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에서 취한 열두 개의 기념 돌
여호수아4장1-24
본문에 보면 요단강에서 각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하나씩 취하라고 합니다.
열두 돌을 취하여 길갈에 그 돌을 세웁니다.
왜 요단강에서 각 지파 수대로 각기 돌을 취하여 길갈에 세웁니까?
19-24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 치매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좀 이상한 구절이 있지요.
21절 말씀입니다.
훗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우리 생각과 좀 다르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 가운데 이러한 돌탑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돌을 볼 때마다 돌탑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그렇지 않지요. 처음 세워졌을 때에야 그래 저 돌탑이 여호와의 능하신 손을 말씀해 주시고 있지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떨까요?
잊어버립니다. 우리들 같으면 어떨까요?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요.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물이 또 어디 있습니까?
요단강 가운데서 취한 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후손들은 이 돌 탑이 뭐냐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본문이 마치 자녀의 신앙교육을 위해 요단강에서 열두 돌을 취해 돌탑을 쌓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아마 오늘 본문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훗날 자손들은 홍해 건넌 사건도 요단강을 건넌 사건도 모두 잊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염려하여 여호와하나님께서 교육차원에서 열두 돌탑을 쌓으려고 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상식이지요.
왜 그렇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은 가르치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도 들어와 있지요. 교회 안에도 들어 와 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면, 특히 이런 실물교육을 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잘 경외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저 돌이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아하 저 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단 물을 언약궤 앞에서 끊어진 것을 기념하여 세울 열두 돌이다.
저 돌은 요단강에서 열두지파 각자가 하나씩 취한 돌이다. 알겠느냐?
이렇게 하면 자손들이 뭐라고 할까요?
아하, 그렇군요. 여호와 하나님 잘 경외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올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러면 뭐라고 할까요?
그게 저에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이렇게 튀어나옵니다.
이제 제가 일방적으로 결론내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꼬락서니를 여러분들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상 만들고, 섬기고, 돈 섬기고, 바벨로 포로로 잡혀가고, 예수님 죽이고.
이런 자들이 누구입니까?
후일의 후손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린 오늘 본문을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일반 인간들이 생각하듯이 교훈적으로 보면 마귀적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24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의 능하심을 알게 하는 역할입니다.
이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토록 경외해야 하는 자들이지요.
무엇을 증거삼아서.
바로 요단강에서 취한 열두 돌, 길갈에 세운 돌탑을 보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역할을 제대로 했습니까?
못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요단강에서 취한 열두 개의 돌, 길갈에 세운 이 돌탑은 무슨 증거물이 됩니다.
완전히 역으로 사용됩니다.
너희들은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의 능하심을 알게 하지도 못했고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토록 경외하지 않았다는 증거물이 길갈에 세워진 돌탑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들에게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하신 능력의 증거물들은 오히려 너희들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작용하게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앞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후일에 너희 자손들이 질문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까?
관심 없습니다.
단지 이용할 뿐입니다.
호세아 12장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저희는 과연 거짓되도다 길갈에서는 무리가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그 제단은 밭이랑에 쌓인 돌 무더기 같도다”
호세아4장15절에는 “이스라엘아 너는 행음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지어다.
열왕기4장38절을 보면 선지자학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학교가 이곳에 세워진 근거가 이 열두 돌이 바탕을 깔고 있고 물로 여호수아 5장에 나오는 할례도 이곳에서 행해졌다는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보이는 것을 더 중요시 여깁니다.
즉 열두 돌 의 탑이 인간들에겐 더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결국 열두 개의 돌로 된 탑이 세워진 곳이 우상숭배지가 됩니다.
제단이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같다는 호세아 12장11절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4장에서 명하여 세워진 열두 개로 된 돌탑은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이스라엘은 영원히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기념하여 세운 그 돌이 있는 길갈을 우상숭배본거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다시 여호수아 4장24절을 보면 영원히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기 위해 길갈에 돌탑을 쌓게 하셨는데 그곳을 우상숭배지로 만들었습니다.
아마 이런 본문을 보면서 목사들은 이렇게 설교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저들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들은 말씀을 들어서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을 보아라.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니까 저렇게 멸망당했다.
그러니 우리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한다. 어떻게 잘 믿느냐?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가르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까?
요한복음7장47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누가복음18장11,12절에 잘 나옵니다.
한번 읽어 볼까요?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여러분 이 정도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 있습니까?
자신이 토색하지 않았다. 토색이라는 말은 약탈이나 강도짓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 하지 않았답니다. 뿐만 아닙니다. 불의를 행치 않았다고 합니다. 간음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지요. 세리와 같지 않다고 합니다.
내 옆에 어떤 사람을 데려도 놓아도 저는 그런 자와 비교할 수 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오늘날 누구와 꼭 같지 않습니까?
감사를 꼭 빠지지 않게 합니다.
너무나 괜찮은 신앙인 아닙니까?
이런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단지 자신이 하지 않은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하시는군요.
이레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하고.
오늘날 십일조하는 사람, 금식하는 사람, 기도 많이 하는 사람, 전도하는 사람,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세요. 이들이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라고 하지요.
마태복음23장15절을 보면 전도에도 얼마나 열심인지 교인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꼭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 같지요.
바리새인들을 율법의 전문가들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것을 보면 단지 말로면 전문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 모두가 다 수긍할 만하게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하고 사람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감사가 절로 나오는 사람들이지요. 이들의 행위를 보면 우리가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이들의 주장이 누구의 주장입니까?
제가 앞서 말씀드렸지요.
여호수아4장과 호세아12장11절을 보면서
오늘날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우리는 저들과 같이 되지 말자고 생각한다고 했지요.
이러한 생각이 이미 2천 년 전에 바리새인들이 다 했던 생각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전문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즉각 즉각 말씀을 떠올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여호수아를 모르겠습니까?
여호수아 4장 다 알아요.24절도 알아요. 그러면 이들이 길갈을 우상숭배지로 만든 일도 당연히 알겠지요.
이들은 이미 파악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길갈에 세워진 열두 개의 돌로 만들어진 탑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는 것이지요.
여호와를 영원히 경외하기 위해 세워진 돌.
그래 우린 우상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순종하자라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조상들의 실패를 다시 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지킬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말씀대로 우린 살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목사들이나 교인들과는 게임이 안 됩니다.
비교대상이 안됩니다.
조금 순종할 수 있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이들이 무엇을 압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알아요.
제사를 알아요.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유월절을 지켜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니 멸망하고 지금도 저주속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해결방법은 하나 아닙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공로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자.
오늘날 교인들하고 입장이 똑 같지 않습니까?
목사님 성경어디에 유대인들의 그런 생각이 나옵니다.
이들이 명절 지킵니까 안 지킵니까? 지킵니다. 그러면 유월절의 의미를 모르고 지킬까요?
압니다. 알아요. 수준이 우리 수준 아닙니다.
자신들 조상들의 실패가 유월절과 율법의 조화를 시키지 못해서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총체적으로 말하는 장면서 요한복음 7장49절입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왜 자신들이 저주받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자신들은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율법어디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다라는 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어디에 나오느냐 말입니다.
성경에 없어요. 단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예수 당신의 일방적이 주장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여 버립니다.
오늘날 교회가 어떻습니까?
꼭 이런 짓을 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우상숭배 합니다.
온갖 제물을 드리면서 우상숭배 합니다.
십자가가 완전히 우상숭배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이지요.
예수, 십자가 다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느냐?
결국 길갈의 돌들도 우리를 위한 것이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 이말 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십자가의 공로도 믿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가르침도 순종할 수 있다.
제가 너무 심하게 말했습니까?
그러면 다르게 표현해보겠습니다.
예수님 저를 위해 피 흘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을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 자게 되겠습니다.
말씀하옵소서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이것으로 끝납니까?
아니지요. 주님 복을 주옵소서.
이정도만 되어도 양호합니다.
그래도 믿는다는 표현이 나오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이용해 먹지요.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아들이 교회에 갔답니다. 여름성경학교에 갔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교회는 레크레이션하는 곳이니 가도 좋지 않으냐고 했습니다.
친구도 있고.
그렇지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 예수, 십자가.
인간들은, 아니 목사가, 성도라고 하는 자들이 십자가가 전해져야 할 곳을 우상숭배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모든 교회는 우상숭배 하는 곳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요단에서 취한 돌을 세우라고 하셨습니까?
그리고 왜 후손이야기를 끄집어내실까요?
그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기 위해 너희들은 죄인으로 남아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존재이유입니다.
땅의 모든 백성에게 전해야 될 내용입니다.
우리들은 죄인이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어. 그 주님만을 영원토록 전하라고 오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의 삶은 말씀을 들으면서 순종하면서 죄가 드러나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히려 말씀은 말씀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다 이루심을 알게 됩니다.
주님 되신 예수님이 말씀을 말씀대로 다 이루심을 믿는 인생, 목격하는 인생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피만 자랑할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피만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 되신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