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 강해 2

푸른 섬 2011. 6. 6. 09:43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여호수아1장10-18

소선지서를 살펴 보면서 우리들이 좀 답답했던 것은 이런 것 아닙니까?

땅에서 어떻게 그런 일들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지 관심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이 땅에 살기 때문에 그렇겠지요.

우리가 하늘의 세계를 산다면 이런 답답함이 없을 것입니다.

땅에서 살기 때문에 묵시세계를 들어도 관심은 땅으로 땅으로.

얼마 전에 20세기신학사상에 대한 글을 좀 읽었습니다.

여러 유명한 신학자들이 나열되었던데 시간이 흐를수록 신학이 변화를 겪습니다.

변화를 겪는데 항상 앞선 신학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신학이 등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은 강력한 중심 권력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각 개인이 가장 큰 권력의 정점에 있습니다.

만일 강력한 중심 권력이 있다면 이런 신학사상을 바로 짓밟아 버리겠지요.

마치 오늘날 노회나 총회 같은 권력 말입니다.

노회와 총회는 자신들의 말을 안 들으면 제거해 버리지요.

신학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이것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사람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을 대합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를 말합니다.

이런 사상은 20세기 이전에도 여전했습니다.

노회나 총회 같은 집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입니다.

아니 하나님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위한 하나님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그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전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의 관심은 신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있어서 적절한 태도를 취하자입니다.

신의 초월성과 신의 내재성을 적절히 균형 맞추자라는 것입니다.

신의 초월성이라고 하니 어렵지요?

신의 내재성이라고 해도 어렵지요.

신의 내재성이 무엇인고하면 신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세상 자체가 신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도 신이고, 나무도 신이고, 바다도 신이고.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 신의 내재성이라는 말입니다. 사물이나 범위 안에 신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반대가 신의 초월성입니다.

초월성의 뜻은 이렇습니다.

일정한 영역이나 한계를 넘어서 그 밖에 또는 그 위에 존재하는 성질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느 영역(領域)ㆍ한계(限界), 차원(次元)의 전체성의 내부(內部)에 있지 아니하고 이것을 넘어서 존재(存在)하는 성질(性質)을 말합니다.

신이 초월해 계시면 우리 인간이 너무 섭섭하지요. 그래서 신의 내재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신의 내재성만 있으면 궁극적으로 인간만 남아요.

그러면 또 섭섭하죠.

그러니 이것들이 적절히 있으면 좋겠지요.

여러 신학자들을 평가하고 비판하면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이런 예를 드는 이유는 사람의 관심은 처음부터 사람 자신에게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아무리 하늘세계가 땅으로 내려 와서 사람의 관심은 오직 자기 몸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명대로 백성의 대표들이라고 할까요?

군대로 말하면 장군들이라 표현할 수 있겠지요.

삼일 안에 여호와께서 주신 땅을 얻기 위해 들어갈 것을 명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기분 좋을까요 나쁠까요?

아주 기분 좋겠지요.

이제 더 이상 광야생활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간다. 삼일 안에 들어간다.

야호 신난다.

정말 신나는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마냥 신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천국 간다고 하면 그냥 좋아 하지요.

어린 아이들 한번 보세요.

지옥 간다고 하면 놀라 자빠집니다.

겁 많이 냅니다. 그런데 천국 간다고 하면 기분 좋아하지요. 그리고 자신은 당연히 천국 간다고 생각을 해요.

이게 어른이라고 바뀔까요?

안 바뀝니다. 물론 그 천국의 내용이 달라졌을 뿐이지요.

천국 간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을 사람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은 천국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땅입니다.

그런데 기분 좋은 것도 잠시 뿐입니다.

12-18절에 어떤 지파들이 등장합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입니다.

여기에서 므낫세 반 지파란 므낫세 지파인데 그들의 절반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이미 여호와께서 주신 땅을 받았습니다.

12,13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이미 이들은 안식을 얻었습니다. 땅을 차지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됐다 . 끝 하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고생하려고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그것도 남을 위해서 말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라면 그래도 할 만한데 남을 위해서 고생을 해야 하고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런 짓 하고 싶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하기 싫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14-15절을 봅시다.

“너희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 편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고 여호와께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얻게 되거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해 돋는 편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 지니라”

땅 차지했으면 안식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안식이 안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장하고 가장 앞장서랍니다.

누구보다 말입니까?

형제보다 앞장서라고 합니다.

형제들이 안식하게 되면 , 땅을 얻게 되면 돌아오라는 것이지요.

듣는 사람 상당히 기분나쁩니다.

여러분들이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가 아니면 기분 좋죠.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그렇게 피해가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속에 꼭 집어넣습니다.

어떨까요?

무장하고 앞장서서 가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도 내 땅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내 형제가 차지하는 땅인데..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답변하겠습니까?

네 가겠습니다. 형제를 위해 당연히 목숨을 버려야지요.

어디서 많이 듣든 말 아닙니까?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말이 그렇지 그게 될까요?

그런데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 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여기깐지 동의되지요.

18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

참 멋진 말 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온 행태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없지요.

그런데 샘플이 뽑혀 졌습니다.

먼저 안식을 얻은 지파들이 오히려 말씀순종에 앞장섭니다.

죽음의 자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야 말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합니다.

죽음이 종류가 두 가지가 나오지요.

말씀 순종으로 인한 죽음과 불순종으로 인한 죽음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여호수아를 시작하면서 이런 사건이 먼저 벌어져야 합니까?

왜 이런 상황을 먼저 발생시키십니까?

이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민수기32장에서 먼저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가 이 땅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엄청나게 책망을 합니다.

그러자 이들이 뭐라고 합니까?

방금 여호수아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그대로 말하지요.

그런데 왜 이 이야기를 여호수아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들은 후 첫 번째 사건으로 등장할까요?

물론 그 사이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장군들에게 명하는 내용이 살짝 끼어 있습니다마는.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것이 궁금했습니다.

왜 이 부분이 제일먼저 사건으로 등장하는가?

그 이유가 민수기 32장에 나옵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가 왜 요단강을 건너지 않으려고 합니까?

땅이 좋기 때문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살기 좋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곳 땅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붙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조건입니다.

민수기 32장18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얻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21-22절에 보면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께서 그 원수를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복종케 하시기까지 싸우면 여호와의 앞에서 나 이스라엘의 앞에서 무죄히 돌아오겠고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산업이 되리라 하십니다.

무엇이 우선입니까?

자신들의 안식이 우선입니까 아니면 여호와의 말씀이 우선입니까?

말씀성취가 우선입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황, 처지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는 자신들의 안식보다 더 중요하고 목숨을 내놓을 만큼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안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성취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말입니다.

저도 이렇게 설교 끝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안식보다, 여러분의 안정보다 예수님 십자가가 더 귀중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리는 버려두시고 주님을 위해 일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에겐 안식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얼마나 설교가 쉽겠습니까?

혹시 여러분도 이런 설교를 듣고 싶은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 속에 잠자든 거인을 깨울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제가 인정해 주어야 하는데 인정해 주지 않으니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교하게 되면 지옥 갑니다.

설교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말입니다.

지금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우리들에게 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본이라는 것이 우리보가 따라 하라, 흉내 내라는 본이 아닙니다.

여러분 벌써 잊었습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이렇게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도저히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이런 태도를 보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제가 여호수아를 보면서 함께 보고 싶은 성경부분이 사도행전입니다.

성령 받으면 천국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령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주님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이 주님이 되셔서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런 자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거듭난 자이지요.

어떻게 거듭났습니까? 어떻게 영생을 얻었습니까?

주님이 주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래 좋지요. 주님이 거저 주시니 좋지요. 나 천국가요. 끝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사람들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참 희한하지요.

성령을 받으니 성령 받은 자들이 무슨소리 합니까?

나 안식 얻었어요. 나 구원받았어요. 나 천국백성이에요라고 합니까?

아니지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입에서 쑥 나와 버려요.

지금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이런 것입니다.

안식 얻었지요. 그런데 안식이란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안식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안식조차 버려두고 목숨 내어 놓고 앞장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안식 얻은 자의 모습입니다.

안식 얻었으니 놀자가 아닙니다. 안식 얻는 자는 오히려 목숨을 내어 놓고 십자가 피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이 여호수아에서는 무장하고 가장 앞장서서 싸움을 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신약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령 받은 자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이제 마음대로 편안하게 살자가 아닙니다.

아니 이제 열심히 주님을 위해 일하자도 아닙니다.

우리도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처럼 주님을 위해 희생합시다도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니 성령 받은 자들의 관심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입니다.

자신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말씀은 어떻게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을 통해 다 이루셨는가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나님께서 초월해 계시는가 아니면 내재하시는가에 관심 없습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본 받자도 없습니다.

성령 받은 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분이 예수님임을 막 내뱉어요.

그러니 어떤 꼴을 당하겠습니까?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전쟁에 앞장서면 죽을까요. 안 죽을까요?

역시 죽습니다.

죽어야 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합니다.

세상은 주님 되신 예수님 중심입니다.

사람 중심 아닙니다.

이게 바로 묵시세계, 하늘 세계이야기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는 이야기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꾸 말합니다. 그게 내 안식과 무슨 상관있느냐. 밥 먹여주냐, 건강하게 해 주냐.

부자 되게 해 주냐?

이런 자는 성령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할까요?

자신의 안식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에겐 예수님도 자기를 위해 있고, 하나님도 자기를 위해 있습니다. 성령도, 성경도.

모든 것들이 자신을 위해서만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겐 오늘 본문이 해당사항 없습니다.

오히려 나 안식 얻었는데 날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죠. 그래서 십자가를 멸시합니다.

십자가를 조롱합니다.

이젠 난 내 마음대로 내 원대로 살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지 않죠.

성도에게서는 다른 것이 흘러나옵니다. 피 흘리신 그 사랑 너무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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