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 강해 1

푸른 섬 2011. 5. 29. 13:39

여호수아

여호수아1장1-9

신명기34장 9-12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 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9절 말씀과 10-12절 말씀을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제 지도자는 여호수아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모세와 비교해 볼 때 비교할 수 없이 수준이 떨어집니다.

모세는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한판 보여주고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아도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고 시작합니다.

특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신 자였습니다.

이러한 선지자 모세가 죽었습니다.

비록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뽑히긴 했습니다마는 여호수아는 모세와 비교해 볼 때 비교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 더 잘 알까요?

여호수아 자신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여호수와는 모세와 다르게 일을 해야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했고 이적과 기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리 보여주면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렇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직접 부딪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세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이적과 기사를 미리 여러 차례 보여 주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렇지 못합니다.

더욱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지 못한 여호수아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볼 때 어떻게 보겠습니까?

짐작 가십니까?

이런 여호수아의 심정을 여호와께서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이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과는 다릅니다.

출애굽기3장10절에 보면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2절에서는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고 하십니다.

겉으로 보기엔 둘 다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인도자 입장입니다. 이에 반하여 지도자이지만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요단을 건너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입니다.

이미 모세와 여호수아는 그 위치가 완전히 다르지요.

인도자라는 것은 홀로 따로 앞장서고 이스라엘 백성이 뒤를 따라 가면 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야 합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렸듯이 겉모습은 비슷하게 지도자로 보이지마만 모세와 여호수아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을 차별되게 사용하십니다.

제가 차별되게 사용했다라고 하니 기분 나쁜 사람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차별합니까?

모두 공정하게, 공평하게 대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누군 여호와하나님을 대면하게 하고 누군 말씀만 듣게 하고 이것은 불공평한 처사가 아닙니까?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렇잖아요.

모세정도면 그래도 믿고 따를 수 있지요.

그러나 여호수아라면 쫌 그렇지요. 믿고 따르기가.

수준이 많이 떨어지잖아요.

이것이 단지 구약에만 해당사항이라면 문제가 없지요.

오늘을 사는 우리들과 상관이 없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오늘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이런 차별이 적용된다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제가 성경에 없는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주님이 되셨습니다.

주님 되신 분이 성도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복음 전하는 자로, 목사와 교사로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보기엔 차별이 없어 보입니까?

차별이 많아요.

사도권은 딱 열 두 사람에게만 해당사항있지요. 나머지는 사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계시를 기록하고 완성하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사도들이 계시 아니다라고 하면 아닌 것이고 사도들이 계시라고 하면 계시가 됩니다.

바울 서신 보세요. 바울 말 안 들으면 다 이단입니다.

이 정도의 위치가 사도입니다.

그렇다며 사도가 좋습니까 목사가 좋습니까?

간단하지 않습니까?

하기에 사도도 지금은 없으니 우리와 상관 없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2장으로 가 봅시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이 은사장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신데 직임은 여러 가지고, 역사도 여러 가지랍니다.

사도바울이 희한한 예를 듭니다.

몸을 예로 들어서 말합니다.

발, 손, 눈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다면 여러분은 어떤 역할을 하고 싶습니까?

발입니까, 손입니까 눈입니까?

그야 다 중요하니 저는 상관없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더 중요한 부분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아마 눈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사실 눈이 뭔지는 몰라요.

왜냐하면 주님이 보시는 관점과 우리가 보는 관점이 달라요. 단지 자신이 생각하기에 눈이 가장중요하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그 눈의 역할이 거지 나사로의 역할일지 몰라요.

평생 거지로 살면서 온 몸에 병이 들어 개가 친구고, 얻어 먹다 죽는 인생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서로서로 눈이 되고 싶어 하지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몰라요.

물론 사도바울을 통해서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치는 은사,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하는 것등이 다 귀하고 소중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역할을 부여 받아도 감사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우리 인간들 입장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미 여호수아는 차별받고 시작합니다.

인도자가 아닙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아닙니다.

더욱이 모세와 같은 비교 대상을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이끈다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 자신도 그 속의 일원으로서 더불어 행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여기에서는 자신의 위치, 역할이 기분 나쁘다 좋다할 그것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이 부여받은 임무가 너무나 막중합니다.

물론 성경을 읽는 우리는 상당히 기분 나쁘지요. 왜 나를 모세와 같은 자로 세우시지 않고 여호수아로 세웠는가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지 않죠. 여호수아처럼 되고 싶어 하죠.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여호수아처럼 되고 싶다는 것은 지금 자신의 역할이 마음에 든다 들지 않는다, 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호수아처럼 되고 싶지요.

특히 오늘 본문9절 말씀이 자신의 말씀이 되기를 바라잖아요.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왜 그렇게 사람들에게 와 닿을까요?

지금 자신의 목표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에겐 약손의 땅을 차지하는 목표가 있었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겐 취업에 대한 목표, 땅을 구입해야 하는 목표, 결혼해야 하는 목표등 수많은 목표들이 있지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며 탐욕입니다.

탐욕이 있습니다.

그 탐욕을 이루고 싶으니 여호수아 1장 말씀이 너무나 자신에게 와 닿고 필요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내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시고 그 땅, 그 목표를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 너무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들은 제일 중요한 전제를 빼먹어 버려요.

7절을 보세요.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우리가 여호수아 입장이 한번 되어 봅시다.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릴까요?

다 알잖아요. 이미 자신들이 어떤 자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모세가 명한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자들입니까?

아니지요.

모세가 명한 율법을 다지켜 행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율법을 다 지켜 행하는 것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수 있나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듯이 여호수아에게도 여전히 불가능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순종하지도 못할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형통하리라는 말씀을 통해 인간을 놀리는 것일까요?

인간 갖고 장난치시는 것일까요?

주님이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시는데 너희들은 구경해라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약속을 땅을 주시는데 너희들은 죄인으로 드러나라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죄인으로 드러나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약속의 혜택을 입은 자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천국은 노력해야 들어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여호수아가 말씀을 들었고 순종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듯이 우리도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되지요.

순종해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벌써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삭제 되었어야지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니 성경을 볼 때 제발 눈에 안약을 바르고 보셔야 합니다.

요한복음15장20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성도는 핍박받습니다.

핍박받는다고 하니 자 핍박받자고 또 덤벼듭니다.

그런데 누가 핍박받습니까?

성도입니다.

성도는 성령 받은 자입니다.

성령 받은 자는 주님에 의해 사는 자입니다.

주님에 의해 사는 자는 자신이 늘 죄인으로 발각되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핍박을 받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행위가 착해서 핍박을 받았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복음을 전했기에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십자가 복음 전하면 핍박받으니 십자가 복음 전합시다라고 또 말하겠지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자신은 죄인이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을 죽인자고 오직 그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시다.

그 주님에게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낼 권세가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복음전하는 자신도 죄인이라는 말이지요.

여호수아가 이런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은사를 받은 자에게도 여전히 차별이라는 단어가 튀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야만 십자가의 피만 제대로 전해지게 됩니다.

저는 목사가 되고 싶은데요.

저는 성도 많은 목사가 되고 싶은데요.

사례많이 받는 목사가 되고 싶은데요.

돈 많이 벌고 싶어요. 부자 되고 싶어요.

자신이 유명해 졌으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 없는 인간 없지요.

그런데 성령 받은 자는 이런 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는 사실을 알아요.

여호수아를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꿈을 심어 주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용기를 주는 설교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당신을 할 수 있어요라는 자신감을 심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말씀은 이렇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마음이 생기도록 하지요.

이게 말씀의 기능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에게 용기와, 꿈, 희망, 자신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달려가는 고속도로가 되어 버립니다. 속도제한 없는 고속도로입니다.

사도바울의 삶을 보세요.

고린도 전서4장9-13절입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정말 우리들이 싫어하는 모습 아닙니까?

만물의 찌끼.

썩어가는 쓰레기를 많이 목격하잖아요.

그런 자가 성도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처럼 되고 싶나요. 썩어가는 쓰레기입니다. 여호수아처럼 되고 싶나요. 썩어가는 쓰레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만을 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호수아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수아 강해 6  (0) 2011.07.06
여호수아강해 5  (0) 2011.06.26
여호수아 강해 4  (0) 2011.06.19
여호수아 강해 2  (0) 2011.06.06
영주화평교회 주일낯 설교  (0) 2008.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