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 강해 6

푸른 섬 2011. 7. 6. 22:02

 


할례와 유월절과 군대장관


여호수아5장1-15


할례가 무엇인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할례는 남자생식기 끝을 자라는 것입니다.



창세기17장에서 여호와께서 할례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은 다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든지 돈으로 산자든지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언약합니다.


그러면 할례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 남자는 반드시 할례를 행해야 하지요.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백성에서 제거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할례를 행한 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할례라는 것을 행했다면 영원한 언약 속으로 들어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제거대상이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제거 대상이 아니지요.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들 열조에게 맹세하고 우리에게 주마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이들은 보지 못하게 해 버리십니다.



좀 맞지 않지요.


영원한 언약을 행했다면, 몸에 증거를 갖고 있다면 당연히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게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할례를 행한 자들은 하나도 못 들어가게 합니다.


물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할례를 행지 않은 자들. 즉 할례 받은 자손들의 자손들, 할례 없는 자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길에서 할례를 행치 못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됩니다.


왜 말이 안 되는고 하면 지금 여리고성을 앞에 두고 할례를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적들을 눈앞에 두고 할례를 행합니다.


할례를 하게 되면 삼일 정도는 꼼짝 못해요. 전쟁할 수 없어요. 잘 걸을 수도 없어요.



아무리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의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물을 마른땅으로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았다 하더라도 어떻습니까?



적들 눈에 만일 할례행한 상황이 정탐이라도 된다면 뻔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긴박한 전쟁을 앞두고도 할례를 행하는데 길에서 할례를 행치 못했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요?



40년 광야생활을 한번 돌아보면 이들이 40년 동안 뭘 했습니까?


할례 생각할 겨를이 있었을까요?


출애굽시작도 하기도 전에 원망을 하기 시작해서 40년 내내 여호와 하나님께 불순종 했습니다.



그러니 할례생각 할 수 없지요.



결국 이들은 할례 없는 자로 지금 가나안땅에 들어와 있습니다.


여호와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할례행한 그들의 아버지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했으면 훨씬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할례가 어떤 언약입니까? 임시적입니까 아닙니까? 영원한 언약이라 말입니다.


그러니 뭔가 맞지 않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맞지 않는 것을 맞게 끼워 맞춰야 하겠지요.


여호와하나님께서 착오하실 일은 없겠지요.



간단하게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할례는 영원한 언약이다. 할례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거된다.


그런데 이 할례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육적할례가 아니다.


그런 차원에서 할례 받은 자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할례 없는 자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 왔지요.


이들은 영적할례를 받은 자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떻게 영적인가. 육적할례자체가 영적이 되어 버립니다.



이게 왔다 갔다 합니다.


왜 왔다 갔다 하는고 하면 사람들은 할례 같은 것을 고정시키려고 합니다.


붙들려고 하지요. 왜냐하면 영원한 언약이라 했으니 할례를 기계적으로 생각합니다.


완전 자동으로 여깁니다.



할례행하면 영원히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완전히 다 깨 부셔버리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할례 받은 자들은 못 들어오게 하시고 할례 없는 자들을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하셔서 할례를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례의 의미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그래서 이곳 이름이 길갈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의 수치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바로 광야생활에서 할례 받은 자들이 보여준 그 자세입니다.


그 자세는 어떤 자세입니까?


바로 애굽사람과 같은 사고방식이지요.



시험과 시험의 연속, 애굽의 바로 왕과 너무나 똑같은 짓을 하는 할례 받은 자들.


이게 이들의 수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은 이런 자들이 살수 없는 곳입니다.


약속의 땅의 이런 자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할례 없는 이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할례를 명하신 이유를 아시겠지요?


바로 약속의 땅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할례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들이 할례 받았으니 영원이 이 땅에서 살게 해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땅은 이들을 토해버립니다.



레위기20장22절을 봅시다.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신명기 29장22절 이하를 보면 소돔과 고모라 같은 땅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저주의 땅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지요.



약속의 땅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 관심 있습니다.


따라서 할례언약의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자들이라면 약속의 땅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을 때 공격 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땅은 힘과 무기로 얻는 땅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철저하게 할례언약. 영원한 언약에 근거하여 얻어지는 땅이라는 말입니다.



육의 단절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긍휼로만 얻어지는 땅입니다.



그래서 할례언약을 활용하시어 인간의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싹둑 잘라버리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물론 이렇게 싹둑 잘라도 또 쏙 튀어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언약의 의미, 약속의 땅의 의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할이 제대로 조명되고 밝혀지게 됩니다.



제가 앞서 할례를 말씀드릴 때 영적 할례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로마서 2장28-29를 봅시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를 마음에 한다. 창세기 17장과 맞지 앉지요.


물론 마음의 할례는 이미 예레미아 4장4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니라”



누가 마음의 할례를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분노가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누가 맞게 되는가?


바로 율법에 근거하여 할례를 행한 자들이 맞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오직 성령으로 되어집니다.


성령으로 난 자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과 여호수아 말씀이 무슨 상관있느냐 이게 우리들의 관심 아닙니까?


왜 그들은 전쟁에 앞서서 , 좋은 기회를 앞두고 할례를 행해야만 하는가 말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어떤 자들임을 아는 계기가 됩니다.


어떤 자들이다.


바로 할례 없는 자들이다.



할례 없는 자들이라는 것은 할례언약에 근거하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진 자. 제거된 자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끊어진 자가 할례를 받습니다.



언약백성이 됩니다.


그전에는 아니었습니까?


과거가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요단강을 건넜으니 당연히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이런 것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늘 새롭게 시작합니다.


늘 다시 시작입니다.



우린 이게 싫지요.


좀 과거와 연속해서 계속해서 끌고가면 좋겠지요.



유월절 어린양 고기 먹고 피 바르고 했으면 약속의 땅으로 고속열차 타고 쏙 집어넣어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쭉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자세히 보세요. 단절입니다.



연결점이 없어요.



언약궤로 요단강 건넜다고 약속의 땅에 안 넣어줍니다.


할례를 행해야 해요.



할례 행하지 않으면, 애굽의 수치를 제거하지 않으면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요.


계속해서 새로운 조건들이 붙어요.


물론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또 새로운 것, 또 새로운 것들이 계속해서 달라붙어요.


그래서 약속의 땅이라는 것이 너희들을 위해 있는 땅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땅이라면 벌써 주셨어야 맞지요.


그렇지 않나요.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뭐든지 내 중심입니다.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내 중심으로 해석해요.


예수님도 그렇고, 십자가도 그렇고, 천국도 그렇고.


모든 것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같은 것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요.


단지 이렇게 해석할 것입니다.



그래 할례는 영원한 언약이니 할례를 행해야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지.



그런데 이게 아니잖아요. 다시 말씀드려야 합니까?



아니면 말씀대로 순종하면 들어갑니까?


순종하더라도 못 들어가요.


할례를 했잖아요.



이렇게 말하면 할례도 행하고 다른 율법도 순종하면 들어갈 수 있잖아요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 행해도 못 들어갔다는 말은 볼 것 없다 이 말입니다.


안식일 지키면 들어간다고요.


영원한 언약이라고.



영원한 언약 할례 행해도 못 들어가요.



그러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는가?


어떻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가?



방법은 주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성령을 주시는 방법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십자가의 피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 어떤 행위도 일절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할례를 행한 후에 무엇을 지킵니까?


유월절을 지키지요.



뿐만 아니라 만나도 그치지요.


만나를 왜 주셨는지 아시지요.



원망 아닙니까?


그 원망이 사라집니다.


유월절 지킴과 함께.



어린양의 피로 이들의 죄가 용서되고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누가 나타납니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나죠.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라고 묻지요.



여호수아도 몰라요. 지금 무슨 전쟁을 하고 있는지.


자기가 전쟁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에요.


내편이면 내 편을 들어라, 아니면 난 너와 싸울 것이다라는 말 아닙니까?



그러니 지금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자신이 쥐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상대가 누굽니까?


여호와의 군대 장관입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뭐라고 합니까?


신을 벗어라고 하지요.


왜.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랍니다.



여호수아가 선 땅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약속의 땅 전체가 거룩한 땅입니다.



그러니 거룩한 땅을 누가 차지하게 하십니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친히 전쟁하셔서 차지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신발 벗고 너는 싸울 생각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싸움을 싸우더라도 그것은 여호와의 군대 장관의 싸움이고 승리임을 알아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여호수아가 싸우고, 일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움직이지만 실제로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싸움을 하시고 승리케 하신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몰라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았다고 하면 그 다음은 내가 믿음 갖고 주님께 순종하고, 따라 살려고 해요.



그러다 40년 동안 할례 받은 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갈라디아서6장20절을 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의미를 우린 여호수아5장을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나는 죄인이며 오직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승리하신 주님이심을 전하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자는 늘상 신을 벗을 수밖에 없지요. 대들다가.


이런 자는 늘상 유월절입니다.


이런 자는 늘상 할례를 행하는 자입니다.



물론 이것들은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하시지요.


성령 없는 자들은 할례한 것을 의지하며 삽니다. 유월절은 하나의 기념행사일 뿐입니다.


신발은 이미 벗었으니 직접 싸움에 나서겠다고 합니다.



주님이 살아계셔서 친히 일하심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영을 통해 언제나 유월절을 지키는 자요, 할례를 행하는 자요, 신을 벗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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