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성 돌기
여호수아6장1-14
1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이런 상황에서 여리고 성을 차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군사가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 아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육일동안 하라 십니다.
그리고 칠 일째는 일곱 번을 돌며 제사장들은 양각 나팔을 불라고 하십니다.
제사장들의 양각 나팔소리가 들릴 때에 큰 소리로 외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리고 성으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다시 한 번 설명합니다.
성을 도는데 맨 앞에 누가 설까요?
우린 지금까지 본 바에 의하면 언약궤가 제일 앞에 설 것이라 생각하지요?
그런데 아닙니다.
이번에는 군사들이 제일 앞에 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양각나팔, 즉 뿔나팔을 잡은 제사장들이 섭니다.
그 다음은 언약궤입니다. 그 다음 다시 군사들이 섭니다.
순서가 좀 요상하지요.
우린 이미 언약궤를 앞장세우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군사가 가장 앞장서고 그다음 뿔나팔 부는 제사장들 그리고 언약궤, 그리고 군사순으로 성을 돕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있어서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규칙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순서를 뒤틀어 버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뭔가 규칙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성경에 이런 내용이 있으니 이런 내용으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들어 주실 거야라고 생각하지요.
대표적인 경우가 40일 금식기도이지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주리셨잖아요. 그래서 자기도 그 흉내를 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말 있잖아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갈지어다.
예수님 흉내 내지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부흥사들이 많이 사용했죠.
아니면 치유기도해준다는 수많은 권사들이 많이 써 먹었습니다.
저 어릴 때 참으로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이 구절이 마음에 들잖아요. 뭔가 된 것 같고 내가 뭔가 힘이 있는 것 같은 구절이잖아요.
이런 말 한다고 사탄이 물러갈까요?
그럴 것 같으면 이미 사탄은 다 물러 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다르지 않지요. 이들도 아미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언약궤 앞장세워 가면 여리고성이 어떻게 될 것이다라고 예상을 했을 것입니다.
이들도 사람인데 예상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와 다른 사람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와 똑 같아요.
그런데 이들의 예상이 빗나가 버립니다.
완전 딴판입니다.
군사가 가장 앞장서라. 그 다음은 뿔나팔 든 제사장들, 그다음 언약궤, 그 마지막이 군사입니다.
이렇게 보면 또 사람들은 생각하지요.
그래 전쟁은 이렇게 해야지.
군사가 앞뒤에서 보호하는 것이 기본이지.
그런 것 아닙니다. 언약궤는 보호하지 않아도 홀로 일을 하십니다.
처음 듣습니까?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요?
블레셋과 전쟁할 때 전쟁에 패하니 언약궤를 앞장세웠지요.
그런데 전쟁에 패하고 언약궤도 빼앗겨 버렸습니다. 언약궤 담당한 제사장들, 즉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언약궤를 빼앗은 블레셋이 언약궤를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당에 들어가 다곤 곁에 두었습니다.
다곤신이 뭐냐면
서부 셈족의 신입니다. 풍작의 신으로 고대 근동지방에서 널리 숭배했습니다. Dagan은 히브리어와 우가리트어에서 '곡식'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였으며, 다곤 신은 쟁기를 발명한 전설상의 신이었답니다. 일찍이 BC 2500년경부터 이미 다곤 신을 숭배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라스샴라(고대 우가리트)에서 발견된 문헌에 따르면 다곤은 바알 신의 아버지였다. 라스샴라에 다곤 신을 모시는 중요한 신전이 있었고, 특히 다곤이 필리스틴 사람들의 신으로 알려져 있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아셀의 벳다곤(여호수아 19:27), 가자(사사기 16:23), 아스돗( 사무엘상 5:2~7)을 비롯한 여러 곳에 다곤의 신당이 있었습니다. 라스샴라에서는 분명 최고신인 '엘'(El)에 뒤이어 2번째로 중요한 신이었지만, 풍요의 신으로서 농사를 풍작으로 이끌어 주는 기능은 BC 1500년경에 바알 신에게 넘어간 것으로 여겨집니다.
농경시대에 풍년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신을 블레셋 사람, 즉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섬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의 승리로 얻은 언약궤를 전리품으로 다곤 산당에 갖다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다음 날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제 자리에 세웠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이번에는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스돗 지역에 독종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언약궤를 가드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가드에서도 독종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에그론으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에그론 사람들에게도 재앙이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언약궤를 다시 본처로 돌려 보냈습니다.
보세요. 언약궤는 보호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전쟁대열이 아닙니다.
어떻게 서느냐는 의미가 없어요.
그러나 지금은 의미가 있지요.
왜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명령대로 행하는 것이 의미가 있지요.
명령대로 군사, 양각나팔, 즉 뿔나팔 부는 제자장들을, 언약궤, 그리고 군사순으로 이들은 하루에 여리고 성을 한 번씩 돌았습니다.
그런데 돌때 이들은 외치지도 말고 음성을 들레지도 말고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침묵하라는 것이지요.
며칠 동안. 육 일 동안.
그리고 외치라 할 때 외치라고 하십니다.
정말 이상한 전쟁을 하지요.
육일동안 입 다물고 하루에 한 번씩 돌고 칠 일째는 일곱 번을 돕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돌때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붑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외치라, 여호와께서 이 성을 주셨느니라고 하면 외치면 됩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합니까?
쳐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육일동안 하루에 한 번씩 성을 돌게 하셨을까요?
그리고 칠 일째 일곱 번째 왜 양각나팔이 불리고 외치는 소리를 낼까요?
이 부분을 우리들이 해결해야 여리고전쟁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육일동안 창조하시고 칠 일째 쉬셨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인간이 도움 준 것 없지요.
인간이 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지음을 받았을 뿐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이지요.
하나님의 안식은 복과 거룩이 함께 하는 안식입니다.
이것에 근거하여 오늘 본문을 봅시다.
그렇다면 육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간단하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셨다. 그렇다면 인간은 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 돌았지요.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린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가 아니라 우린 죄인입니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린 이 땅 얻을 자격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대로 이 땅을 주시는 것입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칠 일째 일곱 번 도는 것과 양각나팔 부는 것과 소리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양각나팔은 희년에 부는 뿔 나팔입니다.
레위기 25장8-12절입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 번인 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는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 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참으로 희한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희년에 부는 뿔나팔을 불까요?
레위기 25장에 의하면 희년이 누구를 위한 희년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을 위한 희년이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처음 주신대로 원상회복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나팔을 지금 붑니다.
일곱째 날에 부는 것은 간단하지요. 참 안식을 부는 것입니다.
참 안식을 외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도대체 누구의 안식이냐 말입니다. 누구의 희년입니까?
여리고성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소리 하겠습니까?
정말 해도 너무하네. 여긴 우리 땅인데, 여호와가 뭔데 희년을 선포하니, 안식 을 주니.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다. 안식과 축복을.
정말 이럴 수가 있느냐?
이미 우리가 이 땅을 차지한지 얼마나 오래되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여리고성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 갓난아기, 아줌마, 할머니, 아이 밴 아줌마, 어떤 누구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오직 진멸의 대상입니다.
이들에겐 희년이 없습니다. 이들에겐 오직 저주만 있을 따름입니다.
진멸만 있을 뿐입니다. 이들에겐 축복이 없습니다. 이들은 거룩과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희년을 누립니까? 어떻게 축복을 누립니까?
어떻게 거룩해집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심으로 이들은 희년을 받게 되고 축복을 받고 거룩한 것입니다.
여리고성 점령의 장면에서 시작을 이런 식으로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이 여리고 성을 도는 것, 그리고 나팔 부는 것, 이들이 외치는 것, 그리고 여리고 성을 진멸하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가 다 누가 행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행한 일들은 무엇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자신들을 부정하는 것으로 행한 일들입니다.
그 이유를 제가 지금까지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작전을 벌이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자신들이 여리고 성으로 들어가 전쟁을 직접 하더라도 이 싸움은 자신들의 싸움이 아님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많이 오해를 합니다.
무슨 오해를 하는고 하면
예수님을 믿으니 우린 예수님을 믿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요.
왜 그럴까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은 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거든요.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도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도구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자랑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사복음서에서 왜 열두 제자를 뽑았고 왜 베드로가 마귀 소리 들었고, 왜 베드로가 저주부인, 맹세까지 했는지를 몰라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고 자살 해 버린 이유를 몰라요.
이들의 삶은 구약 이스라엘 전 역사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삶이란 말입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해도 자기 자신들 한 자리 차지하는 것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고 팔아먹는다 말입니다.
하나님의 활동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자들,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자들이 이렇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기록한 이유를 몰라요. 물론 성령 받지 못해서 알지 못하지요.
자꾸 이런 생각합니다. 성령 받은 베드로를 보니 인간도 할만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사복음서에 왜 그런 것을 기록해 두었는지 몰라요.
오히려 나도 베드로처럼 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베드로가 들으면 참으로 미칠 지경일 것입니다. 주님의 일하심. 주께서 성령을 통해 일하심을 알지 못하는 자는 저주받은 자입니다.
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쫓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보면 늘상 하는 궁리가 나는 저들처럼 되지 않아야지. 나는 말씀 잘 순종하여 복 받은 자로 살아야지. 이런 식의 생각입니다.
사도바울이 왜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는 이유를 몰아요.
이들은 단지 바울의 이런 이야기는 성경의 한부분이라고 말을 해요.
성경에는 수많은 말씀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 말씀들은 무슨 말씀들일까요? 우리가 듣고 행동해야하는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말씀들을 십자가에 엎어버리면 말씀의 의미가 금세 밝혀질 것인데 이들은 말씀을 십자가와 별개로 생각합니다.
왜 여리고성을 군사, 양각 나팔 부는 제사장, 언약궤, 군사로 육일동한 하루에 한번씩, 칠 일째 일곱 번 돌고 일곱 번째 양각나팔불고 소리 지르고 여리고성으로 돌격해 가는 이유를 모르는 자이지요.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성도나 성도 아닌자가 사는 모습이 별반다르지 않다고 말입니다.
성도도 행동을 해요. 여리고성 돌아요. 성도 아닌자도 여리고성 돌아요. 돈 벌어요. 직장 다녀요. 자식 키워요.
그런데 성도는 뭐라고 해요. 주님의 은혜라고 하지요.
그런데 성도 아닌자는 주님의 은혜 맞습니다. 맞고요. 그 은혜 안에 제가 살았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런 자는 어떻게 될까요?
제거됩니다.
요한계시록20장12-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섯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이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보좌 앞에는 두 종류의 책밖에 없습니다.
한 종류는 생명책, 다른 한 종류를 행위 책입니다.
생명책 플러스 행위 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웁니다.
행위 책에 기록된 자들이지요. 이들은 철저하게 행위를 근거로 해서 심판을 받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어린양의 피만 앞장세우지요.
그러나 행위 책에 기록된 자들은 무엇을 앞장세우겠습니까?
간단합니다. 행위입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아닙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사람의 행위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오직 불 못만 입을 크게 벌리고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기록된 자의 관심은 생명되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죽임당한 어린양밖에 없습니다.