할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열한 제자도 결코 가롯유다보다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보면 분명하지요. 베드로가 어떤 짓을 합니까?

주님을 저주하고 부인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인간적으로 볼때에는 사실 가롯유다나 다른 제자들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가 예수님을 파는 자로 나타날까요?

특별히 그가 못되서 그렇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회개할 기회를 주셨는데 그는 놓쳤다고 하는데 이런 말은 정말 비신앙적태도입니다. 그냥 들으면 고상하고 괜찮은 해석인 것 같지만 실제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좌지우지 할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먼저 다락방 주인이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물동이를 들고가는 사람을 만나고, 그를 따라 가게 되고 예수님 말씀대로 하니 주인이 방을 내어줍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유월절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모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유월절을 먹을 다락방을 준비하는 과정이나,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말씀, 이 모든 것은 오직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피해 갈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가롯유다는 반드시 예수님을 팔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언약을 완성하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가롯유다가 자신 임으로 예수님을 팔지 않았어야 한다는 가설을 내세운다면 말씀성취, 즉 언약을 이루는 분은 주님되신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이 됩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언약성취가 왔다갔다 합니다.


로마서 3: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씀이 로마서11장 32절로 가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놀랍지 않습니까?


인간이 범죄했는데 그 범죄 조차 주님이 마련하셔서 분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 백성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출애굽기 7장 3,4절을 보면 우리들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 마는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찌라”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기 때문에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시고는 여러 큰 재앙을 내린 후에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찌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눈에는 인간들이 찌지고 뽁고 하는 것 같지만 이 모든 것들이 여호와께서 홀로 행하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재미 없죠. 그러면 인간이 뭐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뭐냐고요.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이 피조물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야 합니다.

바로가 같은 자가 나와야 하고, 가롯 유다와 같은 자가 나와야 하고 바울 같은 스데반 집사님같은 분들이 나와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십니다.


가롯유다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분이 나쁘겠죠.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발부둥 치고 자살해도 구원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으로 주님께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설교하면 굉장히 기분나빠합니다.

주님이 홀로 결정다한다면 나는 뭐냐는 것이지요.

뭐긴 뭡니까?

죄인이지요.

주님이 자신의 피조물을 이렇게 사용하시겠다는데 누가 시비 걸겠습니까?


그러나 인간들은 시비겁니다.


가롯유다를 오히려 안타깝게 보면서 그래 제발 주님이 기회주실 때 회개하지 왜 회개 하지 않았어.

나는 가롯유다처럼 되지 말아야지.


이게 우리의 마음대로 될 것 같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가롯유다도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임의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가 그러하죠. 자신의 마음 부드럽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고 해도 결코 듣고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가룟 유다 같은 자를 통해 예수님은 지옥도 보내시는 주님, 심판주님이심을 증거하십니다.

이와 함께 주님을 영접하는 자를 통해 자신의 피를 통해 긍휼을 베푸시어 구원해 주신는 구원의 주님이심을 증거 하십니다.


성도는 이 양쪽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분이 주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아닌 자는 성도 흉내 내는 자는 어떨까요?


결코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자는 태어나지 않은 것이 자신에게 좋을 뻔 한 자입니다. 그러나 이게 자기 마음대로 될까요?


우리 모두 긍휼의 그릇에 참여한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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