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마가복음15:16-32

푸른 섬 2007. 7. 24. 15:53
 

마가복음15:16-32

오늘 새벽 설교 제목을 왕으로 정했습니다.

왕이라고 하면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떠올립니까?


십자가와 왕 이것이 서로 상관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하기야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당연히 상관있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상관있을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놀라운고 하면 예수님이 너무 무기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그야 십자가 지시기 위해 오셨으니 무기력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문둥병, 손 마른자등 모든 병자들, 귀신 들린 자들 등, 많은 사람을 고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우리들이 읽은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볼수 없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지금 저들이 예수님을 두려워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저들은 예수님을 익히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능력을 가지신 분이신지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능력이 있으신지 눈으로 보고 자신이 직접 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예수님을 팔아 먹으면서도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불말과 불병거가 둘러 살 것을 기대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예수님께서 저들 눈을 멀게 하셔서 유유히 빠져 나가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람왕이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 엘리사를 잡으려고 할 때 일어난 일을 기억했는지도 모릅니다.


충분이 이것을 기대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군병들이나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어떻습니까? 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까? 알고 있죠?


그런데 예수님을 두려워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하나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합니까?


하나의 놀잇감으로 예수님을 조롱하지 않습니까?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 같으면 그러지 않을텐데 하지 않습니까?


이게 인간들입니다.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자리를 지킨다면 무슨 짓이든 합니다.

두려워 하지도 않습니다.

아담이 범죄할 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 하지않습니까?

두려워 했다면 왜 선악과를 따먹겠습니까?


이게 죄인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항시 하나님 행세를 하려고 덤벼듭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을 가차 없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러면서 인간들  생각엔 하나님께서 어떤 반응이 나올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냥 당하고만 계십니다.


심지어 강도와 같이 여김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15장 2절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죠. 네 말이 옳도다.


그래서 군병들이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왕에 대한 예를 표합니다.

그러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라고 합니다.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꿇어 엎드리어 절합니다.


희롱을 다한 후에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끌고 갑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29절 하반절부터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떻습니까?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라고 합니다.


함께 목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합니다.


우리들은 오늘 본문에서 인간들의 본모습을 너무나 적나라게 보게 됩니다.

인간들은 십자가 지는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자신보다 약한 하나님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자신들에게 비실비실 거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하나님은 인간의 조롱거리와 하나의 놀잇 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아프셨을까를 생각합니다.

그 고난이 얼마나 크셨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직접 자신의 손에 못을 박고 나무십자가를 지고 걷기도 합니다.


이런 행위들이 다 무슨 짓에 해당되는고 하면 십자가 지시는 주님을 조롱하는 행위에 해당됩니다.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면서 예수님이 당한 고난을 조금이라도 느껴 보겠다고 덤빈다는 것은 예수님을 조롱해도 이만저만 조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조롱받고 비웃음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통해 인간들이 모두다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행위라는 사실을 저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비웃는 자임을 인정치 않는 자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를 전혀 모르는 자들이죠.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은 지옥가도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슨 자신들이 주님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체험해 보려고 합니까?

고난주간만 되면 금식하고 난리법석 야단입니다.


인간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흉내는 과거 유대인들이 최선을 다해서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꼴이 되었습니다.

 이런 행위들을 다 고발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금식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사야 58:6,7절을 봅시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씀을 아는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대로 지켰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참된 금식은 주님께서 이루어주셨습니다.

영생의 길로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입니다.


구약에 예언된 귀머거리가 들으며 소경이 눈을 뜨며라는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눈뜨게 함, 듣게 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요구합니까? 땅의 현상들을 요구하죠.

처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하든 그 말을 이들이 하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마귀의 쫄개로 인간들이 하나님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인냥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주님의 고난을 흉내 낼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영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구나. 보실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도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혀 죽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히려 사람들이 싫어하는 복음, 자신의 탐욕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 전하는 것 때문에 자신의 고난에 동참시키십니다.


이제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사람 시몬을 생각해 보고 마치겠습니다.

이 사람은 그냥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얼른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일로 바쁜 것입니다.

자신의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자기 길을 갑니다.


그런데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그 대표가 사도 바울입니다.


자신은 자신생각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열심을 내었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행위였습니다. 조롱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런 그를 주님은 만나시어 자신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인생으로 삼으셨습니다.

정말 우리가 보기에 억지로 주님께서 지우신 십자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지시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비웃는 자였습니다.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는 예수님께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주님이시니 그 능력으로 이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세요.


십자가에서 내려 오셔서 이 나쁜 놈들을 혼내 주시고 내 소원을 들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이런 모습이 만유의 왕다운 모습이 아닙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그것 때문에 십자가 졌다. 그것을 알고 있느냐.

이것을 믿고 있느냐?


그리고 죄인들이 무엇을 사랑하는 지를, 무엇을 좋아하는 지를 알아라고 하십니다.

왕다운 모습, 신다운 모습을 사랑하고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돌로 떡덩이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다치지 않고, 세상 모든 권세를 가지는 것.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인간들이 이 짓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해 왕노릇하려고 하고, 모든 권세를 부리려고 하고, 신적 능력을 행하려고 하고, 없는 돈이 많이 생기기를 소원하고 소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해 달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불쌍한 인생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길을 가는데 괜히 붙잡혀서 십자가를 지는 구레네 시몬처럼 나는 내 욕심대로, 내 인생의 욕망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왠 은혜인지 나를 부르시어 십자가 지신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행운을 얻은 자가 주님의 백성입니다.


이사야 53:5-6절입니다.

주님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주님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주님이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왕이 이러하시다면 우리는 어떠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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